114화
‘레알 마드리드 개조 프로젝트’ 1단계.
리더들과 먼저 친해질 것.
라스의 말에 따르면 두 개 그룹을 이끄는 핵심 인물이 있었다.
발언권이 있고 영향력이 큰 친구들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으면 나머지 그룹원들은 줄줄이 사탕처럼 딸려올 것이다.
고심 끝에 선정한 나의 첫 번째 타깃은 스페인 그룹을 이끄는 이케르 카시야스였다.
접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왜냐?
그에게는 직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장, 몇 가지 조언을 구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오늘 저녁 같이 하실 수 있을까요?”
팀에 막 합류한 선수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거절한다면 당장 완장을 떼어 버려야지.
다행히 카시야스는 그 정도로 막장 주장은 아니었다.
“좋아, 내가 잘 아는 식당이 있는데 거기로 가지.”
단골은 단골인 듯, 카시야스의 얼굴을 확인한 사장이 반색하며 아늑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정백강 선수, 가시기 전에 사인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실리까지 철저하게 챙기면서 말이다.
“그래. 조언을 구할 일이란 게 어떤 거야?”
카시야스가 와인 한 모금을 넘기며 물었다.
“아, 네. 아시다시피 제 이적료와 몸값이 과분하게 높잖아요.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부담감이 상당하거든요. 주장은 레알 마드리드 선수로서 정말 오래 뛰셨는데, 심리적 압박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해요.”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몸값이 오르는 건 기쁜 일이고, 카시야스의 심리학 수업 같은 건 별 관심 없다.
그러나 친밀감을 형성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약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다.
“흠... 어려운 질문이네.”
카시야스의 표정이 굉장히 진지해졌다.
선배로서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모습이다.
“나 같은 경우는 부담이나 압박이 찾아올 때마다 오히려 영광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 같아. 빅이어를 들어올렸을 때나, 리가 우승을 했을 때의 기쁨 같은 것들 말이지. 그러면 자신감이 확 생기더라고. 백강, 너 같은 경우는 선수 생활 하면서 성공했던 기억이 훨씬 많잖아? 아마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와, 그거 정말 괜찮은 것 같네요.”
성의 있게 대답해주는 모습을 보니 카시야스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의외인걸? 긴장이라고는 안 하는 성격일 줄 알았어.”
“하하, 그래 보였나요?”
“베르나베우에서 해트트릭을 두 번이나 한 공격수잖아. 나는 피해자였고. 이적 소식 듣고 얼마나 기뻤는데.”
“하하하, 민망하네요.”
대화가 진행되면서 어색함은 점점 사라졌고 종국에는,
“오늘은 내가 얻어먹었으니, 다음엔 우리 집으로 한 번 초대할게.”
“어유, 좋죠.”
차후 데이트(?) 일정까지 잡았다.
일단 첫 단추는 제대로 끼운 듯하다.
* * *
카시야스와 호감도를 쌓은 후, 이어서 내가 택한 접근 대상은 호날두였다.
사람이 바뀌었으니 공략법도 바뀌는 게 인지상정.
호날두는 남의 감정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 나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이런 타입은,
“와, 오늘 패션 끝내주는데?”
일단 ‘무한 칭찬’으로 다가가는 게 해답이 될 수 있다.
“그러게... 정말... 센스... 있다...”
나의 눈짓을 받은 라스가 억지로 칭찬 대열에 합류.
“진짜? 고마워!”
구찌표 일수 가방을 번쩍 들며 기뻐하는 호날두.
대체 얘가 어디 가서 패션 가지고 칭찬을 들어봤겠나.
저렇게 활짝 웃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훈련 때도 패스 몰아주고, 골 넣을 때마다 감탄사 연발해주면서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물은 며칠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백강, 내일 우리 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할까 하는데 너도 올래?”
“기꺼이.”
쉬운 녀석 같으니라고.
이렇게 개조 프로젝트 완수를 위해 팀 내에서 나의 입지를 착착 넓혀 나가고 있는 와중에, 또 한 번의 이적이 성사되었다.
카카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 계속 팀을 떠날 각을 보던 라파엘 반 더 바르트가 기어이 토트넘으로 가버린 것이다.
정백강-스네이더에 이어 정-반 라인의 꿈을 꾸던 내게는 아쉬운 소식이었다.
중거리슛 좋은 미드필더와 나의 궁합은 최상이었으니.
그리고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면 카카는 앞으로 구단 역사에 남을 ‘먹튀’가 될 예정이고 말이다.
나와 호날두면 이미 강력한 공격진인 건 사실이었지만, 우리의 목표는 매우 높은 곳에 있지 않은가.
반 더 바르트가 남기고 간 유산은 1100만 유로(약 165억 원).
이번 이적시장에서 우리 팀의 첫 수입이었다.
선수 클래스에 비해 좀 싸게 판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소중한 돈.
정말 잘 써야 했다.
무리뉴 감독은 스카우트와 코치들뿐만 아니라 선수들까지 한 명씩 불러서 영입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차례가 왔다.
* * *
“왔나.”
“네, 감독님.”
“왜 불렀는진 알고 있겠지?”
“네, 동료들한테 들었습니다.”
“백강 너한텐 특별히 기대가 커. 축구 보는 눈이 남다르잖아?”
“과찬이십니다.”
나에 대한 무리뉴 감독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좋은 의견들이 좀 나왔나요?”
“의견은 많이 나왔지. 현실성이 없어서 문제지만. 이걸 좀 보겠나.”
무리뉴 감독이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무수히 많은 선수들의 이름과 소속팀이 적혀 있었다.
“내가 페레즈 회장에게 영입에 대해 전권을 위임받은 건 알고 있겠지?”
“네.”
“그런데 이적 자금을 추가로 줄 수는 없다고 하더군. 그럴 만도 하지. 이미 천문학적인 돈을 썼으니까. 그래도 이번 시즌 수입은 내 재량껏 쓸 수 있긴 해.”
“그럼 예산이 1100만 유로인 셈이군요.”
“그래. 애매한 액수지. 우리 팀에 어울리는 주전급 선수를 사기엔 좀 모자라고, 새파란 유망주나 다 늙은 노장에게는 좀 많을 수도 있는 그런 정도야.”
명단에는 내가 잘 아는 선수도 있고, 아예 처음 들어보는 이름도 있었다.
“다비드 실바! 이 선수 아주 괜찮죠.”
“알론소가 정말 극찬을 하더군. 꼭 데려왔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아쉽게도 맨시티에서도 관심이 있어. 경쟁 붙으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지. 제의는 해보겠지만 힘들 거야.”
아... 만수르... 인정.
“네이마르도 있네요.”
“모든 스카우트, 코치들이 탐내는 선수지. 마르셀루는 메시 급의 재능이라고 힘주어 말했고. 하지만 산투스에서 원하는 금액이 최소 5천만 유로야. 다음 시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도전해 봐야지.”
750억 원이라.
끄응... 뭐, 네이마르니까.
“아마... 토니 크로스도 무리겠죠?”
“뮌헨에서 당장은 거래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 지난 시즌 임대 갔던 레버쿠젠에서 활약이 엄청났잖나.”
아, 왜 이렇게 다들 비싸게 구는 건지 짜증이 나려다가 나의 몸값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따지고 보면 현재 상황은 나 때문에 생긴 거나 다름없으니.
“음... 글쎄요. 저도 딱히 추천할 만한 선수는 없... 응?”
“왜 그러지?”
처음부터 끝까지 명단을 다시 한번 살폈다.
확실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은 이름이 없었다.
“한 명 떠올랐습니다.”
무리뉴 감독의 눈이 반짝 빛났다.
* * *
[레알 마드리드, 벨기에산 유망주 케빈 더브라위너 영입]
[이적료 5백만 유로... 한화 약 75억원]
나의 추천을 받은 이후 즉시 더브라위너의 뒷조사(?)에 들어간 무리뉴 감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완전히 꽂혀 버렸다.
“이런 재능이 있었다니!”
물론 아직 19살에 불과해서 경험도 부족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도 많았지만 두드러지는 장점이 두 개나 있었다.
첫 번째는 빼어난 킥력.
주발인 오른발은 말할 것도 없고, 왼발로도 강력하면서도 정교한 패스와 슈팅을 뻥뻥 때려댈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정백강이 있는 팀에서 이 능력은 특히 빛을 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두 번째, 무리뉴 감독이 결정적으로 ‘케빈 홀릭’에 빠진 지점은 왕성한 체력과 활동량이었다.
첼시 시절부터 무리뉴 감독이 하드워커 스타일의 선수를 선호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제대로 취향저격을 당한 셈이었다.
벨기에 리그 중위권 팀인 KRC 헹크에서 뛰던 더브라위너에게 갑자기 레알에서 연락을 했으니...
선수 본인뿐만 아니라 구단 자체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최초 협상 시 헹크에서 요구한 이적료는 놀랍게도 50만 유로(7억 5천만 원)였다.
여차하면 1100만 유로를 몽땅 쏟아부을 생각까지 하고 있던 우리 입장에서는 약간 김 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헐값에 볼 빨간 벨기에 소년 한 명을 납치(?)해 오나 했는데, 역시 세상사는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방해꾼 하나가 등장했다.
우리는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더브라위너를 눈여겨보던 또 하나의 거대 구단, 첼시였다.
이때부터 상황은 완전히 반전.
‘감사합니다’ 하며 굽신대던 헹크가 고자세로 나오기 시작했다.
50만 유로로 시작한 이적료는 금세 100만이 됐고, 200만까지 돌파했다.
혹시나 놓칠까 봐 조바심이 났던 무리뉴 감독은 화끈하게 500만을 질렀다.
한 방에 두 배 이상 훌쩍 뛴 금액에 첼시는 깔끔하게 ‘GG’ 선언.
결국 더브라위너는 우리 팀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더브라위너의 합류 후 첫 팀 훈련이 끝났다.
이런 기회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오늘 특별히 바쁜 거 없지?”
“네? 네!”
더브라위너가 안 그래도 빨간 볼을 한층 더 붉히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레알에서 첫 훈련을 한 것도 아직 실감 나지 않는 일일 텐데,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니 얼마나 꿈을 꾸는 것 같겠는가.
“주장! 우리 초특급 유망주가 오신 기념으로 다 같이 식사라도 하면 어떨까요? 시즌 개막도 얼마 안 남았는데 단합하는 의미에서요.”
입으로는 카시야스를 찾았지만 눈으로는 라스를 보고 있었다.
라스가 작게 한숨을 쉬며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우와아... 정말... 좋은... 생각... 이네...”
카시야스의 표정에서 갈등하는 빛이 스쳤다.
“재밌겠네! 다 모여서 뭘 한 지가 오래 되기도 했고 말이야. 비용은 내가 낼게, 다들 가자!”
크... 나이스 타이밍.
우리의 호프 알바로 아르벨로아가 거들고 나섰다.
“나도 가지.”
아르벨로아의 슈퍼 절친인 사비 알론소도 합류의 뜻을 표했다.
알론소도 소란스러운 걸 별로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데, 아무래도 내 돌발행동의 의미를 눈치챈 것 같았다.
한 명이 떠들면 무시할 수 있지만, 무려 세 명이 찬동해버리니 카시야스 입장에선 거절하기도 어렵게 됐다.
“그럼, 그럴까?”
좋았어.
카시야스가 가면 부주장 세르히오 라모스도 올 거고, 어지간한 스페인 멤버들은 다 올 거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크리스! 너도 갈 거지?”
스리슬쩍 빠지려다가 지목된 호날두가 그 자리에 딱 굳었다.
“지난번 바비큐 파티 때 해줬던 이야기 있잖아. 그거 정말 끝내주게 재밌었거든. 오늘 또 해주면 좋겠는데. 나만 알기엔 너무 아까운 얘기야.”
호날두도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정타를 날릴 차례다.
“그리고 우리 유망주께선 나보단 너한테 배울 게 많지 않겠어? 나야 헤더밖에 못 하니까. 더브라위너, 크리스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지 않아?”
“네, 호날두 씨 플레이는 늘 감탄하면서 보고 있어요. 같이 가시면 정말 좋겠어요. 저한테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어요?”
그래 케빈, 그거다.
축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사회생활 감각도 좀 있구나?
무리뉴 감독한테 널 추천하길 정말 잘했어.
“이거 참...”
호날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네. 갈게.”
해냈다!
이 정백강님께서 해내고야 말았다!
물론 오늘 한 번의 자리가 그리 많은 걸 바꾸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작을 했다는 데 의의가 있는 법.
일단 부딪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마드리드 최고의 인맥을 자랑하는 카시야스가 장소를 섭외하는 사이, 나와 눈이 마주친 알론소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오른손 엄지를 추켜올렸다.
내 노력을 알아줘서 고마워, 론소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