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수비에서의 ‘X맨’이 나초였다면, 공격은 그라네로가 대차게 말아먹고 있었다.
아틀레티코가 4-4-2 포메이션을 썼기 때문에,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있는 그라네로는 상대적으로 수비의 견제를 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활약이 저조했다.
가장 큰 문제는 포지셔닝.
어쩜 그렇게 공 받기 힘든 위치만 골라서 다니는지.
긴장한 건 이해가 가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봐! 좀 스마트하게 움직일 수 없어?”
참다못한 호날두가 대놓고 면박을 줬을 정도였다.
오른쪽 윙어로 나선 더브라위너도 열심히 뛰긴 했지만 아직 혼자서 뭘 할 클래스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양쪽 풀백인 아르벨로아와 나초에게 공격 지원을 바라는 건 사치였다.
결국 유의미한 공격 방식은 나의 머리와 호날두의 일대일뿐이었는데, 상대도 바보가 아닌지라 단조로운 투 패턴 공세를 큰 무리 없이 막아냈다.
끝내 활로를 찾지 못한 채 0-1로 전반전 종료.
그나마 추가 실점이 없었다는 게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한 골 넣고 배가 불렀는지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한 상대의 덕을 봤다.
나초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한 라모스와 페페의 공도 컸고.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부상 선수들의 공백이 생각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나초와 그라네로, 둘 중 한 명은 무조건 교체될 거라 생각했는데 먼저 목이 잘린 건 나초였다.
“라울, 준비해.”
이번 시즌 라모스와 페페에게 밀려 출전 기회가 적었던 라울 알비올이 무리뉴 감독의 선택을 받았다.
“세르히오.”
“네, 감독님.”
“후반전에는 풀백으로 플레이한다.”
“알겠습니다.”
알비올의 투입에 따른 당연한 포지션 체인지였다.
라모스는 센터백으로도 훌륭했지만 라이트백으로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재능 중 하나였다.
원래 데뷔를 라이트백으로 한 데다가, 얼마 전에 끝난 월드컵에서도 대회 기간 내내 라이트백을 소화했다.
무리뉴 감독은 라모스를 센터백으로 쓰는 걸 더 선호하긴 했으나 지금은 골이 필요한 상황 아니겠는가.
마루셀루가 없는 지금, 라모스가 측면에서 공격 가담을 통해 찬스 메이킹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아르벨로아는 나초 대신 레프트백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에스테반은...”
이름이 불린 그라네로가 눈을 질끈 감았다.
“크리스와 자리를 바꿔라.”
“네... 넵!”
간신히 교체를 면한 그라네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파이팅이야, 네로.
후반엔 잘 좀 하자.
“그리고 케빈.”
“네! 감독님!”
더브라위너에게는 아주 심플한 지시가 내려졌다.
“찬스다 싶으면 그냥 때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 * *
derrochando coraje y corazón-
Atleti, Atleti, Atlético de Madrid!!!
에스타디오 비센테 칼데론이 우레와 같은 응원가로 들끓었다.
사실 이름만 라이벌이지 언제 아틀레티코가 레알 앞에서 허리라도 제대로 폈던가.
그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팬들에게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신나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자! 마지막까지 집중하자!”
아틀레티코 유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지금은 주장 완장을 달고 있는 레프트백 안토니오 로페즈가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직 시간 많아! 침착하게만 해!”
카시야스 주장도 질세라 응수.
후반전의 관전 포인트를 하나 집자면 역시 우리 팀의 오른쪽 측면이었다.
마르셀루-호날두 대신 라모스-호날두 라인이 출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S급 선수 두 명을 한쪽으로 ‘몰빵’해서 파괴력을 극대화하겠다는 게 무리뉴 감독의 생각이었다.
호날두가 양발을 다 잘 쓰기 때문에 가능한 전술적 시프트(Shift)이기도 했고.
킥오프.
“어떻게 된 거야? 알고 보니 순 거품이었잖아?”
경기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를 거칠게 밀착 마크하고 있는 체코 출신 센터백 토마시 위팔루시가 입을 털어댔다.
전반전엔 조용하더니, 한 골 넣고 나니까 아주 기고가 만장하다.
“풋!”
“웃어?”
“아, 미안미안. 근데 웃음이 나네.”
“이 새끼가 미쳤나...”
“아이고, 무서워라. 근데 경기에 좀 더 집중하는 게 어때?”
돌이켜보면 포츠머스 시절부터 내 신경을 긁으며 심리전을 시도한 수비수들은 엄청나게 많았다.
그 녀석들의 공통점은 나를 처음 만났다는 것.
위팔루시 역시 오늘 경기가 나와의 첫 대면이었다.
대체로 두 번째 조우부터는 상당히 얌전해지는 편이다.
왜냐고?
나를 도발했다간 아주 참혹한 꼴을 당하기 때문이지.
파앙-
중원에서의 볼 배급을 맡은 알론소의 패스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하프라인을 넘어 라모스에게 날아갔다.
엄청나게 공격적인 포지셔닝.
말만 풀백이지 그냥 윙어라고 봐도 무방했다.
라모스의 화끈한 전진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뒷공간은 라스가 든든하게 커버하는 중이었다.
공격 본능이라면 누구 못지않은 녀석이 라스였지만, 감독이 까라면 까야지 뭐.
4-2-3-1 포메이션을 주로 쓰는 우리 팀에서 투 볼란치 중 한 명은 무조건 알론소 고정.
나머지 한 자리를 두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는데 일단 승자는 라스.
그러나 마하마두 디아라와 페르난도 가고라는 경쟁자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기 때문에 늘 긴장해야 하는 처지였다.
“내가 막을게!”
상대 왼쪽 윙어인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가 로페즈에게 콜하며 라모스 앞을 막아섰다.
2006-2007 한 시즌을 함께 뛰기도 했던 두 사람.
패스냐, 직접 돌파냐.
‘봉인 해제’된 라모스의 선택은 후자였다.
현란한 스텝오버로 레예스의 무게중심을 무너뜨린 뒤, 터치라인을 따라 쭉 밀고 들어가는 라모스.
레예스가 어깨 싸움을 시도했으나 탱크 같은 라모스의 돌진을 막지 못했다.
드리블 스킬로만 보면 아무래도 마르셀루가 더 뛰어났지만, 피지컬과 운동능력은 라모스의 우위가 분명했다.
비슷한 포지션이지만 좀 다른 느낌이었다.
공통점은 매우 위력적이라는 것.
1차 저지선을 쉽게 넘어선 라모스의 다음 상대는 로페즈.
우리 부주장 VS 상대 주장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 남자들의 싸움에 끼어드는 그림자 하나.
“여기!”
토옥-
라모스가 트레이드마크인 긴 머리를 휘날리며 찍어 찬 공이 로페즈의 키를 살짝 넘겼다.
라모스의 폭풍 같은 질주 때문에 미처 잊고 있었던 그 남자, 호날두에게로 향하는 로빙패스.
“바로 올려!”
우리 날두가 같은 값이면 슈팅을 날리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 그렇지, 패스나 크로스도 하면 또 기가 막히게 한다.
가끔은 그래서 더 얄밉지만.
이 크로스, 아주 마음에 들어.
‘거품’을 부여잡는 위팔루시를 힘으로 떨쳐낸 뒤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상대 골키퍼 다비드 데 헤아의 얼굴에 두려움이 어렸다.
너, 조만간 맨유로 떠날 거야.
그 전에 골맛을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네.
콰아아아앙-
무리뉴 감독의 전술 변화가 제대로 적중하며 만들어진 찬스.
마무리는 역시나 나의 몫이었다.
세리머니를 하러 가기 전에 위팔루시에게 한마디 했다.
“수비가 영 시원찮네?”
* * *
뒤돌아 생각해 보면, 무리뉴 감독의 선발 라인업은 명백한 실패였다.
공격과 수비 양쪽에서 문제를 노출했으니 말이다.
실점도 실점이지만 경기 내용이 워낙 엉망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아틀레티코는 우리가 흔들리던 전반전에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한 대가가 후반 8분 만에 터진 나의 동점골이었다.
정확히 이 시점부터 아틀레티코의 기세가 확 꺾였으며, 우리 팬들에게 익숙한 ‘승점 자판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보면 이게 아틀레티코의 한계였던 셈.
필 받은 라모스는 공수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이며 날아다녔고, 골이 고픈 호날두는 양발로 위협적인 슈팅을 난사하며 상대 골문을 위협했다.
까아앙-
아무 생각 말고 때리라는 지시에 충실했던 더브라위너도 1골대 적립.
이를 악문 데 헤아의 눈부신 선방과 디에고 고딘의 몸을 날린 수비가 없었다면 대참사가 났어도 이상할 게 없는 압도적 경기력이었다.
축구가 분위기를 얼마나 많이 타는 종목인지 새삼 느끼는 대목.
양쪽 모두 전반전의 그 팀이 맞나 싶었다.
흐름을 놓친 키케 플로레스 감독은 부진했던 디에고 포를란을 빼고 센터백 알바로 도밍게스를 투입했다.
겸손한 비기기 작전.
그러나 우리는 승점을 나눠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후반 20분 기어이 결정타를 날렸다.
라모스의 얼리 크로스-정백강의 헤더-더브라위너의 하프발리슛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그림.
‘데르비 마드릴레뇨’에서 터뜨린 19세 벨기에 소년의 레알 마드리드 데뷔골이었다.
“으어어어어어!”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던 더브라위너가 우리 팀 벤치로 달려가더니 무리뉴 감독의 품에 쏙 안겼다.
함박미소를 지으며 더브라위너의 헝클어진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 무리뉴 감독.
마치 사이좋은 부자(父子)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이야아아아아!”
약 5초 정도 안겨 있던 더브라위너가 이번엔 나에게 달려와서 몸을 던졌다.
“백강 형! 고마워요! 조언도 패스도 정말 끝내줬어요!”
팀의 실세가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움직이는 더브라위너.
아무래도 정치적 감각을 타고난 것 같다.
거, 크게 될 녀석일세.
* * *
[레알 마드리드, 지역 라이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꺾고 라리가 10연승 질주]
[‘도움 해트트릭’ 정백강, 멀티골은 보너스]
[‘스페셜 원’ 무리뉴의 전술적 안목이 빛났다]
더브라위너의 역전골은 조금씩 균열이 가던 아틀레티코의 심장을 관통했다.
핵심 공격수인 포를란이 빠진 상태에서 세르히오 아게로 한 명에게 뭘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페페와 짝을 이룬 알비올은 좋은 위치선정과 과감하면서도 정확한 태클을 선보이며 자신의 실력이 죽지 않았음을 무리뉴 감독에게 어필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아틀레티코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레알표 역습’에 골을 헌납하는 것뿐이었다.
더브라위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어쩐지 마음이 푸근해진 나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모드로 패스에 주력, 1골과 2개의 어시스트를 추가했다.
위팔루시에게 ‘혓바닥 함부로 놀리지 말라’는 인생의 교훈을 남기면서.
최대 위기라고 생각했던 데르비를 뜻밖의 대승으로 마무리하면서, 우리 팀의 행보는 다시 탄력을 받았다.
특히 라모스를 라이트백으로 쓰고 호날두도 오른쪽에 배치하면서 마르셀루의 부상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었던 게 컸다.
실제로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두 사람이지만, 필드 안에서만큼은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측면을 거의 박살 내다시피 했다.
그 결과,
무르시아전(코파) 5-0
히혼전(리가) 4-1
빌바오전(리가) 6-2
아약스전(챔스) 4-2
4경기에서 19골을 쏟아붓는 정신 나간 화력으로 만나는 팀들에게 지독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나는 이 기간 동안 슬렁슬렁 뛰면서, 가볍게 8골 5어시스트라는 숫자를 쌓았고.
그런데...
라리가는 정말 희한한 곳이었다.
이 정도로 무적의 포스를 뽐내고 있었음에도, 리가 2위 팀과의 승점 차가 ‘0’이었던 것이다.
우리와 함께 이번 시즌 리가에서 전승을 달리고 있는 팀은, 볼 것도 없이 바르셀로나였다.
그리고 이 팀은 리가 13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마주칠 상대이기도 했다.
그렇다.
‘지구상 최고의 승부’ 엘 클라시코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