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작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기억하는가. 이번 경기는 그 경기의 재판이 될 것이다. 나는 바르셀로나를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다.”
엘 클라시코를 앞두고 먼저 선빵을 날린 건 무리뉴 감독이었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패배였을 챔스 결승전을 언급하며 도발 시전.
“레알 마드리드가 강한 건 인정하지만 그들의 축구 스타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늘 그랬듯 우리는 우리의 축구를 할 것이고, 결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팩트로 맞은 과르디올라 감독은 애써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놈의 스타일 타령은 지겹지도 않나.
축구가 무슨 패션이야?
요한 크루이프부터 시작해서, 자기들처럼 안 하면 무슨 사파인 것처럼 말하는 꼬라지가 맘에 안 든다.
이번 엘 클라시코는 리그 1•2위 팀 간의 대결이기도 했지만, 나와 메시의 통산 3번째 맞대결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챔스에서 1번, 월드컵에서 1번 만나 자웅을 겨룬 결과는 내 기준 1승 1무.
승패뿐만 아니라 경기 내 활약에서도 나의 완연한 우세였다.
‘절대자’ 정백강의 사실상 유일한 대항마로 꼽히는 메시가 세 번째 도전에서 나를 넘어설 수 있을지, 전 세계의 관심이 쏠렸다.
* * *
2010년 11월 29일, 캄 노우.
한국 팬들에게는 ‘누 캄프’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우리 홈인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와 함께 스페인을 대표하는 구장으로 꼽힌다.
물론 바르셀로나 팬들은 ‘스페인’이 아닌 ‘카탈루냐’ 대표라고 여기겠지만 말이다.
“오늘 몸 상태 어때?”
나의 질문에 마르셀루가 씩 웃어 보였다.
“아주 좋아. 그냥 잘 쉬다 온 것 같은 기분이야.”
우리 팀에게 희소식이 있다면 부상자들의 복귀.
카카는 아직 기약이 없지만 마르셀루, 벤제마, 이과인은 모두 출장이 가능하다는 사인이 떨어졌다.
말 그대로 천군만마.
악명 높은 캄 노우 원정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선 총력전을 펼쳐야 했다.
“경기 콘셉트는 간단하다.”
무리뉴 감독이 엄숙한 목소리로 작전을 설명했다.
“일단 수비, 그리고 역습.”
늘 하던 방식이긴 하지만 오늘은 라인업부터 남달랐다.
주력 포메이션인 4-2-3-1을 버리고 4-3-3을 들고나온 무리뉴 감독.
마르셀루의 복귀로 라모스-페페 센터백 콤비가 재결성되었으며, 무리뉴 감독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는 아르벨로아가 라이트백으로 나선다.
그 위의 3미들은 부동의 알론소와 라스, 그리고 더브라위너.
2선 자원으로만 출전하던 더브라위너에게 중앙 미드필더 롤을 부여한 게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회귀 전에 과르디올라 감독이 더브라위너를 4-3-3의 중미로 썼었는데, 무리뉴 감독도 비슷한 가능성을 본 걸까?
어쨌든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서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무리뉴 감독의 배짱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3톱은 호날두, 이과인, 그리고 에이스 정백강.
“점유율 싸움은 이길 수도 없을뿐더러 하등의 의미도 없다. 딱 한 번의 기회만 잡으면 돼.”
돌이켜보면 챔스 결승 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바르셀로나를 상대하는 무리뉴 감독의 철학은, ‘아름다운 축구’에 대한 과르디올라 감독의 신봉만큼이나 확고하다.
“이케르, 더 할 말 있나?”
전술 지시를 마친 무리뉴 감독이 카시야스 주장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동료들 앞에 선 주장.
경험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인데, 역시 엘클은 다르긴 다른가 보다.
“지난 시즌 엘 클라시코는 정말 최악이었어. 두 경기 모두 패했고, 단 한 골도 넣지 못했지.”
원정에서는 즐라탄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0-1 패배.
홈에서는 오히려 더 안 좋은 경기력을 보이며 0-2 완패.
비단 엘클뿐만 아니라 챔스는 16강, 코파 델 레이는 32강에서 탈락하며 무관에 그쳤던 우울한 시즌이었다.
“그러나 이번 시즌은 달라. 우리는 강해졌고,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어.”
물론이죠.
제가 왔잖아요.
“자, 바르셀로나 녀석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자고. 누가 라리가의 제왕인지!”
* * *
무려 99,354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거대 구장 캄 노우는 입추의 여지 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Tenim un nom el sap tothom-
Barça, Barça, Barça!!!
압도적인 음압(音壓).
밀라노 더비를 뛰어 본 경험이 이럴 땐 도움이 된다.
더브라위너는 기세에 눌려서 안색까지 파리해졌다.
분명 우리 응원단도 적잖게 와 있을 텐데, 캄 노우의 원정 응원석은 3층에 위치해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분히 의도적인 좌석 배치다.
캄 노우에서 바르셀로나가 유난히 성적이 좋은 이유가 있다니까?
“분명히 얘기할게요. 경기가 과열되지 않도록 엄격하게 판정할 겁니다.”
에두아르도 곤잘레스 주심이 카시야스 주장과 사비 에르난데스를 불러서 신신당부를 했다.
카를레스 푸욜이 부상으로 결장했기 때문에, 오늘 바르셀로나의 주장 완장은 사비가 차고 있었다.
푸욜의 빈자리는 이번 시즌 리버풀에서 이적해온 ‘마지우개’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메웠다.
마스체라노는 원래 EPL을 대표하는 수비형 미드필더였으나, 세르지오 부스케츠에게 밀려 센터백으로 출전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추구하는 점유율 축구에는 부스케츠가 더 어울리는 자원이었기 때문.
워낙 대인마크와 태클이 좋은 선수라 센터백으로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174cm에 불과한 신장은 불안 요소였다.
우리 팀에는 나를 포함해 ‘한 뚝배기 하는’ 선수들이 워낙 많으니까.
출전하는 선수들의 면면을 보니, 새삼 왜 엘 클라시코가 ‘지상 최고의 대결’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작년에 피파 월드 베스트 11에 들었던 선수만 7명이다.
우리 팀에는 나, 호날두, 카시야스 주장.
저쪽엔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 알베스까지 무려 넷이다.
그때 나란히 서서 어색한 표정으로 사진 찍었던 기억이 선명한데, 오늘은 한바탕 전쟁을 치르기 위해 모였다.
킥오프.
홈팀 바르셀로나의 선축으로 2010-2011 시즌 첫 번째 엘 클라시코가 시작되었다.
툭- 탁- 툭- 탁-
그리고 인내력 테스트도 함께 스타트.
바르셀로나를 상대한다는 건, 1시간 30분 동안 성질을 죽인 채 녀석들의 공 돌리기 쇼를 지켜봐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게다가 항상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
잠깐의 틈이라도 보이면 곧장 역대급 패스 마스터들의 킬러 패스가 우리의 심장을 관통할 테니.
“케빈! 체력을 좀 아껴! 라인 유지에 집중하고!”
군기가 바짝 들어서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는 더브라위너를 말렸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이렇게 무식하게 움직이다간 얼마 가지 못해 퍼지게 된다.
얼른 공을 빼앗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세상사는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브라위너에게는 다른 임무가 있지 않던가.
삑-
시작됐군.
곤잘레스 주심이 경기 전에 신신당부를 했지만 여기 있는 22명 중에 그 말 들을 사람 아무도 없었다.
마르셀루가 공을 잡은 메시의 정강이를 가볍게 타격하면서 선전포고를 했다.
“당연히 옐로카드죠! 이거 완전 고의였는데!”
같은 브라질 사람이고 뭐고 없었다.
알베스가 왜 경고를 안 주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겁나게 오버하네, 진짜.”
질세라 차갑게 대꾸하는 페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곤잘레스 주심이 불만에 차서 웅성대는 선수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보통 팀이라면 세트피스를 노려볼 수도 있는 위치였지만 바르셀로나는 달랐다.
프리킥을 짧게 연결하면서 티키타카 재개.
바르셀로나라는 팀과 그들의 축구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지우고 냉정하게 얘기하면, 저런 극한의 패싱 게임이 가능하다는 게 참 대단하긴 하다.
오오오-
관중석에서 터지는 함성.
패스면 패스, 탈압박이면 탈압박.
오늘 유독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사비가 작정하고 달려든 이과인의 거친 태클을 빙글 돌며 가볍게 피했다.
이어지는 더브라위너의 도전은 부스케츠에게 볼을 넘기면서 흘려 버렸고.
무협소설에 나오는 초절정고수가 축구장에 내려온 듯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부스케츠는 하프라인 부근까지 내려와 준 메시에게 전진 패스.
툭- 틱-
이번엔 또 메시와 사비의 2대 1 패스다.
갑자기 빨라지는 템포.
기본적으로 굉장히 느린 축구를 구사하는 바르셀로나가 갑자기 템포를 끌어올릴 때가 있는데, 이때가 가장 위험하다.
메시가 직접 공을 몰고 나가자 우리 선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을 향했다.
터엉-
짧게 드리블을 치며 어그로를 끈 메시가 왼쪽 측면에 노마크 상태로 서 있던 이니에스타를 발견했다.
그동안 잘 버텨왔건만,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하는 우리 수비진.
갑작스러운 방향전환에 당황한 나머지, 무려 네 명의 선수가 우르르 이니에스타에게 달려들었다.
여기, 레알이 아니라 한국 대표팀인가?
헐거워진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날아드는 스루패스.
마르셀루가 슬라이딩 태클로 끊어내려고 했지만 타이밍이 어긋났다.
토옹-
메시와 이니에스타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침투한 사비의 마무리 로빙슛.
황망하게 뻗은 카시야스 주장의 손끝을 살짝 넘어간 공이 야속하게도 골망을 갈랐다.
* * *
경기 시작 10분 만에 터진 사비의 선제골.
무리뉴 감독이 그렇게 강조했던 수비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무너졌다.
“하... 시발...”
라모스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 실점이 유독 크게 느껴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시즌 리가 최소 실점 팀이 바로 바르셀로나였던 것이다.
12경기를 치르는 동안 겨우 3골만을 허용하며 기염을 통하는 중이었다.
이 비인간적인(?) 수치는, 수비력도 수비력이지만 압도적인 점유율로 상대에게 공격 기회 자체를 주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마디로 우세해진 경기를 가장 잘 정리하는 팀이 바로 바르셀로나라는 의미였다.
우우우--
간만에 우리가 공격 좀 해보려고 하는데, 귀가 따가울 정도의 야유가 쏟아졌다.
물론 이런 거에 기가 죽거나 할 내가 아니지만 시끄러운 건 참기 힘들다.
좀 조용해지게 만들려면 역시 골을 넣는 게 가장 좋겠지.
“쟤네 밀고 올라온다! 공 안 뺏기게 조심해!”
아르벨로아가 주의를 환기하며 소리를 빽 질렀다.
바르셀로나 수비의 시작은 강력한 전방 압박.
기술적으로 섬세한 선수가 없는 현재 우리의 미드필드진 구성으로는 압박에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대신에,
“그냥 질러!”
중원을 생략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
뻐어엉-
내 신호에 따라 냅다 지른 알론소의 롱패스.
사비의 태클을 겨우 피하면서 시도한 킥이라 평소만큼 정교하진 못했지만, 받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공중에 뜬 상태로 현재 상황을 스캔.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옵션인 호날두는 알베스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이과인 역시 레프트백 에릭 아비달이 바싹 붙어 마크 중.
흥, 대비가 잘 돼 있네.
롱패스를 활용해서 측면으로 뿌려주는 패턴은 과르디올라 감독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그러나 여기까진 생각 못 했겠지.
호날두와 이과인은 일종의 미끼였다.
내가 정말 기다렸던 건,
“혀엉!!!”
볼을 붉히며 달려오는 더브라위너였다.
녀석에게 정교한 헤더 패스를 떨궈준 뒤, 착지하자마자 앞으로 달렸다.
파앙-
이야, 우리 케빈이 볼 줄기 좀 봐라.
역시 재능은 재능이야.
그리고 무리뉴 감독, 또 한 건 했구만.
콰아아앙-
피케가 함께 점프를 하긴 했지만, 나의 높이를 감당할 순 없었다.
너희가 최소 실점 팀이라고?
반가워, 나는 리가 득점 1위 정백강이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