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해냈다.
후보가 발표된 이후 줄곧 ‘수상 0순위’라는 말을 들어 왔지만, 그것과 실제로 상을 받게 된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
제프 블라터 회장이 내 손을 뜨겁게 맞잡았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걸 축하하네.”
세계 최고의 선수라.
하긴, 그 칭호를 들으려면 발롱도르 정돈 받아줘야지.
수상 소감을 위해 마이크 앞에 서니 나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2009년에 피파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을 때는 거의 밤을 새서 수상 소감을 준비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려니까 기억이 하나도 안 나더군요. 그래서 올해는 준비를 아예 안 했습니다. 약간 후회가 되네요.”
반 바스텐 선배님의 표현에 따르면 ‘축구계의 거물’들이 박수로 격려해주었다.
“우선 이분께 가장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보다 앞서 올해의 감독상을 받으신 주제 무리뉴 감독님. 당신의 뛰어난 지도력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감독님이 저 덕분에 상을 받으신 것처럼 말이죠.”
무리뉴 감독이 껄껄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 나의 진심을(?) 받아주었다.
“그다음으로는 동료들입니다. 지난 시즌 함께 트레블을 완성했던 인테르의 선수들, 그리고 이번 시즌 트레블을 달성할 예정인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말하고 트레블을 못 한다면 좀 망신이긴 하겠지만, 우리 카시야스 주장이 잘 막아주고 호날두가 잘 넣어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좌중에 터지는 폭소.
딱 지목된 호날두가 쑥스러운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앞으로 더욱 발전하는 선수가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브라보-
2010년을 지배한 남자에게 보내는 찬사, 그리고 기립박수.
아름다운 밤이었다.
* * *
- 대박! 대애박! 대애애애박!
- 이번에도 못 받으면 피파 테러했다 진짜 ㅋㅋ 사실 작년에도 받았어야 했는데 어쨌든 ㅊㅋㅊㅋ
- 한국인이 발롱도르라니 ㅋㅋㅋ 무슨 한국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 받는 얘기 같네 ㅋㅋ 현실감이 제로야 ㅋㅋㅋ
- 한국영화 아카데미 ㅋㅋㅋ 너 드립 좋았다??
- 피파 올해의 선수 됐을 때도 기뻤는데 발롱은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ㅇㅇ
- 축구선수가 받을 수 있는 최고 권위의 상 아니겠냐 ㄷㄷ
- 나 레알 팬이라 그런지 더 짜릿하더라 ㅋㅋ
- 맞아맞아 ㅋㅋ 메시랑 사비 이기고 받은 거 아냐?
- 인테르 업적으로 받은 건데 레알 얘기가 왜 나옴?
- 아 또 싸움 날 분위기네 ㅡㅡ 오늘 같은 날은 좀 즐기자 미친놈들아
- 걍 냅둬 ㅋㅋ 전투민족이라 어쩔 수 없음 ㅋㅋㅋ
작년에 메시와 상을 나눠 먹는 바람에 아쉬움이 컸던 한국 팬들.
이번 수상으로 드디어 울분(?)을 풀었다.
한국 포털사이트에서는 며칠째 내 이름이 검색 순위 1위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지금까지의 업적만으로도 한국이 낳은 역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라고 보기에 무리가 없었다.
나이가 아직 만 24세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하면 대체 어떤 커리어를 쌓게 될지.
당사자인 나조차도 가늠이 안 된다.
한편 유럽에서는 나의 수상을 보도하면서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다.
이탈리아 쪽 언론사들이 인테르 시절 사진과 영상을 메인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레알의 몇몇 열성팬들이 해당 신문과 방송사에 정식으로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뭐, 사실 전혀 문제 될만한 일은 아닌데...
이미 레알 팬들의 가슴 속에 정백강이라는 선수가 너무나도 크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겠지.
적당히 잘해야지, 너무 잘해도 이렇게 문제가 생긴다.
* * *
이처럼 꽃길만 걷고 있는 나와는 별개로, 우리 팀의 겨울 이적시장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주전 경쟁에서 버티지 못한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이적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
라스에게 밀려 진작에 재계약 제의를 거절했던 마하마두 디아라가 가장 먼저 팀을 떠났다.
행선지는 AS 모나코.
또 망할 놈의 자유계약이라 이적료는 한 푼도 없었다.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 붙잡을 수도 없는 일이고...
사실 디아라의 이적은 어느 정도 예상했었고, 아주 큰 타격까진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이다음에 발생했다.
[곤살로 이과인, 전격 이적 요청!]
우리 공격진의 한 축을 담당하던 이과인이 공개적으로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과인의 경우는 디아라와 전혀 달랐다.
대부분의 경기에 주전으로 나서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토로했다.
문제의 원인은 맡은 역할에 있었다.
지난 시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팀의 최전방을 책임졌던 이과인.
그러나 내가 팀에 합류하면서 이번 시즌에는 오른쪽 윙어로 뛰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차적인 원인 제공은 내가 한 셈이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좀 더 복잡한 속사정이 존재했다.
반대쪽 측면에서 뛰는 선수가 호날두였기 때문.
말이 윙어지 거의 공격수나 다름없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호날두와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이과인은 좀 더 수비적인 롤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즌 35경기에 나서서 29골을 폭격했던 이과인이, 이번 시즌은 22경기 5골에 그치고 있었으니...
한창 몸값을 끌어올려야 할 나이에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나나 호날두를 밀어내고 스코어러 자리를 되찾는다는 건 어불성설.
이과인의 선택에는 분명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었다.
무리뉴 감독은 처음에 어떻게든 이과인을 설득하려 했으나, 이미 정한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이과인 급 정도 되는 공격수가 겨울 이적시장에 풀리는 건 흔치 않은 일.
당장 공격수가 필요한 팀들이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더불어 우리 팀에서도 이과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영입 준비에 들어갔다.
* * *
“네 의견을 좀 들으려고 하는데 말이야.”
아, 아무래도 코가 잘못 꿰였다.
안 그래도 높은 나에 대한 무리뉴 감독의 신뢰도는 거의 하늘을 찌를 기세.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더브라위너라는 보물을 발굴(?)해낸 게 컸다.
“축구 보는 눈은 백강 네가 가장 정확하니까 말이야.”
그게 말이죠.
저처럼 죽었다 살아나면 다 그 정도는 합니다만.
“지난번처럼 막무가내는 아니고, 후보군은 추려져 있지.”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군요.
무리뉴 감독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과인 판매로 얻을 수 있는 이적료는 대략 3000만 유로.
우리 돈으로는 약 450억 원에 달하는 적잖은 금액이었다.
이번 시즌 약간 삐끗했지만, 아직 만 23세에 불과한 유망한 공격수였으니 시장 가치가 상당히 높았다.
“논의 결과 세 명을 추렸어. 먼저 첫 번째 후보.”
무리뉴 감독이 내민 두터운 파일에는 익숙한 이름이 쓰여 있었다.
“마르코 로이스군요.”
“잘 아나?”
“잘은 아니고 조금은 압니다.”
향후 도르트문트의 핵심 공격수로 성장하며 한국에서는 ‘개간로’라는 별명을 얻게 될 선수다.
“독일 쪽에 가 있는 스카우트가 아주 강력하게 추천하더군.”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눈은 있으시네요.
“다음 후보.”
헙.
에덴 아자르였다.
“로이스보단 그쪽이 좀 더 유명할 거야. 지금 리그앙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하나지. 영입 난이도는 좀 있겠지만 선수 본인의 드림 클럽이 레알 마드리드라 밀어붙이면 가능성이 있어. 재능 하나는 확실해.”
그럼요, 잘 알죠.
“마지막 세 번째 후보.”
응? 으응?
앞서 로이스와 아자르의 이름을 보고 우리 팀의 스카우팅 능력에 만족했던 나는 눈을 의심했다.
스튜어트 다우닝이라니.
“아스톤 빌라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지. 스카우트 말로는 아주 부지런해서 내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라고 하던데. 자, 이렇게 세 명 중 하나를 영입할 예정인데 너는 누가 마음에 드나?”
“흠... 제 말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의견을 원하시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 편하게 얘기해.”
“다우닝만 아니면 될 것 같습니다. 로이스나 아자르, 누가 와도 잘할 것 같네요.”
2억 유로의 사나이 정백강은, 이렇게 또 몸값을 해냈다.
그리고 차마 하지 못한 말.
잉글랜드 쪽 스카우트는 교체를 고려해 보시죠, 감독님.
* * *
치열한 경쟁 끝에 이과인 획득에 성공한 팀은 유벤투스였다.
올해 36세인 델 피에로가 아직도 팀 득점 1위에 오르는 한심한 공격력을 보여주던 유벤투스에게 이과인은 꼭 필요한 조각이었다.
줄다리기 끝에 합의된 최종 이적료는 예상가보다 살짝 높은 3200만 유로(약 480억 원).
챔피언스리그는커녕 유로파리그 진출도 간당간당한 유벤투스라 물불 가릴 여유가 없었다.
우리 팀이 이번 시즌 처음으로 얻은 수입다운 수입이었다.
나의 피 같은 조언에 따라 다우닝을 영입 명단에서 제외한 무리뉴 감독은, 나머지 두 후보를 끝까지 저울질한 끝에 아자르를 선택했다.
아자르의 전 소속팀이던 LOSC 릴은 우리 팀의 급한 사정을 알기 때문에 협상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무리뉴 감독이 화끈하게 3500만 유로를 불러 버리자 못 이기는 척 제안을 수락했다.
릴 정도 규모의 클럽에서 500억 원이 훨씬 넘는 이적료는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이적이 성사되자 아자르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레알 마드리드는 항상 저의 드림 클럽이었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레알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하는 모습이 꿈에 여러 번 나왔었죠. 카시야스, 라모스, 호날두, 알론소 등 선망하던 스타들과 뛰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나 가장 기쁜 건 정백강과 함께 뛰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처럼 훌륭한 공격수와 뛴다는 건 저 같은 찬스 메이커에게 정말 환상적인 일입니다.”
벨기에 사람들은 정치적 감각을 패시브로 갖고 있는 걸까?
팀의 실세를 빠르게 파악한 후 아주 흡족한 이적 소감을 밝힌 아자르였다.
아자르의 합류를 가장 반긴 건 역시 더브라위너.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한솥밥을 먹던 절친과 함께 뛰게 됐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두 사람의 ‘케미’는 필드 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아자르의 데뷔전이었던 오사수나와의 라리가 경기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시스트 1개씩을 배달하며 2골을 합작.
다음 경기인 레알 소시에다드전에서도 화려한 패싱 플레이로 수비를 붕괴시키며 도합 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뭐, 내가 3골을 넣어준 덕분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자르-더브라위너라는 ‘벨기에 커넥션’을 형성한 우리 팀은 오히려 더 강력해진 모습을 선보이며 연승행진을 이어갔다.
이과인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자르의 적응은 빨랐다.
우리 팀의 압도적인 경기력을 지켜보는 언론들은, 내가 시상식에서 이야기했던 트레블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트레블 도전의 첫 관문이 될 챔스 16강 상대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