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제3세력’으로만 여겼던 페페의 일갈이 제대로 먹히면서, 흔들리던 수비가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그래, 페페 말마따나 싸우더라도 우승은 하고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공격인데...
우리 ‘천상천하 유아독존’ 호날두 님께서 아주 대차게 말아 드시는 중이었다.
공만 잡았다 하면 슈팅을 때리는데, 그게 모조리 골문을 벗어났다.
“이봐 크리스, 패스 좀 하지 그래?”
내가 지적해도 본체만체.
아오, 이 멘탈레기 진짜.
나이는 스물여섯인데 하는 짓은 열여섯 수준도 안 된다.
결국 0-1로 전반전 종료.
무리뉴 감독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차갑게 교체를 지시했다.
“카림, 준비해. 후반전엔 크리스 대신 들어간다.”
기다렸다는 듯 들이받는 호날두.
“교체는 납득할 수 없는데요.”
물론 무리뉴 감독도 지지 않았다.
“네가 45분 동안 한 플레이를 보면 아마 납득이 갈 거다.”
일촉즉발의 분위기.
사이에 껴서 입장이 곤란하게 된 벤제마가 양쪽의 눈치를 봤다.
“후회하실 겁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제아무리 호날두라도 감독의 교체 명령은 절대적인 것.
결국 후반전은 정백강-벤제마-아자르의 3톱이 출격하게 됐다.
평균 연령 22.3세의 젊고 팔팔한 공격진이었다.
후반전을 치르기 위해 경기장에 들어가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백강!”
마이콘이었다.
“호날두는 어디 갔어?”
“벤제마랑 교체야.”
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쉽네. 오늘 더럽게 못해서 좋았는데.”
아, 그런 뜻이었구나?
* * *
삑-
휘슬과 함께 챔피언스리그 8강 진출 팀을 가릴 마지막 45분이 시작되었다.
터엉-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황소 같은 남자 알론소의 롱패스.
호날두의 인성 덕분에 기회를 잡은 벤제마가 왼발을 높이 들어 안정적으로 볼을 잡아 놓았다.
고난도의 트래핑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내는 모습.
우리 팀 선수들이 대체로 그렇듯, 벤제마 역시 개인 기술은 거의 완성형이었다.
탄력 받은 벤제마가 마이콘을 상대로 일대일 시도.
지겹도록 상대했던 호날두와 비교하면, 벤제마와의 대결은 마이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토옹-
그래, 이거지.
마이콘의 예상보다 한 박자 빠르게 올라오는 기습적인 크로스.
벤제마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전반전 경기력이 처참했던 이유는, 호날두의 폭주로 인해 에이스인 내게 볼 공급이 거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콰아앙- 퍼억-
아아아아-
당연히 골인 줄 알고 일어났던 관중들이 머리를 감싸 쥐며 탄식했다.
“나이스 플레이!”
루시우가 세자르 형님을 일으키며 엉덩이를 팡 두드렸다.
“이 정도론 약해, 백강!”
세자르 형님의 도발.
하지만 우리 팀의 공세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호날두라는 블랙홀이 빠지자 팀플레이가 확 살아났다.
“백강 형!”
이번엔 더브라위너의 로빙 패스로부터 시작되는 공격.
헤더로 아자르에게 공을 떨궈주면서, 착지와 동시에 빙글 돌아 루시우를 따돌렸다.
그대로 돌진.
나의 충실한 추종자 아자르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크로스를 올렸다.
까앙-
이번엔 골대샷.
“휴우...”
십 년 감수한 세자르 형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날두 녀석 때문에 흥분한 탓일까.
나답지 않은 실수가 두 번이나 나왔다.
정신 차리자 백강아.
벤치에서 지켜보고 있는 호날두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야지.
레알 마드리드의 에이스가 누구인지 말이야.
“다 올라가!”
아직 한 골이 더 필요한 인테르.
세자르 형님이 골킥을 길게 내질렀다.
그러나 미드필드 지역까지 올라온 라모스가 헤더로 가볍게 공을 끊어냈다.
다른 건 몰라도 커버 범위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라모스다.
가끔 너무 많이 올라왔다가 위기를 자초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여기!”
루즈볼을 따낸 라스를 향해 마르셀루가 소리쳤다.
곧장 전달되는 패스.
탁- 투욱-
마르셀루가 절친 호날두 대신 벤제마와 호흡을 맞추며 2대 1 패스를 시도했다.
우오오오-
열광하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공을 건네받은 벤제마가 감각적인 원터치 힐패스로 쇄도하는 마르셀루의 발 앞에 딱 좋게 공을 깔아 주었다.
“크로스는 막아야 돼!”
나를 밀착 마크하던 루시우가 거의 비명을 지르며 마이콘을 닦달했다.
이에 호응하듯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는 마이콘.
하지만 영악한 레알의 레프트백은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ㄴ’자로 방향을 홱 꺾으며 마이콘의 다리 사이로 공을 빼내는 마르셀루.
맹렬하게 달려오던 마이콘은, 관성의 법칙을 이기지 못한 채 잔디 위로 미끄러지는 수모를 당했다.
“백강!”
누가 뭐래도 나는 한국인.
그리고 한국인은 역시 삼세번.
이것까지 놓친다면 레알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없겠지.
철썩-
후반 12분.
친정팀에게 비수를 꽃는 정백강의 이번 시즌 챔스 10번째 골이 터졌다.
Gran- Cabeza-
Gran- Cabeza!!!!!
“크로스 쩔었어, 마르셀루!”
‘위대한 머리’를 부르짖는 환호성 속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어시스트를 한 마르셀루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경기 중에는, 친 무리뉴든 반 무리뉴든 그런 거 다 잊고 삽시다.
미우나 고우나 한 팀 아니겠습니까?
* * *
[레알 마드리드, 디펜딩 챔피언 인테르 꺾고 챔피언스리그 8강 진출]
[2차전서 4-1 완승... 정백강 멀티골]
이변은 없었다.
대다수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인테르는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일단 물꼬가 터지자 ‘하얀 사자’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상대를 무참히 살육하기 시작했다.
동점골을 넣은 나는 불과 3분 만에 아자르의 패스를 받아 한 골을 추가하며 친정팀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다.
두 골을 넣어야 하는 압박은 인테르를 조급하게 만들었고, 우리의 받아치는 힘은 호날두 없이도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후반 33분, 역습 상황에서 나의 장거리 헤더 패스를 받은 벤제마가 이번 시즌 챔스 마수걸이 골을 신고.
후반 40분에는 아자르가 집중력이 떨어진 키부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직접 차 성공시키며 기념비적인 챔스 데뷔골을 기록했다.
전반전의 그 답답했던 팀이 맞나 싶게 시원스러운 공격력이었다.
무리뉴 감독에게 후회할 거라며 입을 털어댔던 호날두는, 경기 종료 후 굳은 표정으로 급하게 경기장을 떠났다.
반면 승장(勝將) 무리뉴 감독은 흐뭇한 얼굴로 인터뷰에 임했다.
- 우선 승리를 축하한다. 2003-2004 시즌 이후 무려 7년 만에 팀을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시킨 감독이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항상 최고를 추구하는 구단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챔스 성적은 팬들에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이 나를 선택한 건 빅 이어를 들어올리기 위해서였고, 일단 그 여정의 고비 하나는 넘었다. 내가 여전히 애정을 갖고 있는 인테르, 그리고 옛 제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결코 쉽지 않은 상대였다.”
- 이번 시즌 교체된 경기가 거의 없는 호날두를 전반 끝나고 바로 교체했다. 혹시 최근 불거진 불화설과 상관이 있나?
“나는 선수와의 개인적 관계에 대해 신경 쓰는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다. 내 머릿속에는 가장 효율적으로 경기를 이기는 방법에 대한 계산뿐이다. 오늘 호날두의 컨디션을 봤을 때 상대 수비 공략이 어렵다고 봤고, 그래서 공격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벤제마를 투입했다. 그 결과는, 모두가 보지 않았는가?”
치사하게 팩트로 후드려 패는 무리뉴 감독이었다.
이튿날 16강의 나머지 경기들이 모두 치러지면서, 이번 시즌 빅 이어를 놓고 다툴 8개의 구단이 결정되었다.
국가별로 보면 아래와 같았다.
잉글랜드 : 3팀(첼시, 맨유, 토트넘)
스페인 : 2팀(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독일 : 2팀(바이에른 뮌헨, 샬케 04)
우크라이나 : 1팀(샤흐타르)
우리 역시 일조하긴 했지만, 이탈리아의 전멸은 역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전통의 강호 밀란은 토트넘의 짠물 축구에 말려들며 합산 스코어 0-1로 탈락.
꿀 대진이라 생각했던 로마는 샤흐타르의 ‘닥공 축구’에 휘말리며 합산 스코어 2-6의 참패를 당했다.
결과적으로 나와 무리뉴 감독은 침몰하는 세리에에서 탈출한 셈이 되었다.
* * *
- 혹시 오늘 점심에 바빠? 시간 있으면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다른 친구들도 많이 올 거야. 크리스 빼면 거의 시간이 된대.
호오, 카시야스 주장에게서 먼저 문자가 올 줄은 몰랐다.
뭐, 수락해도 좋겠지.
그나저나 호날두 이 녀석은 답이 없네.
- 몇 시까지 가면 될까요?
- 오후 2시 정도까지 오면 돼.
- 알겠습니다. 시간 맞춰 가죠.
빈손으로 가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예의상 와인 한 병을 샀다.
저쪽이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으니 선물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항상 약속보다 일찍 가는 평소와 달리, 일부러 2시 정각에 딱 맞춰서 도착했다.
주장과 단둘만 있으면 엄청 어색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가 1등인가요?”
“그렇게 됐네. 들어와.”
스페인 사람들 시간 안 지키는 건 익히 알았지만 어떻게 한 명도 안 오냐.
게다가 나 말고도 외국인 선수 많은데, 쩝.
집 사이즈만큼이나 무지하게 넓은 식탁.
굳이 멀리 떨어져 앉는 것도 영 모양새가 이상했다.
그래서 그냥 주장 앞자리에 앉았다.
주장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인지 뻘쭘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네. 둘이 있을 때 말하는 게 더 편하겠어. 오늘 초대한 건 사과를 하고 싶어서야.”
순간 살짝 당황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충 덮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사과라니.
이러면 나도 자세를 좀 낮춰주는 게, 동방예의지국 출신의 스킬이다.
“주장이 저한테 사과하실 것까진 없을 것 같아요.”
“아냐. 주장으로서, 그리고 이 팀에서 가장 오래 뛴 사람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기는커녕 스스로 분란의 중심에 섰으니 잘못을 많이 했지. 사실은 어제 감독님을 따로 뵙고 사죄를 드렸어. 2차전 때 페페 욕하는 거 듣고 정신이 번쩍 나더라고. 하하.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 그랬지. 페페 그 녀석이 좀 거칠긴 한데 옳고 그른 게 뭔지는 확실히 알거든.”
예전에 영화에서 본 대사 하나가 생각난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나쁜 상황이 있을 뿐.
“감독님 다음으로 미안한 사람이 바로 너야, 백강. 이번 시즌 우리 팀을 이끌고 있는데,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에 감독 편애받는다고 질투나 했으니.”
원래 이런 이야기는 소주 한 잔에 삼겹살 놓고 해야 하는데.
어쨌든 진솔한 마음은 모두 전해졌다.
“저도 잘한 건 없는데요 뭐. 그럼 이제, 저희 다 괜찮은 거죠?”
“그래.”
레알 마드리드의 최전방과 최후방을 책임지는 두 남자가 멋있게 악수를 나누려는 찰나,
쾅쾅쿠쿠쾅-
아 깜짝이야.
“페페가 왔나 보네. 걔는 이상하게 초인종 대신 문을 두드리는 걸 좋아하더라고. 문 열어주고 올게.”
흑막인 줄로만 알았지만 착했던 주장, 단순한 깡패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강단 있던 페페.
역시 사람은 좀 오래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