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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로 발롱도르-118화 (119/176)

118화

딩동- 딩동-

멍하니 TV를 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려댔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0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갸웃하며 확인한 인터폰 스크린에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 쿠키를 좀 많이 구워서... 좀 드리러 왔어요.

으이그, 귀여운 녀석.

나의 휴식을 방해한 한밤중의 불청객은 더브라위너였다.

희한하게 제과제빵이라는 취미를 갖고 있어서, 종종 직접 구운 빵이나 과자를 갖다 주곤 했다.

물론 오늘은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닌 듯했지만.

“헤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형.”

모자부터 신발에 이르기까지 온통 구찌로 도배한 더브라위너가 손에 비닐봉지 하나를 든 채 실내로 들어섰다.

“너 옷차림이...”

“아! 호날두 형이 선물로 주셨어요. 풀세트로요.”

날두야.

후배에게 선물을 해주는 마음은 참 아름답지만, 패션 감각까지 물려줄 필요는 없잖니.

그나마 일수 가방은 안 들어서 다행이다.

“음료수라도 하나 줄까?”

“음... 우유 있으면 좀 부탁드릴게요.”

그래, 한창 우유 많이 마실 때지.

목이 말랐는지, 꽤 큰 컵에 따라준 우유를 단숨에 3분의 2가량 들이켜는 더브라위너.

“그래, 고민이 뭐야?”

“네?”

“쿠키 주러 왔다는 건 핑계일 거고. 사실은 고민 상담하러 온 거 아냐?”

“역시... 눈치가 장난 아니시네요.”

그럼그럼.

내가 보기엔 이래도 사실은 거의 40년 가까이 살았걸랑.

“이왕 맞힌 김에 더 나가볼까? 데르비 때문에 그러지?”

“헉! 진짜 대박 사건!”

더브라위너가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가는 모션을 취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기다.

“척하면 척이지.”

“제가 진짜 걱정이 너무 많거든요.”

“그래, 네 맘 이해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도 긴장하는 게 데르비다.

그런데 불과 19살에 데르비를, 그것도 주전으로 소화하게 생겼으니 얼마나 떨리겠는가.

“처음에는 레알 마드리드라는 클럽에서 뛴다는 게 마냥 기쁘고 신났거든요. 근데 요새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요. 한 경기 한 경기가...”

“압박감이 어마어마하지?”

“네...”

흠...

어떤 식으로 조언을 해주면 좋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내 경험을 말해주기로 했다.

회귀 전의 삶에 대해서 말이다.

회귀 후는 너무 탄탄대로라 별로 참고가 안 되겠지.

“케빈, 내 친구 얘기 좀 들어볼래?”

“형 친구요?”

“그래.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이름이 뭔지는 말해줄 수 없지만. 아마 이야기를 다 들으면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네, 해주세요.”

더브라위너가 눈을 반짝 빛내며 남은 우유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나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람인 그 친구는, 어릴 때부터 재능을 인정받았어. 아주 순탄한 축구 인생을 살았지. 대표팀에도 뽑히고,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어. 그리고 너랑 비슷한 나이 때, 빅리그로 이적했지. 물론 우리 팀 같은 명문구단은 아니었지만, 동양인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였어.”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포츠머스로 이적했을 때,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내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꼬일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

모든 게 다 잘 풀릴 거라 믿었지.

“그 친구가 뛰던 팀은 컵대회에서 최대 라이벌 중 하나를 만나게 돼. 아주 쫄깃한 단판승부였지.”

2007-2008 FA컵 4라운드.

포츠머스의 상대는 플리머스 아가일이었다.

당시 플리머스는 2부리그 팀이긴 했지만, FA컵은 원체 이변이 많은 대회 아니겠는가.

게다가 포츠머스와 플리머스는 전통적인 라이벌 관계였으므로 엄청나게 치열한 경기가 예고됐다.

“언어 장벽과 적응 문제로 좀처럼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하던 친구는, 바로 이 경기에서 주전 선수의 부상으로 운 좋게 선발로 뛰게 돼. 걱정과 기대가 섞인 복잡한 감정 때문에 친구는 잠도 제대로 못 잤지. 그리고 결전의 그 날이 왔어.”

“그래서요?”

더브라위너는 거의 뭐에 홀린 것처럼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친구한테 하도 많이 들어서 시간까지 정확하게 외우고 있지. 전반 39분, 사건이 터지고 말았어. 무난한 플레이를 펼치던 친구가, 상대 코너킥을 헤더로 걷어내기 위해 점프를 했는데 그만...”

내가 포츠머스에서 한 시즌 간 뛰면서 유일하게 기록했던 골이 바로 이 경기에서 나왔었다.

우리 골문에 넣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하프타임 때 나보고 멍청이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길길이 날뛰던 해리 레드냅 감독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천만다행으로 친구의 자책골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이겼어. 2-1 역전승이었지.”

“그럼 해피엔딩인가요?”

듣고만 있던 더브라위너가 끼어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아니야. 천신만고 끝에 잡은 기회를 최악의 방법으로 놓쳤다고 생각한 친구는, 스트레스를 풀려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 뿐만 아니라 클럽에 살다시피 하면서 여자를 탐닉했지. 훈련에는 자연스레 소홀해졌고. 결국 몇 경기 뛰어보지도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어.”

“그랬군요...”

“내가 왜 이 긴 이야기를 했을까?”

“음... 절대 실수하지 마라?”

“푸핫!”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더브라위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닌가요?”

“아, 물론 실수 안 하면 좋지. 근데 틀렸어.”

“그럼 뭔가요?”

“이번 데르비를 어떻게 치르느냐가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자, 예를 들어 네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경기를 망쳤어. 패스는 죄다 끊기고, 공 잡았다 하면 다 뺏기고, 친구처럼 자책골을 넣고, 심지어 퇴장까지 당했다고 생각해 봐. 물론 엄청나게 욕을 먹겠지. 하지만 길게 보면 38라운드 중의 한 게임일 뿐이야. 그리고 더 거시적으로 보면 네가 앞으로 선수 생활을 할 15년 남짓한 기간의 한 경기고.”

“아!”

“이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니?”

“네, 조금은요. 한 경기 한 경기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이죠?”

“빙고! 하지만 최선은 다해야겠지?”

“물론이죠!”

회귀 전의 나에게, 지금처럼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친구나 선배가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큰 도움이 됐다며 감사하는 더브라위너를 보며, 간만에 옛날 생각을 했다.

* * *

“그들이 100%가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방심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니까. 우리는 다른 경기와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할 뿐이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이끄는 키케 플로레스 감독은, ‘엘 데르비 마드릴레뇨(Derbi Madrileño)’를 앞두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감독 본인이 레알 선수 출신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만약 질 경우의 후폭풍이 두려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실 우리 입장에선 방심해주는 쪽이 더 좋은데 말이지...

아틀레티코의 홈구장인 비센테 칼데론은 일찌감치 만원사례였다.

원래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아틀레티코는 레알의 ‘밥’.

나중에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이 부임한 이후에야 역학 관계가 바뀌게 된다.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부상 때문에 우리 라인업 상태가 영...

반면 아틀레티코는 전력 누수가 전혀 없었다.

“너희들이 레알의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있는 남자란 걸 증명하길 바란다.”

무리뉴 감독의 경기 전 연설.

뭉뚱그려서 ‘너희들’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누구를 향해 하는 이야기인지는 대체로 명확했다.

마르셀루를 대신하는 나초 페르난데스.

카카와 벤제마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에스테반 그라네로,

그리고 밀란전 이후 활약이 영 저조한 더브라위너까지.

나초와 그라네로는 심지어 오늘이 이번 시즌 첫 선발 출전이었다.

걱정 한가득이지만 부디 잘해주길 바랄 뿐이다.

킥오프.

홈팀 아틀레티코의 선축으로 마드리드의 진정한 왕을 가리는 데르비가 시작되었다.

언제나처럼 4-4-2 포메이션을 가동한 아틀레티코의 강점은 크게 두 가지가 거론되었다.

첫째, 시망 사브로자-호세 안토니오 레예스가 버티는 측면 자원의 창의성.

둘째, 리가 최고 수준의 투톱인 디에고 포를란과 세르히오 아게로의 결정력.

말하자면 공격력만큼은 정말 괜찮은 팀이었다.

중원과 수비가 그에 미치지 못해서 문제지.

터엉-

중앙 미드필더 티아구 멘데스가 오른쪽 측면의 시망 쪽으로 볼을 배급했다.

우리 수비진 최대 구멍인 나초를 초반부터 좀 흔들어 보겠다는 의미일 터였다.

네 명의 수비수 중 하나 빠진 게 뭐 대수냐 말할 수도 있겠지만, 4백은 일종의 ‘공동 운명체’였다.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우르르 털리게 되는 경우가 흔했다.

마르셀루가 이번 시즌엔 수비적으로도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공백이 더 크게 느껴졌다.

시망이 아주 폭발적인 스피드를 갖춘 선수는 아니었지만, 한 가지 특징 때문에 수비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 지점이 있었다.

바로 상당한 수준의 양발잡이라는 것이다.

금방이라도 크로스를 올릴 것처럼 교대로 페이크를 주며 밀고 들어오는 시망의 얄미운 드리블.

차라리 주력 싸움으로 가면 나초가 할 만했을 텐데.

경험이 부족한 나초로서는, 시망처럼 노련한 상대가 훨씬 까다로웠다.

스윽- 탁-

패스를 의식한 나머지 너무 쉽게 전진을 허용하자 조급해진 나초가, 기어이 페이크에 당하고 말았다.

발바닥으로 공을 굴리며 태클을 손쉽게 피한 후 돌진하는 시망.

어쩔 수 없이 라모스가 측면 커버를 간 사이에 아게로의 공간 침투가 이어졌다.

이게 바로 우려했던 ‘도미노 작용’.

퍼억-

시망의 패스를 받아 시도한 아게로의 슈팅을 페페가 몸으로 겨우 막아냈다.

뻐어엉- 턱-

바로 이어지는 포를란의 마무리는 카시야스 주장이 쳐내며 코너킥.

경기 시작하자마자 찾아온 실점 위기를 일단 넘겼다.

짝짝짝짝짝-

열정적이기로 소문난 아틀레티코의 팬들이 박수와 환호로 ‘악당 레알’을 상대하는 선수들에게 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슬슬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데르비.

툭-

시망이 코너킥을 짧게 연결했다.

공을 잡은 아게로는 또 나초를 상대로 일대일 시도.

야!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아.

우리 나초 울겠다, 울겠어.

앞서 시망이 기술적인 돌파를 보여줬다면, 아게로는 그런 거 없었다.

탁월한 민첩성을 과시하며 치달로 순식간에 나초를 따돌리는 아게로.

날카로운 크로스가 이어졌다.

“안돼!”

라모스의 절규.

공격적인 성향의 미드필더 라울 가르시아가 어느새 박스 안쪽으로 침투해 있었다.

포를란에게 집중하느라 미처 가르시아의 움직임까지는 체크하지 못한 우리 수비진의 실책이었다.

철썩-

전반 5분.

가르시아가 몸을 날리며 시도한 다이빙 헤더슛이 카시야스 주장의 손끝을 살짝 스치며 그물을 갈랐다.

우오오오오오오!!!

비센테 칼데론은 열광의 도가니.

가르시아가 엠블럼에 입을 맞추며 기쁨을 만끽했다.

이번 시즌 리가에서 우리 팀이 허용한 첫 번째 선제골.

느낌 왔다.

오늘 경기, 무지하게 빡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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