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16화 (117/176)

116화

미카엘 라우드럽 감독의 예언은 곧 현실이 되었다.

라리가에 상륙한 ‘허리케인 백강’의 파괴력 앞에 오사수나, 레알 소시에다드, 에스파뇰, 레반테, 데포르티보가 모조리 휩쓸려 나갔다.

리가 7라운드 말라가전에서는 레알 유니폼을 입고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챔피언스리그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약스와 오세르를 상대로 3골 2어시스트를 퍼부었다.

시즌 전체 성적은 9경기 12골 10어시스트.

팀의 총 득점이 29득점이었으니, 득점 관여율이 75%를 상회하는 셈이었다.

세리에와 라리가는 다르다며 나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언론(주로 친 바르셀로나 쪽)들은 겸손하게 ‘아닥’에 들어갔다.

미쳐 날뛰는 에이스를 등에 업은 우리 팀의 기세는 말 그대로 파죽지세(破竹之勢).

9연승, 29득점, 5실점.

결과로 보나 경기력으로 보나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한편 숙명의 라이벌 바르셀로나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승 가도를 달렸다.

역시 리오넬 메시가 8골로 팀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했으며, 다비드 비야와 페드로 로드리게스가 각각 3골을 넣으며 뒤를 받쳤다.

아직 시즌 초반이긴 하지만 결국 라리가의 향방은 두 번의 엘클라시코 결과에 따라 좌지우지될 확률이 높아 보였다.

* * *

<너무나도 얄궂은 대결>.

챔스 G조 최고의 매치업인 우리와 밀란의 경기 선발라인업이 확정되자 모 언론이 붙인 기사 제목이었다.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건 역시 카카였다.

2000년대 중반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불리는 황금기의 에이스로 군림하며 모든 종류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발롱도르와 피파 올해의 선수상까지 차지하지 않았던가.

그런 선수가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밀란을 무찌르기 위해 찾아왔으니 화제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호비뉴였다.

카카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케이스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레알의 크랙’ 하면 누구나 호비뉴의 이름을 떠올리곤 했었다.

그런데 2008년, 순식간에 상황을 바꿔버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당시 레알 회장이던 라몬 칼데론이 호비뉴에 현금을 얹어서 호날두와의 트레이드를 시도한 것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거부로 트레이드는 불발됐지만, 이 소식에 완전 ‘삔또’가 나가버린 호비뉴는 재계약을 거절했다.

이후 맨체스터 시티와 산투스를 거쳐 밀란에 정착한 상황.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이번 경기에 대해 유독 날이 선 반응을 보였던 호비뉴의 인터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제는 비교하기 좀 민망할 정도로 차이가 벌어졌지만, 한때 동료였던 나와 즐라탄의 관계도 흥미를 끄는 요소 중 하나였다.

비록 이적은 했다지만 왕년의 네라주리로서 밀란은 밟아줘야 제맛 아니겠는가.

임전 소감을 묻는 기자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인테르 소속으로 치른 네 번의 밀라노 더비에서 나는 네 골을 넣었다. 거기에 네 개의 도움도 기록했지. 내가 없는 몇 개월 동안 마음 편히 지냈을 밀란 팬들에게, 다시 한번 지독한 공포를 심어주겠다.”

* * *

2010년 10월 19일,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양 팀 응원석에 똑같은 문구의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환영의 대상은 물론 나와 카카였다.

카카 것은 당연히 밀란 팬들이 준비했을 거고, 그렇다면 내 건?

인테르 팬분들이 나를 응원하기 위해서 찾아온 게 분명했다.

이렇게 사람을 또 울컥하게 만드시다니.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네.”

문타리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심성이 여린 편인 카카는 친정팀을 상대하는데 약간의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상대가 밀란이 아닌 인테르였다면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뽑기’를 잘한 마이콘에게 감사해야겠지.

“백강 형, 저 너무 떨리는데 어떡하죠?”

이적 후 첫 선발 출장을 무려 챔피언스리그에서 치르게 된 더브라위너가 초조함에 손을 벌벌 떨었다.

바로 직전 경기였던 말라가전에서 이과인이 부상을 당하면서 공백이 된 오른쪽 윙어 자리.

실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벤제마에게 기회가 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무리뉴 감독의 선택은 놀랍게도 더브라위너였다.

“공을 잡았는데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잖아? 그럴 땐 그냥 나한테 크로스해. 골을 넣든 어시스트를 하든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무리뉴 감독의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더브라위너를 고른 건 아마 좌우 밸런스 문제 때문일 것이다.

왼쪽의 호날두가 이름만 윙어지, 사실상 공격수의 역할을 하는 상황.

무리뉴 감독은 포워드 성향이 강한 벤제마보다는 더브라위너를 넣는 것이 더 좋은 궁합이라고 보는 것 같았다.

“혹시 알아? 오늘 잘하면 아예 붙박이 주전으로 뛰게 될지.”

“에이, 그렇게까진 기대 안 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묘하게 눈을 반짝이는 더브라위너였다.

* * *

“우리 은근히 자주 만나네?”

“오늘에야말로 내가 이긴다.”

“기대할게.”

녀석, 승부욕은 여전하네.

작년 챔스 결승전 이후 약 5개월 만에 재회한 즐라탄.

바르셀로나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한 시즌만에 이탈리아에 복귀했다.

그것도 전 소속팀인 인테르의 철천지원수 밀란으로 말이다.

늘 느끼지만 축구판은 정말 요지경이다.

삑-

휘슬과 함께 밀란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개막 10연승을 노리는 레알 마드리드와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밀란의 통산 14번째 맞대결.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문답게 참 많이도 만났다.

여태까지의 상대 전적은 우리 기준으로 5승 2무 6패.

전적 상 우리에게 앞서는 클럽이 많지는 않은데, 역시 밀란은 밀란이었다.

뻐엉-

밀란 부동의 후방 플레이메이커 안드레아 피를로가 옛 동료 카카의 압박을 벗겨내며 왼쪽 측면으로 공을 뿌렸다.

이 패스의 수신인은 호나우지뉴.

나를 포함해 몇 되지 않는 ‘베르나베우 기립박수’의 주인공 중 하나다.

그 당시의 호나우지뉴였다면 아르벨로아 정도는 손쉽게 상대했을 텐데.

세월이 참 무상하다.

끈질기게 들러붙는 아르벨로아에게 고전하는 호나우지뉴를 돕기 위해, 왼쪽 풀백 루카 안토니니가 올라와서 공을 받아주었다.

퍼억- 삐빅-

아이고.

의욕이 너무 넘쳤던 탓일까.

부지런히 뛰어간 더브라위너가 시도한 슬라이딩 태클에 여지없이 파울이 지적되었다.

자칫하면 옐로카드도 나올 수 있었던 장면.

“이봐, 케빈! 천천히 해! 그래도 투지는 좋았다?”

아르벨로아가 방년 19세 소년을 다독였다.

시작하자마자 얻은 밀란의 프리킥 찬스.

직접 슈팅보다는 세트피스를 노리기에 알맞은 위치였다.

“수비 확인 오케이!”

나에게 마크를 받게 된 즐라탄이 인상을 썼다.

“귀찮게 구는군.”

“친구에게 귀찮다니, 조금 서운한데?”

“친구를 생각해서 저리 가면 안 될까?”

“감독님 지시라서 어쩔 수가 없어.”

“흥, 무리뉴 감독. 내가 무서운 줄은 아는군.”

“그래그래, 좋게 생각하자고.”

키커는 피를로.

특유의 졸린 듯한 눈매로 신중하게 스캔을 마친 피를로가, 치열한 몸싸움이 펼쳐지고 있는 페널티박스 안쪽을 향해 오른발을 휘둘렀다.

투웅-

티아고 실바와의 경합에서 승리한 라모스가 헤더로 볼을 걷어냈지만 멀리 뻗지 못했다.

공을 잡은 선수는 호비뉴.

레알에 대한 원망을 가득 담아 오른발 슈팅을 시도했다.

아아아-

밀란 팬들의 탄식.

제대로 감아 찬 공이 골문을 아주 살짝 넘어갔다.

들어갔다면 아주 멋진 복수극을 완성할 뻔했다.

“다 올라가!”

카시야스 주장이 골킥을 준비하면서 우렁차게 소리쳤다.

위기를 한 번 넘겼으니 이제 우리의 막강 공격력을 뽐낼 차례다.

피를로에 대한 레알의 대답, 알론소가 먼저 나섰다.

터엉-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롱패스에는 롱패스.

오늘 비슷한 포지션으로 출격한 두 천재 미드필더의 자존심 대결도 볼 만하겠다.

알론소의 기가 막힌 패스를 가슴으로 잡아 놓은 호날두를 순식간에 두 명이 에워쌌다.

나의 미친 퍼포먼스에 묻혀 빛이 바래긴 했지만, 호날두 역시 지난 9경기에서 7골 3어시스트로 맹활약 중이었다.

인성 문제를 제외한다면, 여태까지 나와 함께 했던 공격 파트너 중에 호날두가 넘버원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우와아악-

이번엔 우리 팀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졌다.

이냐치오 아바테와 젠나로 가투소로부터 협공을 당한 호날두가, 왼쪽 발뒤꿈치를 이용해 절묘한 패스를 전달하며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이번 시즌 호날두와 함께 상대 오른쪽 측면을 초토화하고 있는 마르셀루가 패스를 받아 시원스럽게 팍 치고 나갔다.

호날두 역시 공을 넘김과 동시에 바로 오프더볼 무브를 시작했다.

마르셀루는 터치라인을 따라 직선으로, 호날두는 페널티박스 안으로 침투하며 사선으로.

두 명의 월드클래스 플레이어가 동시다발적으로 쇄도하자 밀란 수비진이 바빠졌다.

“아바테! 빨리 측면 커버하고! 안드레아! 너도 내려와!”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지시를 내리는 인물은 살아있는 전설 알레산드로 네스타.

벌써 34세로, 센터백임을 감안하더라도 노장의 나이였지만 여전히 주전으로 밀란의 수비를 지휘하고 있었다.

주력이라면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아바테가 대선배의 불호령을 듣더니 놀라운 스피드로 마르셀루를 따라잡았다.

그러나 마르셀루가 누구던가.

기술 좋은 선수가 차고 넘치는 우리 팀에서도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히는 친구였다.

가속도를 이용해 덮쳐 오는 아바테를 크루이프 턴, 아니,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 레전드지?

마르세유 턴으로 여유 있게 제쳐 버렸다.

아바테의 벙찐 표정이 하이라이트.

같은 팀인 나도 어이가 없을 정도인데, 아바테의 충격은 훨씬 심했을 터다.

“헤이!”

호날두가 미친 드리블을 선보인 절친에게 공을 요구했고, 즉각적인 땅볼 패스로 화답을 받았다.

마침 공을 잡은 위치는 ‘호날두 존’.

내가 손을 들고 있었지만 아예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호날두였다.

그럼 그렇지 뭐.

콰아앙- 터엉-

역시 클래스는 영원한 법.

적절한 타이밍에 몸을 날린 네스타가 작정하고 때린 호날두의 중거리포에 발을 갖다 대는 데 성공했다.

급격하게 회전을 먹으면서 궤적이 바뀐 볼이 공중을 날아 반대쪽 측면으로 날아갔다.

“내가 잡을게!”

안토니니의 ‘마이볼 선언’과 거의 동시에 피를로가 소리쳤다.

“루카! 조심해!”

촤아악-

다른 건 몰라도 열심히 뛰는 것 하나만큼은 기깔나게 잘하는 더브라위너가 또 한 번 과감하게 슬라이딩 태클.

판정은?

노 파울이었다.

아, 그리고 우리 ‘5백만 유로의 사나이’께서 진짜 잘하는 게 또 하나 있지.

케빈아, 아까 내가 뭐라고 했지?

“혀엉!”

그렇지, 바로 그거다.

그 감각을 기억해.

빨랫줄처럼 쭉 뻗은 더브라위너의 강력하고도 정교한 크로스가 내 이마를 직격했다.

Gran- Cabeza-

Grande- Testa-

‘위대한 머리’를 뜻하는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가 주세페 메아차에서 동시에 울려 퍼졌다.

흠...

골을 넣은 건 기쁜 일이지만 카카와 호비뉴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결국 또 내가 주인공이 되어 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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