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엄청나게 큰 위기라고 생각했던 갈등이 생각보다 쉽게 해소 국면을 맞자, 호날두만 붕 떠버렸다.
카시야스와 라모스도 잘못을 하긴 했지만, 호날두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무리뉴 감독은 인테르전에 이어 펼쳐진 마드리드 더비와 스포르팅 히혼전에서 호날두를 내내 벤치에 앉힌 채 단 1분도 쓰지 않았다.
나와봤자 겨우 안정된 팀 케미스트리만 해칠 게 뻔하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덕분에 어부지리로 선발 출전한 벤제마는, 두 경기에서 1골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펄펄 날았다.
당연히(?) 3어시스트는 모조리 내가 넣어준 것이었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호날두 입장에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자신이 빠진 경기에서 팀이 좀 못 해야 체면도 서고 여론도 돌아설 텐데,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호날두가 워낙 거물급 선수다 보니, 마케팅 측면에서의 마이너스를 우려한 페레즈 회장이 호날두 기용을 부탁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무리뉴 감독의 태도는 단호했다.
“회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습니다. 축구 외적인 요소들 중 어떤 것도 저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누가 봐도 명분은 무리뉴 감독 쪽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으니, 페레즈 회장도 더 개입하는 건 무리였다.
정치 싸움 잘못 걸었다가 궁지에 몰린 호날두의 선택은...
딩동-
나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누가 호날두 아니랄까 봐, 구찌로 도배한 패션으로 말이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그래, 일단 들어와.”
카시야스 주장에 이어 날두 녀석도 나한테 사과를 하러 왔나 싶었는데, 그런 기대는 첫 마디에 와장창 깨졌다.
“나, 이적할 거야.”
“뭐?”
“이번 시즌 끝나면 팀을 떠날 거라고.”
그래, 그것도 좋은 선택이겠지.
근데 말이야.
“그 얘기를 왜 나한테?”
“여름 이적시장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잖아. 중요한 경기들도 많고.”
점점 알 수 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적하기 전에 다른 구단들에게 나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고 싶어.”
나는 이 상황을 당최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듣고만 있었다.
내 표정을 빨리도 눈치챈 호날두가 드디어 본론을 말했다.
“네가 무리뉴한테 얘기 좀 해줘. 나를 출전시키라고. 무리뉴가 네 말은 잘 들어주잖아.”
순간 약 0.8초 정도 뇌정지가 왔다.
회귀 전후를 통틀어서 이렇게 창의적인 개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던가.
대체 이놈의 사고회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단 말인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거절은 예상 못 했던 것일까.
호날두의 눈이 커졌다.
“그냥 감독님한테 직접 가서 허심탄회하게 사과를 해.”
“사과? 내가?”
“그래, 네가.”
“내가 뭘 잘못했는데?”
“언론에 공개적으로 감독님이 ‘폭군’이라고 떠들어서 팀 분위기 망친 게 잘못이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뭐.”
내가 슬쩍 돌려 까자 호날두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그것도 있네. 뭐, ‘후회하실 겁니다?’. 교체했다고 감독한테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아마 잘못은 아니겠지.”
“...”
뭐라 반박하려고 눈알을 굴리는 호날두.
하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 축구 잘하는 거 세상이 다 아는데, 인생은 그게 전부가 아니야. 일단 어른부터 돼. 그리고 어른이 되는 길은 뭐가 됐든 직접 한 번 부딪혀보는 거야. 더럽고 치사해도 어쩔 수 없어. 원래 세상이 더럽고 치사하거든.”
* * *
많은 축구팬들이 기대했던 챔피언스리그 8강 대진이 결정되었다.
1블록
첼시 VS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토트넘 VS 바이에른 뮌헨
2블록
레알 마드리드 VS 샬케 04
바르셀로나 VS 샤흐타르
잉글랜드 세 팀이 모두 모인 1블록에서는, 이번 시즌 EPL 선두 다툼을 하고 있는 첼시와 맨유가 또 만나버렸다.
2007-2008 시즌 챔스 결승에서 조우했던 두 팀.
당시에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맨유가 승리를 거뒀었다.
첼시 입장에서는 복수할 기회를 맞은 셈이다.
나름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토트넘은 챔스 4회 우승에 빛나는 전통의 강호 뮌헨을 상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팬들의 관심은 2블록에 조금 더 쏠렸다.
4강전에서 엘클라시코가 성사될 가능성이 무지하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샬케나 샤흐타르 모두 스페인의 대표선수 둘을 상대하기엔 체급이 맞지 않는다는 평가였다.
마드리드 땅을 다시 밟게 된 선수들 역시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인물은 역시 라울.
무리뉴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을 찾아 샬케로 떠났던 바로 그 라울이었다.
만 33세라는 나이 때문에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역시 클래스는 영원했다.
팀 사정에 따라 중앙 미드필더부터 최전방 공격수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팀 내 득점 1위에 오른 것.
라울을 꼬신(?) 것으로 의심되는 크리스토프 메첼더도 주전 수비수로 뛰면서 괜찮은 활약을 했다.
샬케 최고의 플레이 메이커로 꼽히는 호세 마누엘 후라도 역시 레알 유스 출신에 1군에서도 한 시즌을 소화한 바 있었다.
2009년 1월 겨울 이적시장을 통해 우리 팀에 왔다가, 반 시즌만 뛰고 쫓겨나듯 떠났던 스트라이커 클라스얀 훈텔라르도 현 샬케의 핵심 선수 중 하나였다.
이쯤 되면 두 팀이 협력 관계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그러나 감상에 젖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샬케 소속이고, 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다.”
강인한 프로의식이 느껴지는 라울의 임전 각오였다.
그러나 아시아권에서는 위 모든 이슈들을 덮어버릴 만한 관전 포인트가 있었다.
샬케의 주전 라이트백이 일본 대표팀 선수인 우치다 아쓰토였던 것이다.
포지션으로 봤을 때 크게 부딪힐 일은 없고, 선수 위상도 어마어마한 차이가 났지만, 한일전은 언제나 발라버려야 하는 승부 아니겠는가.
내 입장에서는 맹활약을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 * *
2011년 4월 5일,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관중석 여기저기에 라울의 옛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플래카드 역시 대부분이 라울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내가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서 받은 환대도 보통은 아니었지만, 라울과 비교하긴 힘들었다.
16년 동안 6번의 리가 우승, 그리고 무려 3번의 빅 이어.
거기에 팀이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몸을 던져 헌신했던 리더십까지.
‘라울 마드리드’라는 조어(措語)가 생긴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와아아아-
몸을 풀기 위해 필드 위에 등장한 라울을 향해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손을 들어 화답하는 라울.
그도 감정이 복받치는지 눈가가 조금 촉촉해졌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라울과 동고동락했던 카시야스 주장이 한달음에 달려가 인사를 나눴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진 않았지만 꽤 오래 대화를 나누는 전현직 주장.
아마 레알이라는 메가 클럽에서 주장 노릇을 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싶다.
한편 어른이 되지 못한 호날두는 오늘도 벤치 신세.
이쯤 되니 좀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우리가 유리하다는 세간의 평가엔 신경 쓰지 마라. 챔피언스리그 무대에 쉬운 상대란 없으니.”
어느 모로 봐도 우리에게 유리한 경기였지만, 무리뉴 감독은 방심을 철저히 경계했다.
무리뉴 감독 본인이 언더독(Underdog) 팀인 포르투를 이끌고 강팀들을 때려잡으며 빅 이어를 든 경험이 있다 보니 더욱 그런 것 같았다.
Les grandes équipes-
The Champions-
언제 들어도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챔스 주제가와 함께 양 팀 선수단이 입장했다.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악수를 하는데 라울이 유독 내 손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사실 난 네가 7번을 달길 원했어. 언젠간 꼭 그러길 바라.”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법.
라울은 자신이 썼던 의미 있는 백넘버를 포르투갈 출신 애송이 대신, 레알의 전설이 될 남자가 이어받길 희망했다.
지금 7번인 녀석이 자기 입으로 이적한댔으니, 조만간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 * *
킥오프.
원정팀 샬케의 선축으로 챔스 8강 1차전이 시작되었다.
4-4-2 포메이션을 가동한 샬케의 투톱은 공교롭게도 라울과 훈텔라르.
의도한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어째 묘한 그림이 만들어졌다.
플레이 메이킹을 맡은 후라도는 일단 오른쪽 측면으로 공격 방향을 잡았다.
우치다가 공격적인 성향이 매우 강한 풀백이고, 라이트윙 헤페르손 파르판 역시 드리블과 크로스에 모두 능한 자원.
파르판이 왼쪽 윙어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랄프 랑니크 감독이 한쪽으로 ‘몰빵’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의도야 물론 우리 공격 전개의 핵인 마르셀루의 발을 묶겠다는 것이겠고.
상대가 레알이라고 해서 수비에 치중하기보단, 한 번 맞붙어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터엉-
훈텔라르를 겨냥하고 날아드는 파르판의 얼리크로스.
그러나 어설픈 공중볼로는 라모스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완벽한 위치 선정에 이은 헤더 클리어.
루즈볼은 부지런한 살림꾼 라스가 따냈다.
월드클래스 미드필더인 알론소나 ‘갑툭튀’한 신예 더브라위너에 비해 언급이 많이 되진 않았지만, 라스의 무지막지한 활동량은 팀의 공수 밸런스를 잡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일부 네티즌들은 라스 같은 선수를 왜 주전으로 쓰냐고 불만 섞인 글을 올리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다른 댓글러들에게 ‘축알못’이라며 타박을 받았다.
실제로 무리뉴 감독이 가장 아끼는 선수 중 하나가 바로 라스였다.
평소 같았으면 공 잡자마자 알론소나 더브라위너에게 넘겼을 텐데, 오늘은 라스의 텐션이 좀 높았다.
투욱- 투욱-
직접 공을 몰고 전진하는 라스.
이 돌발행동은 샬케 선수들의 계산 밖에 있는 것이었다.
근 15m가량을 아무 방해 없이 이동한 라스가 무사히 벤제마에게 볼을 전달했다.
공을 잡자마자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어 내 위치부터 확인하는 벤제마.
천하의 호날두를 제치고 주전 출장 기회를 잡은 벤제마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다.
“백강!”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우치다를 가볍게 벗겨낸 벤제마가 페널티박스 안으로 공을 투입했다.
내 마크맨인 메첼더는 194cm의 장신으로, 공중볼 다툼에는 일가견이 있는 선수.
그러나 상대가 누구든 나의 뚝배기에는 자비가 없었다.
압도적인 높이를 과시하며 골문 왼쪽 상단을 노린 강렬한 헤더슛을 꽂아 넣었다.
쿠와아앙-
이건 볼 것도 없이 골이지.
파앙-
어라? 펀칭?
야신 사각지대로 완벽하게 빨려 들어가는 궤적이었는데?
“우오오오!”
제대로 미친 선방을 보여준 샬케의 수문장, 마누엘 노이어가 벌떡 일어나며 포효했다.
평소에도 밥 먹듯 놀라운 선방을 하는 선수가 노이어지만, 방금 건 정말 어마어마했다.
나중에 하이라이트 필름에 무조건 나오겠구만.
이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노이어의 폭주는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