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24화 (125/176)

124화

- 내 기분이 어떤지 좀 알겠지?

챔피언스리그 16강 추첨 이후 카카에게 온 문자메시지였다.

- 에이, 그래도 너는 조별리그였잖아.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밀란은 16강 갔고. 해피엔딩이지.

- 그건 그렇네. 네가 이겼다, 백강.

신이시여,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가장 만나기 싫은 상대를 만나버렸다.

대진이야 하늘이 정하는 거라지만, 이 사달을 낸 일등공신은 분명 있었다.

한국에서는 ‘베법사’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이었다.

아무리 내가 빠졌다지만 전년도 트레블한 팀을 맡아서 조 2위를 하다니 말이 되는가.

토트넘, 베르더 브레멘, 트벤테면 조 편성도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놀라운 사실은, 리그 성적은 더더욱 처참했다는 것이다.

15라운드까지 치른 결과 6승 5무 4패.

순위는 7위에 머물렀다.

몇 년 지난 것도 아니고 바로 지난 시즌에 무패우승을 차지했던 팀의 드라마틱한 몰락이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지만,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성적이었다.

이에 격분한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는 새해가 채 밝기도 전에 베니테즈를 경질하고 레오나르도 감독을 선임했다.

다행히 감독 교체 약발이 제대로 먹혀서 올해 들어선 연승 행진을 이어가며 순항 중이다.

아니, 다행이 아니지.

이제는 싸워서 무찔러야 하는 상대가 되어버렸으니...

인생이란 게 참,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레알 마드리드 VS 인테르’는 말 그대로 초대박 매치업.

외나무다리에서 친정팀과 재회한 정백강.

게다가 감독은 무리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드라마 한 편 나오지 않겠는가.

이번 16강 대진 중 최고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 * *

2011년 2월 22일.

어쩐지 콩의 기운이 느껴지는 날이었다.

하... 결국 이곳에 또 오고야 말았군.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의 웅장하면서도 익숙한 전경이 나를 맞았다.

밀란 녀석들 눈물 빼러 왔을 때는 반갑고 신나고 그랬는데, 오늘은 기분이 썩 개운치 않다.

“백강!”

아니, 이 목소리는?

“오랜만이에요! 주장!”

온화하게 아빠미소를 짓고 있는 사네티 주장이었다.

“문자는 보냈지만, 다시 한번 발롱도르 수상 축하해.”

“헤헤, 감사해요.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만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죠.”

“축구선수로 살다 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 너도 아직 젊어서 그렇지, 몇 년만 더 지나면 익숙해질 거야. 오늘 좋은 게임 하자고.”

“넵!”

축구선수의 삶이라.

하긴, 내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언제까지 뛰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포츠머스에서 인테르로 떠날 때도 뼈를 묻어야겠다는 각오를 했었으니까.

“내가 처음으로 선발 출장한 경기장이 바로 여기야.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롭네.”

“나 그 경기 생중계로 봤어. 너 백강 형한테 어시스트도 했었잖아.”

“기억하는구나? 나 그때 좀 멋있었지. 그나저나 너는 안 뛰어봐서 모르겠지만, 챔피언스리그라는 무대는 리가와 전혀 달라.”

“그래? 어떻게 다른데?”

하늘 같은 선배(?) 더브라위너는, 무려 6개월이나 후배인 아자르에게 썰을 푸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이구, 대단하십니다, 위너 님.

“얘들아, 몸 풀어야지!”

“네! 형!”

이 벨기에 2인방은 나의 열렬한 추종자들이기도 하다.

경기장 안에서는 개떡 같은 패스도 골로 연결해주고, 밖에서는 밥 잘 사주는 멋진 형 이미지를 쌓는 중.

나는 어릴 때 형제 없이 혼자 컸기 때문에, 살갑게 구는 녀석들이 그저 귀엽다.

이 세계에서도 5살 나이 차이가 나고, 회귀 전으로 하면...

크흠...

어쨌든 앞으로도 영입은 나보다 어린 녀석들로 추천해야겠어.

* * *

오늘 경기 인테르의 포메이션은 4-3-1-2.

작년 트레블을 달성했던 바로 그 전술이다.

추억 돋네.

주전 라인업은 모두 나와 함께 뛰었던 동료들이다.

나도 이적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인테르의 재정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2억 유로나 받았으니 ‘폭풍 영입’을 할 만도 했건만, 대부분은 부채 탕감에 사용했다.

제노아에서 뛰던 스트라이커 디에고 밀리토를 2800만 유로(약 420억 원)에 영입한 게 거의 유일한 전력 보강.

그런데 이 밀리토가 그만 폭망하고 말았으니...

팬들 입장에서는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경기 시작 전 악수 타임.

세자르 형님, 마이콘, 루시우, 판데브, 스네이더...

한 명씩 지나갈 때마다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그들이 나에게 한 주문은 딱 한 가지.

“살살 해.”

“백강, 옛정을 잊지 말라구.”

“깔끔하게 한 골만 넣고 가. 무득점이면 더 좋고.”

농담처럼 진담인 듯 줄줄이 청탁(?)이 들어왔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주급 값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리 사과드립니다.

킥오프.

우리 팀의 선축으로 16강 1차전이 시작되었다.

“여기요!”

본인의 챔스 데뷔전을 맞는 아자르가 의욕적으로 공을 요구했다.

터엉-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들어가는 알론소의 패스를 가슴에 척 붙여 잡아놓는 아자르.

개인 기술이야 이미 완성형이다.

다만 아직까지 여물지 못한 부분이 있었으니...

시야가 좁아서 공만 잡으면 드리블 생각부터 한다는 것이었다.

레프트백으로 나온 크리스티안 키부를 상대로 두려움 없이 돌진하는 아자르.

그러나 나의 옛 동료 키부는 그리 만만한 친구가 아니었다.

우월한 피지컬을 이용하여 아자르를 힘으로 튕겨낸 뒤 공만 쏙 빼내며 간단하게 저지.

자르야, 그래도 명색이 트레블 멤버인데 너무 만만히 봤구나.

사실 이런 상황은 어린 드리블러들이 흔히 겪는 성장통이긴 하다.

여기서 껍질을 깨고 나오면 호날두가 되는 거고, 그렇지 못하면 콰레스마처럼 묻히는 것이다.

투웅-

좋은 수비를 보여준 키부가 스네이더에게 볼을 전달했다.

월드컵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은 탓인지, 이번 시즌 예년만 못한 활약을 보이고 있는 스네이더.

하지만 위력적인 한 방을 갖춘 선수라 방심은 금물이었다.

뻐엉-

지금처럼 말이지.

냅다 때린 스네이더의 로빙 패스가 오프사이드 트랩을 부순 에투에게 향했다.

‘백없에왕’이라고 해야 할까.

밀리토의 부진으로 위기에 빠진 공격진에서 거의 유일하게 제 몫을 해주고 있는 게 에투였다.

바르셀로나 시절 유난히 엘 클라시코에 강했던 에투가 카시야스 주장과 맞부딪쳤다.

골키퍼 나온 걸 확인하고 반대쪽 포스트로 감아 찬 왼발 땅볼 슈팅.

그러나 주장의 반응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일단 슛을 툭 쳐낸 뒤 재차 몸을 날려 공을 덮치는 주장.

멋진 공격에 더 멋진 방어였다.

“아오! 시이발!”

오랜만에 듣는 에투의 시원스러운 욕설.

라모스나 페페 등 입이 거친 선수들은 우리 팀에도 있었지만 에투처럼 차진 맛은 좀 부족했다.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한 경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테르를 언더독(Underdog)이라 평가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디펜딩 챔피언 아니겠는가.

토너먼트를 끝까지 한 번 이겨내 본 경험은 무시할 만한 요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주세페 메아차였다.

홈팬들의 뜨거운 성원을 등에 업은 인테르가 예상을 깨고 분위기를 주도했다.

아까 선배 노릇을 그렇게 했지만, 본인 역시 토너먼트가 처음인 더브라위너가 긴장한 탓에 삽질을 거듭하며 중원을 싸 먹혔고, 마이콘은 강력하기로 소문난 호날두-마르셀루 라인을 혼자서 커버하는 괴력을 뽐냈다.

아자르도 키부의 거친 보디체크에 정신 못 차리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중.

천하의 정백강도 이렇게까지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는 힘을 쓰기 힘들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수비진의 집중력만큼은 살아있다는 것.

초반의 위기 이후 정신 차린 페페는, 주특기인 대인 마크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에투가 날뛰지 못하게 꽁꽁 묶었다.

라모스도 미드필더들이 턴오버를 저지를 때마다 전방위적인 커버로 똥을 치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돋보인 건 역시 카시야스 주장이었다.

야신 사각지대를 제대로 노린 스네이더의 중거리포, 마이콘의 크로스를 받은 판데브의 기습적인 하프발리슛, 코너킥 상황에서 터진 키부의 다이빙 헤더까지.

누구나 ‘이건 골이야’라고 외칠 법한 장면만 세 개를 막아냈다.

자신이 왜 레알과 스페인에서 부동의 ‘No. 1’인지 똑똑히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기회를 못 살리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필드의 냉혹한 법칙.

주장의 골킥으로부터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으이이익!”

루시우가 기를 쓰고 점프했지만 내가 공을 따내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시우 형, 이런 높이 오랜만이지?

오늘 아자르 상태가 영 메롱이니까, 날두한테 줘 볼까.

파앙-

머리를 가볍게 갖다 댄 공이 호날두의 품에 안착했다.

날두야, 너도 명색이 피파 베스트 11인데, 뭣 좀 해봐.

내 마음의 소리를 들었는지, 주변 도움 없이 단독 돌파를 시도하는 호날두.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참 많이도 만났다.

지지난 시즌에는 준결승전에서 맞붙었고, 지난 시즌에는 조별리그에서 자웅을 겨뤘다.

그리고 올해 16강까지.

무려 3년 연속이다.

이쯤 되면 거의 인연 수준.

마이콘 상대로 어설픈 잔재주가 안 통한다는 걸 알고 있는 호날두가 과감하게 주력 싸움을 걸어갔다.

어깨를 살짝 흔들면서 페이크를 넣은 후 순간적으로 팡 치고 나가는 호날두.

선수 클래스에 비해 민첩성은 좀 부족한 마이콘이라, 이런 치달에 고전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의 마이콘은 최상.

평소와 달리 끝까지 붙어주면서 호날두의 동작을 방해했다.

결국 수비를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한 채 급하게 올린 왼발 크로스.

어지간한 볼은 다 받아주는 나지만, 이건 길어도 너무 길었다.

낙하지점을 포착한 이반 코르도바 형님이 손쉽게 헤더 클리어를 했는데...

촤아악-

그렇지, 한 건 해줄 때가 됐지.

우리 중원에서 최고의 활동량과 수비력을 자랑하는 라스가, 티아고 모타의 어설픈 볼 처리를 응징하며 슬라이딩 태클을 작렬했다.

“크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모타가 잔디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시뮬레이션 액션이었다.

냉철한 주심의 휘슬은 울리지 않았고, 뒤따라서 열심히 달려오던 더브라위너가 루즈볼을 따냈다.

“에덴!”

지체없이 내지른 땅볼 패스가 코르도바 형님과 키부의 사이를 절묘하게 통과하며 아자르에게 연결되었다.

“오프사이드!”

일제히 오른손을 번쩍 드는 인테르의 4백 라인.

허나 오프사이드는 애초에 성립될 수가 없었다.

루시우가 나를 일대일로 마크하느라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

“혀엉!”

뒤늦게 쫓아오는 키부의 태클을 피해 톡 올려 찬 공이 내 이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세자르 형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제가 사랑하는 거 알죠?

콰아앙- 철썩-

전반 37분.

인테르가 그렇게 밀어붙여도 안 나오던 득점이건만.

나에게는 딱 한 번의 찬스면 충분했다.

골을 확인한 순간 머리를 긁적이며 그냥 홱 돌아섰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아자르와 더브라위너를 그냥 한 번씩 안아줬을 뿐.

내 마음을 이해하는 고참급 선수들은 그냥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한때 함께 울고 웃었던 동료들과, 주세페 메아차를 가득 메운 팬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그건 세리머니를 하지 않음으로써 예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짝짝짝짝짝-

킥오프를 준비하며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는 나에게 뜨거운 박수가 오래도록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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