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레알 마드리드, 인테르 원정서 2-1 승리, 8강 진출 청신호 밝히다]
[정백강, 친정팀 상대로 1골 1어시스트... 승리 선봉장 역할 ‘톡톡’]
[주세페 메아차에서 기립박수 이끌어 낸 정백강의 세리머니 거부]
신나게 몰아치던 인테르의 기세는 나의 선제골로 인해 팍 꺾였다.
경기 분위기 역시 180도 바뀌면서 오히려 우리 팀이 몰아붙이기 시작.
전반 종료 직전에 나의 꿀 같은 헤더 패스를 받은 호날두가 추가골을 넣으며 2-0까지 달아났다.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 무대에서 ‘홈 3실점’은 거의 탈락 선고나 다름없는 상황.
레오나르도 감독은 추가 실점을 막기 위해 후반전에 자존심 다 내려놓고 극단적으로 수비적인 전술을 들고나왔다.
그리고 후반 35분, 에투의 아주 전형적인 역습 한 방으로 한 골을 만회하는 데 성공했다.
무차별적 공격을 퍼붓다가 루시우의 롱패스 한 방에 뒷공간이 뚫려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잘 쓰는 전술로, 한때의 애제자 에투에게 일격을 얻어맞은 무리뉴 감독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경기 종료 후, 기자들은 당연하단 듯이 내게 몰려들어 소감을 물었다.
나는 너무 거만해 보이거나 냉정해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친숙한 경기장에서, 한때 영광을 함께 했던 동료들과 겨룬다는 건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역시 디펜딩 챔피언은 강했고, 아주 힘든 경기였지만 결과에는 만족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온 제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준 팬분들께 경의를 표하고 싶다. 지난해 어려운 시기를 겪었던 인테르인데, 심기일전해서 이탈리아의 왕 자리를 유지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 * *
‘카카가 돌아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굉장한 파급력이 있었을 이 문장.
그러나 현재 우리 팀 상황에서는 ‘글쎄올시다’였다.
데포르티보를 상대로 펼친 라리가 복귀전부터 이미 낌새가 보였으니.
경기 종료까지 20분을 남기고 투입된 카카의 플레이는 솔직히 아주 많이 아쉬웠다.
가장 두드러진 건 신체 능력의 확연한 저하.
우리가 알던 그 야생마 같던 전성기 카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스피드 하나만으로도 세계 정상급 수비진을 궤멸시키던 카카가, 하위권 팀인 데포르티보의 수비수나 미드필더 한 명을 벗겨내는 것도 버겁게 된 것이다.
‘경기 감각이 떨어져서 그렇다’는 희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좀 더 많은 시간을 소화한 말라가전, 복귀 후 처음 선발로 나선 라싱전 모두 팀 내에서 가장 낮은 평점을 받는 굴욕을 당했다.
2007년, 축구계를 완전 평정했던 발롱도르 위너의 드라마틱한 추락이었다.
축구장 내에서 카카의 모습은 끔찍했지만, 그렇다고 쉽게 버릴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이적료가 무려 6700만 유로, 카카가 우리 팀에 오던 2009년의 환율로 계산하면 무려 1100억 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무리뉴 감독은 유력한 강등 후보인 에르쿨레스전에서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다음 경기가 인테르와의 챔스 16강 2차전이었기 때문에 공격진에 상당 부분 로테이션을 가동, 카카가 완벽하게 주연이 될 수 있는 판을 깔아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앞선 세 경기보다 더욱 끔찍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경기장에서 지워져 버린 것이다.
이기기라도 했으면 괜찮으련만, 결과도 0-0 무승부였다.
이번 시즌 리가에서 개막 27연승을 거두며 진지하게 거론되었던 ‘전승 우승’의 꿈도 깨졌다.
냉정할 때는 정말 한도 끝도 없이 차가워지는 게 무리뉴라는 사람.
앞선 네 경기 삽질의 대가로 카카가 받아든 건, 인테르전 명단 제외라는 아픈 소식이었다.
가슴은 정말 아프지만, 축구판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는 있는 일.
그런데 이 불똥은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고, 생각보다 훨씬 크게 타오르게 되었다.
* * *
“무리뉴의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 카카는 이런 취급을 받을 선수가 아니다. 무리뉴는 팀 내에서 폭군처럼 행동하며, 이런 독단이 팀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
이 논쟁적인 발언의 주인공은 카카의 절친 호날두였다.
짜식, 요즘 좀 조용하길래 드디어 철이 들었나 싶었는데...
역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불만이 있으면 무리뉴 감독한테 직접 이야기하면 될 것이지, 왜 굳이 공개적으로 떠드는 걸까.
그 어린애 같은 속을 누가 알겠냐만, 문제는 호날두가 우리 팀에서 나 다음가는 스타라는 사실이었다.
몸값으로 보나, 이번 시즌 활약상으로 보나 이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다른 선수도 아닌 호날두가 그랬으니, 무리뉴 감독도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
기사가 나간 후 무리뉴 감독은 즉각 호날두를 호출해서 면담을 했다.
내가 그 자리에 배석하진 않았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면담 분위기는 최악 오브 최악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알고 보니 카카 건은 일종의 구실일 뿐이었고, 진짜 불만은 따로 있었다.
팀 공격 전술이 너무 내 위주로 짜여 있다는 게 호날두가 화난 진짜 이유였던 것이다.
무리뉴 감독이 어디 성질로 질 위인이던가.
역시나 똑같이 강공으로 맞섰다고 전해졌다.
“우리 팀 최고의 선수는 백강이고, 팀의 승리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백강의 득점력을 최대한 살리는 길이다. 그 결과가 이번 시즌의 압도적인 팀 성적이다. 네가 뭐라고 말하든, 나는 지금의 전술을 손볼 생각이 전혀 없다.”
평행선을 달리는 두 사람의 주장은 끝내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했고, 서로 감정만 상한 채 면담이 종료되었다.
자연스럽게 나와 호날두의 사이도 멀어지게 되었다.
사건의 양상을 가만히 보면 완전 ‘즐라탄 시즌 2’다.
그 누구보다 강한 에고(Ego)를 갖고 있는 천재 선수와, 자신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무리뉴 감독, 그리고 압도적인 실력 때문에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는 나의 삼각관계(?).
챔스 8강 진출을 가리는 16강 2차전은 이렇듯 어수선한 팀 분위기 속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 * *
“기사 잘 봤어. 너희 팀 완전 개차반이더라. 어쩌면 오늘 우리가 이길지도 모르겠는데?”
2011년 3월 16일,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얼마 전 드디어 아빠가 된 문타리가 경기를 앞두고 훈훈한 덕담을 전달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우리 팀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아. 너 주전 경쟁 위태위태하잖아. 1차전에서는 뛰지도 못했으면서.”
나의 팩폭에 삐진 듯 입술을 샐쭉하는 문타리.
아들이 아빠를 닮았다면 분명 초특급 귀요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 섞인 말이긴 하지만, 문타리의 지적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이적 후 피나는 노력으로 봉합했다고 생각한 팀워크는, 호날두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순식간에 발기발기 찢어졌다.
‘친(親) 무리뉴파’와 ‘반(反) 무리뉴파’가 극명하게 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자는 나, 알론소, 아르벨로아, 그리고 ‘벨기에 듀오’인 더브라위너와 아자르.
후자는 호날두, 카시야스, 라모스, 마르셀루를 꼽을 수 있었다.
내가 왔을 때만 해도 사이가 안 좋았던 선수들이 같은 입장에 서게 됐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마르셀루야 호날두와 워낙 친하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카시야스와 라모스는 의외라면 의외였다.
시일이 좀 더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이들이 무리뉴 감독에게 등을 돌린 까닭은 뭐랄까, 굉장히 유치했다.
거칠게 표현하면 ‘굴러들어온 돌’인 무리뉴가 너무 나댄다는 것이었다.
독설을 서슴지 않는 지도 스타일, 너무 냉정한 선수 영입과 방출, 지나친 자기 확신과 그에 따르는 오만함 등이 ‘성골’인 카시야스와 ‘진골’쯤 되는 라모스의 눈에는 고까워 보였던 모양이다.
심지어 인테르를 언급했던 무리뉴 감독의 ‘올해의 감독’ 수상소감까지 문제 삼았다.
이러니 유치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정작 무리뉴 감독에게 제일 심하게 당한(?) 카카는 나머지 선수들과 함께 중립을 지켰다.
카카의 인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
부상과 무리한 월드컵 출전만 아니었어도 나와 카카는 좋은 콤비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쉽다.
킥오프.
원정팀 인테르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자신들의 홈에서 1-2로 패했기 때문에 인테르가 8강에 갈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2골 이상을 넣는다.’
원정 다득점 규정 때문에 1골만 넣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올라갈 수 없었다.
여기가 마드리드임에도 불구하고 인테르가 공격적인 전술을 들고나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물론 태업을 하려고 한 것까진 아니겠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감독과 불화가 있는 선수들의 경기력에 뭐 기대할 게 있겠는가.
골키퍼 포함 수비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반 무리뉴파’가 초반부터 매우 불안한 모습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스네이더 패스-에투 마무리’로 이어지는 노골적인 공간 침투에 사정없이 털리며 결정적인 슈팅 찬스를 연이어 내주었다.
- 나에 대한 불만은 잘 알고 있지만 필드 위에서 발현되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
무리뉴 감독이 경기 전 진지하게 말했던 이야기는 공수표가 되어버린 듯한 플레이였다.
그리고 전반 21분.
두드리고 두드리던 인테르가 드디어 선취 득점을 올렸다.
마이콘이 특유의 오버래핑으로 우리 측면을 무너뜨린 후 크로스를 올렸고, 에투가 자기답지 않게 헤더로 공을 떨궈서 쇄도하던 스네이더의 슈팅 마무리를 이끌어 냈다.
1차전, 그러니까 갈등이 터지기 전 맹활약을 했던 카시야스 주장이 손도 못 쓸 정도로 강렬한 슈팅이었다.
내가 회귀한 뒤로는 욕하는 걸 정말정말 싫어하지만, 아무래도 지금만큼은 앞으로 어떻게 되든 욕 한 바가지 쏟아 부어야...
“야! 이 미친 개 같은 새끼들아!”
오우, 진짜 세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챔스 토너먼트가 장난이야?”
내가 채 뭐라고 하기 전에 폭발하고 나선 인물은 페페였다.
호날두와는 포르투갈 대표팀 동료로 매우 친한 사이인 데다가, 영혼의 센터백 파트너인 라모스와도 가까운 페페.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무리뉴 감독 역시 자신과 같은 포르투갈 사람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었다.
호날두도 포르투갈, 무리뉴 감독도 포르투갈.
이런 특성 때문에 눈을 흐리게 만드는 인맥적 요소를 걷어내고 보니, 경기에 영향을 미치는 반 무리뉴파의 행태를 도무지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또 떨어질래? 또 16강으로 만족할 거야? 씨발, 너네는 자존심도 없어?”
상대편 선수들에게는 한없이 거친 페페지만, 동료들에게 이렇게까지 심하게 퍼붓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좀 하자, 이 개새끼들아. 팀 내 정치 싸움은 전혀 관심 없어. 그런데 이기긴 해야 할 거 아니야? 싸워도 되는데 우승컵은 들고 싸우자고!”
페페의 백번 옳으신 말씀은 계속되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도 아닌 페페가 이렇게까지 ‘ZR’할 거라고는 진영을 막론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리하여 발생한 효과는,
“미... 미안...”
“나도... 사과할게...”
“여... 열심히 하자...”
별명이 ‘깡페페’인 친구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카시야스 주장을 필두로 사과가 이어졌다.
한마디로 바짝 쫄아 버린 것이다.
“일단 이기고 생각하자고, 이 새끼들아. 제발 부탁 좀 하자.”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복병 페페의 등장이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고, 이에 따라 경기 내용 역시 가파르게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