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21화 (122/176)

121화

동점골을 넣는 데는 딱 2분이면 충분했다.

열광하는 꾸레들을 ‘아닥’하게 만드는 데도.

대체 철벽이라던 바르셀로나의 수비는 왜 이렇게 쉽게 무너졌는가?

일차적으로는 골을 넣은 내가 잘한 거였지만, 기저에는 무리뉴 감독의 필살기가 있었다.

물론 애초 게임 플랜에 따르면 동점골이 아니라 선제골이 되었어야 했지만...

크흠.

어쨌든 무리뉴 감독이 찾아낸 바르셀로나의 첫 번째 약점은,

- 상대는 자신감이 넘쳐. 그래서 어떤 상대를 만나든 똑같은 축구를 하지.

패스를 돌리고, 공을 점유하고, 빼앗기면 강력한 압박으로 찾아오고, 또 패스를 돌리고...

무리뉴 감독의 말처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이 패턴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격력을 의식하곤 있을 거야. 특히 백강에서 크리스로 이어지는 한 방은 정말 강력하니까.

바르셀로나의 압박이 강력한 이유는 필드 위에 있는 11명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롱패스 한 방으로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우리 팀의 능력을 무시할 순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과르디올라 감독이 할 수 있는 선택은?

- 크리스한테 전담 수비수를 붙이고 나머지는 평소처럼 전방 압박. 이게 펩의 해답일 거야. 어쩌면 곤살로에게도?

그 말 그대로였다.

알베스와 아비달이 호날두와 이과인을 철저히 견제했다.

- 이는 압박에 참여하는 인원이 하나, 어쩌면 둘 줄어든다는 뜻이지. 그러면 우리의 비밀병기, 케빈이 출격한다. 우리의 3톱이 갖고 있는 네임밸류나 실적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케빈에게까지 집중하진 못할 거야. 우린 그 틈을 공략한다.

‘생각대로 M’이었다.

우리 공격진을 커버하는 수비진과 압박에 나선 미들-공격진의 간격이 벌어진 틈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더브라위너가 제대로 찔러 들어갔다.

나의 피니시블로는 명불허전이었고.

과르디올라 감독과의 머리싸움에서 완승을 거둔 무리뉴 감독이,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화보처럼 물을 마셨다.

바르셀로나는 다시 티키타카 시작.

“집중해! 집중!”

아까 전 너무 쉬운 실점을 허용한 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라모스가 끊임없이 동료들을 독려했다.

나도 수비수 출신이라 그 마음 잘 알지.

스코어만 바뀌었을 뿐이지, 0-0 상황과 다를 게 없는 방식으로 경기가 흘러갔다.

점유율을 높이는 바르셀로나와 딱 한 번의 기회를 노리는 우리.

서로 빠꾸 없이 치고받는 경기와는 다른 느낌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신에 지켜보는 이들 입장에서는 좀 지루할 수도?

특히 새벽에 이 게임을 봐야 하는 한국 팬들 중에는 이미 잠든 사람도 꽤 있을성싶다.

경기 시간은 어느새 40분 돌파.

평화롭게 전반전이 마무리되나 했는데...

비교적 잠잠하던 바르셀로나의 에이스, 메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워낙 심한 견제를 받다 보니 오늘 상당히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플레이하고 있는 메시.

이번에도 센터 서클 부근에서 공을 잡았다.

보디가드는 부스케츠.

라스나 더브라위너가 메시에게 쉽게 붙지 못하도록 언제든 패스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축구 지능과 센스야말로 과르디올라 감독이 부스케츠를 중용하는 이유겠지.

리듬감 있는 드리블로 달려드는 알론소를 가볍게 피한 메시가, 오른쪽 측면의 페드로 로드리게스에게 공을 뿌렸다.

툭- 퍼억-

사비에게 짧은 패스를 내주고 측면으로 침투하려던 페드로를 마르셀루가 잡아챘다.

명백한 파울이었고, 당연히 경기가 중지될 줄 알았는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사비가 활짝 열린 반대쪽 측면으로 긴 패스를 전달했다.

“어드밴티지야!”

페페의 외침과 함께 공을 받은 다비드 비야가 아르벨로아를 상대로 자신 있게 일대일 시도.

이 친구도 양발을 다 잘 써서 아주 막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원래 비야의 주발은 오른발인데, 어렸을 때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깁스를 한 채 왼발 연습을 했다는 전설적인 일화를 갖고 있었다.

중앙으로 접고 들어올 것이냐, 아니면 일직선 돌파 후 크로스냐.

윙어보단 포워드 성향이 강한 비야인 만큼, 아르벨로아는 전자에 보다 무게중심을 둔 수비를 펼쳤다.

그러나 영리한 비야는 수비의 심리를 역으로 이용하며 후자를 택했다.

파아악- 터엉-

낮고 빠른 왼발 크로스.

아르벨로아도 모자라서 페페까지 경로에 서 있었지만 차단에 실패했다.

오히려 페페는 카시야스 주장의 시야를 가리는 방해꾼 역할을 했을 뿐.

몸을 날린 주장이 공에 손을 갖다 대긴 했지만 잡아내지 못했고, 대신 깔려 오던 공이 붕 떠올랐다.

썩을.

메시는 또 언제 저기까지 갔대?

전반 종료 직전 골을 터뜨린 아르헨티나의 천재 선수가 어시스트를 한 비야에게 달려가 안겼다.

* * *

“엘 클라시코가 우습나?”

무리뉴 감독, 화 많이 났다.

1-2로 밀리고 있는 스코어 자체도 문제지만, 실점의 질이 너무 나빴다.

첫 골은 메시와 이니에스타한테 온통 어그로 끌리다가 스루패스 한 방에 헌납.

두 번째 골은 어드밴티지 상황에서 정신줄 놓은 게 결정적이었다.

한마디로 집중력 부족이었단 이야기.

그렇게도 집중을 부르짖던 라모스의 절규가 머쓱하게 되어버렸다.

“고작 이 정도 수준으로 ‘라리가 최강’을 운운하다니. 팬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

사실 스코어는 1-2였지만 경기 내용 자체는 그보다 더 일방적이었다.

점유율 39% 대 61%

슈팅 숫자 2개 대 8개

유효슈팅 1개 대 4개

코너킥 3개 대 10개

그리고 옐로카드 3개(마르셀루, 라모스, 페페) 대 0개.

원래 무리뉴 감독이 내용을 엄청나게 중시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결과까지 안 좋았으니...

과연 바르셀로나는, 특히 캄 노우의 바르셀로나는 강했다.

회귀 전을 반추해 보면, 이 시기의 바르셀로나는 역대 최고의 팀을 뽑을 때 항상 거론됐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유명한 ‘주먹 부들부들 짤’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지 아마.

“후반전에는 다른 모습을 기대하겠다.”

뭐라 더 독설을 내뱉으려던 무리뉴 감독이 겨우 감정을 추슬렀다.

더 몰아붙이면 역효과가 날 것을 우려한 듯했다.

선수 교체도 있었다.

복귀전이라 그런지 거의 클로킹 모드였던 이과인을 빼고 벤제마를 투입했다.

벤제마 역시 복귀전인 건 함정이었지만...

무리뉴 감독은 호날두와 벤제마의 스위칭 플레이도 함께 지시했다.

상대 수비에 균열을 내려면 공격 방식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후반전.

홈팬들의 열렬한 성원 속에 바르셀로나 녀석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경기장에 들어섰다.

어우, 꼴 보기 싫어.

인간의 소속감이란 건 참 신기하다.

인테르에서 뛸 때도 잘 알지도 못하는 밀란 녀석들이 싫어졌었는데 말이지.

또 막상 사석에서는 잘 지내는 걸 보면, 이걸 유니폼의 마력이라고 해야 할까?

“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가자!”

라모스가 두 눈을 이글거리며 외쳤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친구인데, 무리뉴 감독한테 그렇게 혼이 났으니 동기부여는 잘 됐을 것 같다.

킥오프.

알론소가 왼쪽 측면으로 볼을 전개했다.

부상 복귀자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결국 마르셀루가 뭔가 보여줘야 했다.

바르셀로나의 거센 압박을 뚫고 전진하려면 중앙보단 측면이 유리했고, 기술 역시 마르셀루가 가장 뛰어났으니 말이다.

“크리스! 이리로 붙어줘!”

마르셀루가 호날두를 호출해서 2대 1 패스를 통한 탈압박에 나섰다.

평소 절친답게 딱딱 들어맞는 호흡.

내가 버티고 있는데 측면이 무너진다는 건 곧 실점을 의미했다.

위기감을 느낀 알베스가 탄력받아 돌진하는 마르셀루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삐빅-

휘슬을 불며 달려온 곤잘레스 주심이 단호한 표정으로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바르셀로나에게 주어진 첫 경고였다.

우우우우우--

흥분한 꾸레들의 야유와 상관없이, 간만에 찾아온 세트피스 기회.

우리 팀이 자랑하는 ‘뚝배기 군단’이 활약할 차례였다.

“마크 오케이!”

바르셀로나에서 최장신인 피케와 단신 라인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비가 나를 앞뒤로 둘러쌌다.

네놈들의 두려움은 잘 알겠으나, 나만 그렇게 막아서 될 게 아닐 텐데?

뻐어엉-

스핀을 한껏 먹은 알론소의 차진 프리킥이 예쁘게 호를 그리며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들어왔다.

“마이 볼!”

호날두가 탐욕스럽게 외치며 힘껏 점프.

마스체라노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높은 상대였다.

콰앙-

정점에서 이마에 정확히 맞힌 헤더슛.

방향은 골키퍼 정면이었지만, 공이 너무 빨라서 빅토르 발데스가 잡아내지 못하고 펀칭으로 쳐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다음 타자는 라모스.

남다른 민첩성을 과시하며 마크맨이었던 아비달을 따돌리고 재차 헤더슛을 시도했다.

오우-

관중석에서 터지는 탄식.

오른쪽 골포스트 인근을 지키고 있던 알베스가 필사적인 점프로 공을 걷어냈다.

간담 서늘한 헤더 두 방에 패닉 상태에 빠진 바르셀로나 수비진.

피케야, 우리 감독님이 그러더라.

왜 집중 안 하냐고.

지금 네 모습이 그렇네?

“안돼!”

앞선 슈팅 장면을 지켜보느라 나의 존재를 잠시 잊은 피케가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안 되긴 뭐가 안돼.

날두, 그리고 모스 형.

헤더는 나처럼 하는 거야.

철썩-

골문 왼쪽 상단을 통렬하게 꿰뚫는 헤더.

망연자실한 관중들의 모습을 감상하며 오른손가락 두 개를 펴서 이마를 두드렸다.

날아오는 물병은 가볍게 피해 주고.

아, 근데 인간적으로 레이저 포인터는 쏘지 맙시다.

내 몸은 소중하니까요.

* * *

이제 스코어는 2-2.

명색이 ‘20세기 최고의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 선수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오늘 같은 경기는 비기기만 해도 개이득이다.

내용에선 속된 말로 발렸기 때문이다.

반대로 얘기하면, 바르셀로나 입장에서는 못 이기면 너무나도 억울한 승부.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마음이 과르디올라 감독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마스체라노를 빼고 포워드 보얀 크르키치를 투입한 것이 그 증거였다.

크, 보얀이라.

유스 시절 무려 메시를 뛰어넘을 재능으로 주목받았던 바로 그 이름이다.

프로에 와서는 ‘매우×100’ 실망스러웠지만 말이다.

포메이션으로 치면 3-3-4, 혹은 3-3-3-1.

숫자 배열이 중요한 건 아니고, 하여간 무지하게 공격적인 전술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또 그 무의미한 ‘결과론’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1. 과르디올라 감독이 성질을 조금만 더 죽였다면.

2. 무승부도 좋다는 식으로 원래의 점유율 축구를 유지했다면.

3. 수비수 숫자를 하나 줄이지 않았다면.

4. 이번 시즌 부진을 겪고 있던 보얀에게 무리한 전진 패스를 시도하는 대신, 에이스인 메시를 믿었다면.

5. 보얀이 의욕만 앞서는 무리한 드리블로 페페에게 허무하게 공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6. 페페가 급하게 걷어낸 볼이 알론소의 머리를 맞고 흘러 마르셀루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면.

7. 알베스가 호날두에게 찔러준 스루패스를 끊으려고 슬라이딩 태클을 했다가 실패하지 않았다면.

8. 오늘 자신을 괴롭히던 알베스에게서 간만에 벗어난 호날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면.

9. 그래서 폭풍 질주 후에 크로스 대신 직접 슈팅을 택했다면!

위 아홉 가지 일들 중에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과연 이 경기의 결과는 바뀌었을까.

결과론만큼 의미 없는 것도 드물지만, 또 결과론만큼 흥미로운 일도 없다.

Gran- Cabeza-

Gran- Cabeza!!!!!

관중석 3층 위쪽으로 배석해 있는 우리 응원단이 필드까지 들릴 정도로 커다랗게 ‘위대한 머리’를 연호했다.

인테르, 그리고 레알 직속 선배인 호나우두 형님이 맨유와의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3샷 3킬’로 해트트릭을 했다지.

그로부터 약 7년이 지난 오늘.

바르셀로나의 성지 캄 노우에서 똑같은 기록이 탄생했다.

우두 형님은 발로 3골, 나는 머리로 3골.

이러니 나는 항상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대체 왜, 축구를 발로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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