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형님, 재밌는 거 하신다면서요?”
- 말도 마. 하필이면 내가 첫 번째라니까? 백강 네가 이적 안 했으면 나까지 순서가 안 왔을 텐데.
“이적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스크바 거르고 아스널을 뽑았던 제 심정을 좀 이해하시길 바랄게요.”
-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은데... 어, 이제 시작한다. 잘 지내고 다음에 보자.”
“넵!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겠슴다.”
- 아냐, 보지 마.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볼게요. 힘내세요!”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누구랑 통화한 거야?”
내 옆에 앉아 있던 라모스가 물었다.
“아, 줄리우 세자르 형님.”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다 싶더니. 줄리우 형이었구나.”
세자르 형님의 브라질 대표팀 후배인 마르셀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2010-2011 챔피언스리그 32강 대진 추첨이 있는 날.
나의 헌신적인 노력에 느낀 바가 있었는지, 부주장인 라모스가 자신의 집에 동료들을 초대했다.
호날두가 안 오긴 했지만, 어지간한 주요 선수들은 모두 모였다.
팀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역시 지성이면 감천이다.
“어우, 저 형님 얼굴 좀 봐.”
정장을 멋지게 쫙 빼입은 세자르 형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엷게 미소를 띠려는 것 같은데 긴장해서인지 입꼬리가 너무 올라갔다.
“큭큭큭큭...”
바짝 얼어 있는 선배의 모습을 보며 마르셀루도 실소를 터뜨렸다.
오늘 UEFA에서는 예년과 다른 방식의 추첨을 준비했다.
작년 우승팀인 인테르의 주역 선수 4명을 초청해서 포트(Pot)별로 추첨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세자르 형님 말마따나, 내가 잔류했다면 분명히 저 자리에 서 있었겠지.
“혹시 피하고 싶은 상대 있는 사람? 나는 인테르만 아니면 될 것 같은데.”
“나도 밀란만 아니면 돼.”
나의 질문에 카카가 반응했다.
“글쎄.. 차라리 32강에 일찍 만나는 게 낫지 않나? 둘 다 올라갈 가능성도 있잖아.”
알론소의 말에 절친 아르벨로아가 바로 반박했다.
“이봐 사비. 너는 리버풀이 탈락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부정할 수 없군.”
챔피언스리그 5회 우승에 빛나는 명문 리버풀은 지난 시즌 EPL에서 7위를 차지하며 전혀 아깝지 않게 탈락을 맛봤다.
세자르 형님이 포트 1에 속한 8개 팀의 조 배정을 모두 마쳤다.
디펜딩 챔피언 인테르는 A조, 카카의 친정팀 밀란은 G조에 속했다.
“이제 곧 결정되겠네요. 어휴... 떨려...”
우리 팀이 속한 포트 2 추첨 시작 직전.
오늘 모인 그룹에서 막내를 맡고 있는 더브라위너가 초조한 듯 양손을 비볐다.
요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구...
세자르 형님에 이어서 2번 타자로 나온 인물은 마이콘이었다.
모델 같은 수트핏에 진중해 보이는 표정.
“올... 저 형 좀 멋있는데?”
세자르 형님을 그렇게 비웃었던 마르셀루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추첨구를 못 열어서 쩔쩔매는 모습이 야속한 카메라에 잡혔다.
“푸하하하핫! 두 형 다 나중에 대표팀 소집되면 놀려 줘야겠다.”
한 일주일 웃을 분량을 오늘 다 웃고 있는 마르셀루다.
다시 한번, 이적하길 정말 잘했어.
한참을 낑낑대다 겨우 꺼낸 마이콘의 첫 번째 픽은 발렌시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기다리고 있던 C조로 배속되었다.
이것으로 은근 기대했던 ‘호날두 VS 맨유’ 매치업은 일단 물 건너갔다.
2픽 로마는 바이에른 뮌헨과 같은 E조의 품으로.
“아니, 시발 뭐야? 우린 언제 나오는 거야?”
의외로 차분하게 지켜보던 페페가 기어이 짜증을 냈다.
샤흐타르, 벤피카, 마르세유, 파나티나이코스가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레알 마드리드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이제 남은 팀은 우리와 베르더 브레멘뿐.
“최악이네...”
카카가 한숨을 쉬었다.
마치 짠 것처럼 A조와 G조의 두 번째 칸만 텅 빈 채 남아 있었다.
“이야, 완전 반반이네? 정말 재밌게 됐어.”
강 건너 불구경 중인 아르벨로아가 알론소를 끌어안으며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두 사람의 진한 스킨십에 당황하기도 했으나,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그러려니 하는 중이다.
심지어 아내끼리도 친하다는...
아직 스페인 문화에 대한 적응이 더 필요한 거겠지.
“나왔다! 나왔어요!”
더브라위너가 소파 쿠션을 두드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이콘이 드디어 우리 팀 이름이 적힌 종이를 뽑아 든 것이다.
밀라노행은 일단 확정, 과연 조 1위를 다툴 상대는?
“그렇지!”
“안돼!”
나의 환희와 카카의 절규가 교차하는 가운데, 마드리드의 밤이 깊어갔다.
* * *
2010년 8월 29일.
스페인 마요르카 섬의 팔마에 위치한 이베로스타르 에스타디.
우리 팀의 2010-2011 시즌 라리가 개막전이 열리는 장소였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최대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라싱 산탄데르 원정에서 3-0 승리를 거두며 시즌을 상큼하게 출발한 상태.
메시, 이니에스타, 그리고 이적생 다비드 비야가 사이좋게 한 골씩을 넣으며 쾌승을 거뒀다.
이번 시즌까지 우승해서 리가 3연패를 이루겠다는 포부가 느껴지는 스코어였다.
경기력은 뭐, 언제나처럼 완벽에 가까웠고.
“주눅들 필요는 없겠지. 우리 역시 충분히 강하다.”
경기를 앞둔 무리뉴 감독의 당당한 어조에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6전 6승, 24득점 2실점.
우리 팀의 친선경기 성적이었다.
경기당 4골씩을 때려 박으면서 실점은 평균 0.33점에 불과했다.
물론 대부분은 우리보다 전력이 약한 상대이긴 했으나, 올 시즌은 좀 다르기를 기대하는 팬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기엔 충분했다.
24골 중 절반인 12골은 나의 몫, 호날두가 7골, 나머지가 5골을 책임졌다.
오늘 개막전 상대인 RCD 마요르카는 비운의 팀.
지난 시즌 라리가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5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으나, 과도한 부채 때문에 유로파리그 출전 자격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마요르카 측에서는 당연히 항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비단 마요르카뿐만 아니라 많은 팀들이 겪고 있는 재정 문제는 라리가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케르! 오늘 좋은 게임 하자구.”
카시야스 주장이 깍듯이 인사를 건네는 상대는 마요르카의 감독 미카엘 라우드럽.
90년대를 주름잡았던 위대한 플레이메이커이자,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모두 선수 생활을 했던 희귀한 이력의 소유자기도 하다.
“잘 아는 사인가 봐요?”
“내가 카스티야에 있을 때 많이 챙겨주셨었지. 좋은 분이야.”
역시 주장의 짬밥이란...
1981년생이니 아주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데뷔를 워낙 일찍 해서 여기저기 친분이 많은 주장이다.
대망의 개막전 선발 라인업은 4-2-3-1 포메이션.
골키퍼는 당연히 주장.
라모스와 페페가 센터백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 양쪽 풀백으로는 마르셀루-아르벨로아가 출전한다.
알론소와 라스가 더블 볼란치로 공수에 힘을 실어주고, 그 위에서는 카카가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양쪽 측면에는 호날두와 이과인이 포진.
최전방에는 말할 것도 없이 정백강이란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특기할 만한 건 후보 선수 명단에 더브라위너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
당초 임대가 유력하다는 예상이 많았지만, 무리뉴 감독은 옆에 두고 직접 키우기로 결정했다.
선수 육성에 정답은 없는 법.
추천한 사람으로서, 부디 내가 기억하는 그 더브라위너로 자라주길 바랄 뿐이다.
킥오프.
“자! 한바탕 놀아볼까?”
라모스의 시그니처 대사와 함께 홈팀 마요르카의 선축으로 이번 시즌 첫 번째 공식경기가 시작되었다.
거함 레알을 맞아 완전히 수비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바르셀로나 출신답게 ‘크루이프이즘’에 입각한 공격적인 패싱 축구를 초장부터 구사하려는 라우드럽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선수들이 문제였다.
마요르카의 유럽 대항전 진출이 좌절되면서, 작년의 돌풍을 이끌었던 주축들 중 상당수가 팀을 떠난 상태.
라우드럽 감독의 웅대한 꿈을 펼치기에는 선수단의 클래스가 받쳐주지 못했다.
중앙 미드필더 에밀리오 은수에가 시도한 전진 패스를 라스가 가볍게 끊어내며 공수 교대.
터엉-
재능은 크게 없지만 공격에도 욕심이 있는 편인 라스가 카카의 발 앞에 땅볼 패스를 깔아주었다.
무리뉴 감독이 오프시즌 내내 치열하게 훈련시켰던 ‘레알의 역습’을 보여줄 시간.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공을 뺏으려 드는 은수에의 압박을 간결한 드리블로 피한 카카가 왼쪽 측면으로 스루패스.
캡틴 라울의 7번을 이어받은 호날두가 공을 잡았다.
상징성 때문에 이 백넘버를 탐내는 선수들이 몇몇 있었는데 가장 징징댔던 호날두의 차지가 되었다.
원래 호날두가 쓰던 9번은 나에게 돌아왔다.
나야 원체 그런데 관심이 없어서 아무 번호나 쓸 생각이었는데, 무리뉴 감독이 ‘꽂아 버렸다.’
그러면서 했던 말이,
- 레알 마드리드 역대 최고의 9번이 되어라.
별 것 아닌 말 같지만, ‘레알 역대 최고의 9번’은 레전드 오브 레전드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라는 게 함정이었다.
“온다!”
호날두가 드리블을 시작하자 마요르카 수비진이 잔뜩 긴장했다.
이때는 아직 호날두의 온더볼 능력이 살아 있을 시절.
주춤주춤 중앙으로 파고들던 호날두가 슈팅 페이크로 수비를 현혹한 뒤 오른발 바깥쪽으로 살짝 밀어 스루패스를 시도했다.
툭-
패스를 받은 카카가 순간적인 가속으로 센터백 루벤 곤잘레스를 따돌렸다.
사색이 되어 뛰쳐나오며 몸을 날리는 두두 아우아테 골키퍼.
공에 손을 갖다 대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잡아내거나 완전히 쳐내진 못한 게 비극의 씨앗.
부지런히 뛰어가서 공이 골라인을 벗어나기 직전 살려낸 카카가 고개를 들어 페널티박스 안쪽을 확인했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높게 띄워 찬 공.
토옹-
이 맑고 고운 소리가 마요르카 선수들에겐 절망을 예고했다.
콰아앙-
전반 3분.
살벌한 파열음과 함께 정백강의 역사적인 ‘1호골 in 레알’이 터졌다.
EPL? 세리에? 라리가?
어디가 됐든 상관없다.
뚝배기 앞에선 모두가 평등할지니!
* * *
[레알 마드리드, 마요르카 4-0 완파하고 리가 첫 승 신고]
[‘2억 유로의 사나이’ 정백강, 2골 2어시스트로 ‘만점 활약’]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적응기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 개막전에서 멀티골.
어시스트 두 개는 모두 호날두에게 떠먹여 준 것이었는데, 애가 철은 좀 없어도 결정력 하나는 기가 막혔다.
하도 얻어맞아서 혼이 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임한 라우드럽 감독은 까마득한 후배의 플레이에 이런 평을 남겼다.
“영상으로는 정말 많이 봤지만, 정백강이 뛰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다. 실제로 보니 훨씬 더 공포스럽더라. 정백강은 라리가의 재앙이 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한테 재앙이라니요.
격한 칭찬 감사합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