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우- 우- 우우우-
더, 더욱더 크게 야유해다오.
전반 19분에 터진 헤더 선제골 이후, 내가 공을 잡을 때마다 밀란 팬들이 엄청난 야유를 쏟아냈다.
인테르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저 새끼는 이적하고도 우릴 못 괴롭혀서 안달이네.’
끝없는 야유는 대충 이런 의미가 아닐까 싶다.
스트라이커 입장에선 최고의 찬사다.
한 골을 넣었지만 우리의 공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피를로에게 의지하는 밀란의 단조로운 공격 패턴으론 우리 수비진을 제대로 공략하기 힘들었다.
에이스 역할을 해줘야 할 즐라탄은 페페의 찰거머리 같은 마크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
나와 호날두가 어그로를 끄는 사이, 오늘 절정의 폼을 보이는 마르셀루가 아예 직접 공을 몰고 하프라인을 넘어섰다.
터엉-
공 운반도 모자라 기습적인 칼날 스루패스까지.
상대 수비 빈틈을 잘 파고든 카카가 다이렉트로 왼발 슈팅을 시도했다.
“나이스 태클!”
잔뜩 긴장했던 크리스티안 아비아티 골키퍼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카카의 침투도 좋았지만 네스타의 수비가 좀 더 좋았다.
태클에 막혀 골라인을 벗어나는 공.
오늘 노익장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네스타였다.
카카가 멋진 수비를 펼친 옛 동료 네스타에게 손을 내밀었고, 네스타가 씩 웃으며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관중석에서 박수가 우레처럼 쏟아졌다.
승부를 떠나서 정말 멋진 광경이었다.
코너킥.
“케빈! 네가 차!”
코너 에어리어로 걸어가던 알론소가 갑자기 멈추더니 더브라위너에게 손짓을 했다.
“네? 제가요?”
“너 오늘 감이 좋잖아. 네가 차!”
더브라위너가 머리를 긁적이며, 그러나 얼굴에 번지는 웃음은 참지 못하면서 부지런히 뛰어갔다.
론소 형, 거 너무 멋있는 거 아닙니까.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네스타가 수비진 전체에게 엄중 경고를 내렸다.
그렇다.
우리 팀의 세트피스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 수준.
일단 내가 최소 두 명 이상의 수비를 묶어 놓는데, 라모스와 호날두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수비하는 쪽에서 막아야 할 구석이 너무 많았다.
퍼엉-
크...
역시 킥 하나는 진퉁이다.
모든 능력치가 B급인 선수와, S급과 C급이 섞여 있는 선수가 있다면?
전자는 제너럴리스트, 후자는 스페셜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언뜻 생각하면 제너럴리스트 쪽이 좋아 보이지만, 리그 수준이 높아질수록 각광을 받는 건 분명 스페셜리스트였다.
축구는 11명이 하는 스포츠이므로, 조합이나 전술에 따라 약점을 보완하면서 강점을 극대화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
어설픈 ‘육각형 선수’는 반대로 말해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선수’로 전락하곤 했다.
더브라위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 단독 드리블이나 탈압박 등 세밀한 플레이는 기대하기 힘들었지만, 킥과 활동량만큼은 충분히 빅리그 수준인 스페셜리스트가 바로 더브라위너였다.
무리뉴 감독이 꽂힌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고.
뭐, 굳이 이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선수를 찾자면 바로 나, 정백강이었지만.
발기술 하나도 없이 세계를 제패하지 않았던가.
“아오!”
더브라위너의 기막힌 코너킥을 헤더슛으로 연결한 라모스가 머리를 감싸 쥐며 아쉬워했다.
골키퍼 반대쪽을 잘 찔렀으나 골포스트를 스치며 지나가는 공.
아까운 찬스가 날아갔다.
“더 빨리 움직여! 집중해! 집중!”
경기 시작 이후 단 한 번도 앉은 적이 없는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감독이 이탈리안 특유의 격한 제스처와 함께 선수들을 독려했다.
선수와 감독 생활을 통틀어서, 이번 시즌 처음으로 빅클럽에 몸담게 된 알레그리 감독이었다.
본인 커리어를 위해 어떻게든 붙잡아야 하는 기회.
알레그리 감독의 목소리와 몸동작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홈에서, 그것도 또 정백강 때문에 무력하게 질 수는 없는 노릇.
줄곧 밀리던 밀란 녀석들이 드디어 공격적으로 밀고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 신통찮았던 피를로 대신, 월드컵에서 보여준 활약을 인정받아 제노아에서 이적해온 케빈프린스 보아텡이 돌격대장 역할을 맡았다.
올해 나이 23세.
주축 선수들의 나이가 많은 편인 밀란에서는 거의 갓난아기 수준이었다.
가투소에게 공을 이어받은 후 저돌적인 드리블로 전진, 또 전진하는 보아텡.
우리 팀 미드필더 중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하는 라스까지 제쳤다.
최전방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즐라탄이 보아텡의 움직임에 맞춰 순간적으로 페페를 떨쳐내며 살짝 뒤쪽으로 빠졌다.
가속도를 살린 2대 1 패스.
톡- 탁-
공을 받은 즐라탄이 쇄도하는 보아텡의 발 앞에 툭 떨어지는 정교한 로빙 패스를 선보였다.
누가 뭐래도 즐라탄은 즐라탄.
클래스가 살아 있었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터억-
오우우우-
오늘 여러 번 탄식하는 로쏘네리들.
우리 팀 최후의 보루 카시야스 주장이 회심의 땅볼 슈팅을 그냥 잡아 버렸다.
보아텡이 어처구니를 상실한 듯 한숨을 쉬며 하늘만 쳐다보았다.
‘지다네스-파보네스’ 정책을 쓰던 1기 갈락티코스 시절부터 레알 골문을 지켜온 주장에게, 라모스-페페와 함께 하는 현재 수비진은 5성급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밀란에게도 한 방이 있다는 것은 증명했지만, 끝내 결과물은 만들지 못한 채 전반전이 종료되었다.
* * *
“백강 형! 저 자신감이 좀 생기는데요?”
아직 전반전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더브라위너가 해맑게 말했다.
‘악마의 게임’이라 불리는 <풋볼 매니저>.
이 게임에서 유망주를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건 훈련도 아니요, 좋은 스승을 붙여주는 것도 아니다.
큰 경기에 계속 출전시키는 게 왕도다.
물론 이건 게임이 아닌 현실이지만, 더브라위너는 출전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세계 최고 권위의 대회인 챔피언스리그에서, 그것도 밀란을 상대로 공격포인트를 기록했으니 어깨가 올라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만약 임대를 갔다면 하기 힘들었을 짜릿한 경험.
물론 플레이타임 자체는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을 테니, 어느 쪽이 더 낫다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많이 안 좋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더브라위너가 신이 나서 떠드는 사이, 절뚝이며 들어온 카카에게 무리뉴 감독이 말을 걸었다.
“네... 더 이상 못 뛸 것 같습니다...”
마르셀루의 스루패스를 받기 위해 전력 질주했던 시점부터 어딘가 불편해 보였던 카카다.
자기 입으로 교체를 얘기할 정도면 정말 심각하단 의미.
시작되는 건가.
희대의 먹튀 [카카]의 전설이...
카카는 의료진과 함께 정밀 검사를 받으러 이동했고, 벤제마가 기회를 얻었다.
혹시나 하고 기대하던 그라네로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아, 이래서 이적했었구나.
레알의 흰색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지만, 치열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후반전 재개.
우리 선수 명단에 카카가 빠진 것을 확인한 밀란 팬들이 조금 술렁거렸다.
여러분, 당신들의 옛 영웅은 부상으로 스러졌습니다.
아마 다신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을 거예요.
이과인의 부상이 더브라위너에게 기회였듯, 카카의 이탈도 벤제마에게는 호재였다.
어차피 원톱 자리에서 나를 밀어내는 건 불가능했으니, 자신이 2선에서도 경쟁력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벤제마였다.
밀란도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입을 털어댄 거에 비해서는 활약이 미비했던 호비뉴가 빠지고, 알레산드르 파투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어느덧 밀란에서 4번째 시즌을 맞는 파투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요새는 다른 가십거리로 더 많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아직 스물하나밖에 안 된 주제에(?) 이혼을 하더니, 새로운 여인을 만나기 시작했는데...
바르바라 베를루스코니가 그 주인공이었다.
이름에서 느낌이 확 오지 않는가.
이탈리아 총리이자 밀란의 구단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막내딸이 바로 그녀였다.
바르바라가 파투보다 5살 연상이며, 역시 한 번 ‘다녀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마 지금도 VIP 석에 앉아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서일까.
파투가 들어오자마자 날뛰기 시작했다.
개인기는 호비뉴가 더 나을지 몰라도, 공 없을 때의 움직임만큼은 파투가 우월했다.
즐라탄은 거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까지 내려와서, 침투하는 파투에게 위협적인 스루패스를 계속 찔러주었다.
즐라탄 녀석, 나랑 뛸 땐 저런 거 하기 싫어하더니...
바르셀로나에서 고생한 후로 좀 성숙한 걸까?
후반전의 초반 분위기는 홈팀 밀란이 주도하는 가운데, 수비진의 활약으로 아직 동점은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 시즌 어마어마한 공격력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우리 팀이었지만, 사실은 수비 역시 대단했다.
라리가의 낮은 실점률이 팀 전력 차 탓이라며 폄하되는 측면이 있었는데, 오늘 그 억울함을 풀 기세였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무리뉴의 팀’ 아니겠는가.
촤아악-
오늘 거의 무결점의 수비를 선보이고 있는 라모스가 깔끔한 태클로 파투의 볼을 가로챈 뒤 우렁차게 외쳤다.
“달려!”
중원을 거치지 않고 한 번에 벤제마까지 연결되는 땅볼 패스.
왼발로 부드럽게 트래핑한 벤제마가 오른발 힐패스로 공을 호날두에게 전달했다.
전반전에 호날두가 보여줬던 것과 비슷한 기술이었다.
우리 동료들은 나 빼고 다 저런 거 할 줄 아나 싶다.
툭-
당연히 때릴 줄 알았던 탐욕왕 호날두가 웬일로 패스를 선택.
따라 들어오던 알론소가 노마크 중거리 찬스를 맞았다.
나를 마크하던 티아구 실바가 깜짝 놀라서 뛰쳐나가며 슈팅 경로를 차단했는데...
토오옹-
이번 경기 론소 형의 콘셉트는 양보왕인가?
허를 찌른 로빙 패스가 레알의 9번을 향해 날아왔다.
자알 먹겠습니다.
아비아티 골키퍼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 * *
[레알 마드리드, 밀란 3-0 완파하며 G조 1위 굳혀]
[정백강, 말라가전 이어 두 경기 연속 해트트릭]
[‘스포츠 헤르니아’ 증세 카카, 장기 결장 예상]
얻은 것과 잃은 것이 공존한 경기였다.
일단 이겼고, 내가 해트트릭을 했으며, 유망주 더브라위너가 좋은 활약을 했다는 건 긍정적 요소.
그러나 피해도 만만찮았는데, 달갑잖은 부상 소식들이 그것이었다.
우선 카카는 정밀 검사 결과, 헤르니아 말고 무릎에도 문제가 발견되었다.
최소 2개월, 어쩌면 그 이상 쉬어야 한다는 게 의료진의 판단이었다.
감히 가투소 앞에서 발재간을 시도하다가 ‘분노의 태클’을 직격당한 마르셀루도 3주 아웃 판정을 받았다.
이제 좀 뛰어보나 싶었을 벤제마는, 코너킥 상황에서 몸싸움을 벌이다 엉켜 넘어지면서 왼손 새끼손가락 골절상을 당했다.
이것도 최소 2주짜리였다.
승승장구하던 우리 팀에 한꺼번에 몰아닥친 부상 암초들.
역시 축구의 신은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공격진, 그리고 왼쪽 측면을 지배하던 마르셀루가 빠져 버렸으니 그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일정이 약체인 라싱 산탄데르-무르시아-에르쿨레스였던 건 불행 중 다행.
대놓고 선수비 후역습 전술로 나온 상대에게 매우 고전하긴 했으나, 꾸역꾸역 승리를 거두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연승 행진은 딱 거기까지였다.
밀란과의 리턴매치에서 시즌 첫 패배를 당하고 만 것이다.
제대로 칼을 갈고 온 밀란은 대놓고 ‘알론소 죽이기’ 전술을 들고 나왔고, 차와 포에 마까지 떼고 경기하는 우리 팀은 지공 상황에서 볼 전개가 제대로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즐라탄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0-1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는 건 당연히 뼈아픈 일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어지는 경기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데르비라는 사실이었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최악의 조건에서, 이번 시즌 가장 중요한 승부 중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