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삑- 삑- 삑--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우- 우- 우--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듣는 홈팬들의 야유.
고개를 들어 바라본 전광판에는 0-0이란 스코어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진짜 어이가 없네요, 어이가... 하...”
오늘도 특유의 활동량을 뽐내며 겁나게 뛰어다닌 더브라위너가 탄식했다.
깜찍한 빨간 볼이 트레이드마크인 더브라위너이건만, 지금은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물론 풀타임을 소화하긴 했지만, 단순한 체력 문제가 아니었다.
심리적인 충격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90분 동안 때려댄 우리의 유효슈팅 숫자는 무려 24개.
그런데 그중 단 하나도 노이어의 레이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경기력만 따지면 최소 5-0은 나왔어야 정상인 승부였다.
“씨발, 저게 사람이야? 약 빨고 나온 거 아냐?”
페페의 음모론(?)이 그럴듯하게 들릴 정도로 오늘의 노이어는 인간미를 상실한 모습이었다.
본인조차 기대하지 않았을 원정 경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랑니크 감독은 그저 싱글벙글했다.
“잔루이지 부폰이나 이케르 카시야스도 뛰어나지만 현재 세계 최고의 골키퍼는 누가 뭐래도 노이어다. 다들 그의 활약을 보지 않았던가? 그는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클린시트를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선수다.”
노이어가 1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시점에서 랑니크 감독이 언급한 세 명이 최고인 건 분명해 보였다.
이어서 경기를 완전히 지배했던 노이어가 기자들 앞에 섰다.
- 최근 몇 년 동안 골키퍼가 보여준 퍼포먼스 중 단연 최고였다. 기분이 어떤가?
“내 임무는 실점을 하지 않는 것이고, 나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특별한 느낌은 없다.”
-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력은 유럽 최강 수준이다. 2차전에서도 오늘만큼의 활약이 가능할까?
“글쎄. 공격력이 그렇게 뛰어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가능하지 않을까?”
이게 심리전인지, 정말 그렇게 느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용만 봤을 때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좋은 건수를 잡은 기자들이 신이 나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댔다.
노이어 저 녀석, 월드컵 3·4위전에서 나한테 멀티골 먹었던 걸 벌써 잊었나?
아무래도 2차전에선 단단히 손을 봐줘야겠어.
* * *
여론이란 건 갈대와 같아서 아주 약한 바람만 불어도 사정없이 출렁였다.
- 샬케전의 실패는 호날두를 기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백강의 머리에만 의존하는 단조로운 공격 패턴이 화를 불렀다!
팀이 잘 나갈 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녀석들이 하나둘 튀어나와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의 명언을 다시 반추해보자면, 역시 인생은 정말 더럽고 치사하다.
한동안 잠잠하던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도 이때다 싶었는지 은근한 압력을 넣어 왔다.
2차전에서는 호날두를 꼭 쓰라는 이야기였다.
페레즈 회장은 능력도 있고, 구단에 대한 애정도 대단한 사람.
다만 한 가지, 자꾸 축구장 안에서의 일까지 간섭하려는 태도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즌 내내 압도적으로 잘하다가 딱 한 경기 삐끗해서 사면초가에 빠지게 된 무리뉴 감독의 선택은...
[충격!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챔스 8강 2차전 명단 제외]
‘스페셜 원’에게 빠꾸란 없었다.
1차전에선 그래도 벤치에는 앉혀 줬는데, 이번엔 아예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두질 않았다.
이 파격적인 결정에 당연히 한바탕 난리가 났다.
[끝 간 데 모르는 무리뉴의 아집(我執)]
[무리뉴, 개인적 감정으로 인해 팀을 망치다]
[페레즈-무리뉴 불화? 시즌 종료 후 경질 유력]
근거 없는 경질설까지 나오자 무리뉴 감독 역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떠들어대는 게 유일한 일인 작자들에게 굳이 입을 닫으라고 하진 않겠다. 어차피 2차전이 끝나고 나면 알아서 닥치게 될 테니까.”
* * *
2011년 4월 13일, 샬케의 홈구장인 펠틴스 아레나.
이곳은 분데스리가 최초의 돔구장이기도 하다.
한국의 모 야구해설가가 들으면 아주 좋아할 만한 이야기.
원래 뜨겁기로 소문난 샬케의 팬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들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04년 창단 이래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챔스 4강에 진출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상대가 거함 레알 마드리드긴 했지만, 이미 힘든 원정에서 무승부를 거두지 않았던가.
어쩌면 오늘, 또 다른 100년 동안 회자될 새로운 역사를 목격하게 될지도 몰랐다.
“카림, 릴렉스, 릴렉스.”
나와 함께 킥오프를 준비하는 벤제마의 표정이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자신이 호날두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데, 언론에서 자꾸 호날두를 소환하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편하게 해도 돼. 주변에서 떠드는 얘기는 무시하라고.”
“그래...”
굳이 재능의 크기를 따지자면 ‘호날두>벤제마’인 건 팩트.
그러나 축구는 개인전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지금 우리 팀에 더 맞는 조각은 호날두가 아니라 벤제마였다.
지금 자신을 짓누르는 부담감을 극복할 것이냐, 아니면 거기에 먹혀 쓰러질 것이냐.
오늘 경기는 벤제마라는 선수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판별할 수 있는 시험대이기도 했다.
삑-
휘슬과 함께 운명의 90분이 시작되었다.
우리 팀의 지상 과제, 일단 한 골을 넣는 것.
홈에서의 경기 결과가 아쉽기는 했지만, 원정골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건 큰 위안이었다.
우리가 선제골만 넣는다면 오히려 샬케 선수들을 쫓기게 만들 수 있었다.
뻐어엉-
첫 번째 슈팅은 더브라위너의 오른발에서 나왔다.
마르셀루 크로스-정백강 헤더 패스-더브라위너 마무리의 3박자가 딱 맞아떨어지는 우리 팀의 주요 패턴.
발등에 잘 얹힌 슈팅이 크로스바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날아갔다.
“나이스 킥! 좋았어, 케빈.”
허리에 양손을 짚은 채 고개를 갸웃하는 더브라위너를 향해 엄지를 추켜올렸다.
제아무리 노이어라도 두 경기 연속으로 ‘접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두드리다 보면 언젠간 열리지 않겠는가?
철썩-
으응?
왜 우리 골문이 열리는 거야?
* * *
이예에에에에에!!!
이러다가 경기장이 무너지진 않을지 진지하게 걱정될 정도로 샬케 팬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그리고 이 환호의 중심에는, 원조 ‘챔피언스리그의 사나이’ 라울이 있었다.
비극의 발단은 노이어의 골킥.
라모스의 지나치게 넓은 커버 범위가 화를 불렀다.
공의 궤적을 보고 뛰어나왔는데 라모스의 예상보다 킥이 좀 더 길었던 것이다.
라모스의 머리 위를 무심히 지나쳐간 공은 한 번 바운드 된 후 골 냄새를 맡은 라울의 품에 안겼다.
라울은 이런 일대일 찬스를 놓치는 선수가 아니었다.
전반 9분, 별로 힘들이지 않은 왼발 땅볼 슈팅이 정확히 골문 구석을 찌르며 이번 시리즈의 첫 골이 나왔다.
말 그대로 원샷원킬.
물론 세리머니는 하지 않았다.
아, 축구의 신은 어찌 이리 가혹한지.
내가 인테르 상대로 골을 넣었을 때 팬들이 느꼈을 감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젠장할!”
자책하는 라모스에게 페페가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건넸다.
정말 딱 한 번의 낙하지점 오판이 빚어낸 참사였다.
역시 공격수가 최고야...
긍정적으로 보자면, 일찍 골을 허용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80분이면 경기가 8번 정도 뒤집힐 수 있는 시간이니까.
킥오프.
집중하자, 백강아.
너는 할 수 있다.
“여기!”
오늘 몸이 아주 가벼워 보이는 마르셀루가 알론소에게서 공을 건네받았다.
1차전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 하나 있다면 상대 라이트백 우치다 아쓰토의 약점이었다.
우치다의 공격력은 쓸만하지만 수비는 아직 여물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거의 구멍 수준.
상대의 약한 고리를 붙들고 놔주지 않는 게 무리뉴 감독의 축구 아니겠는가.
이번엔 스위치를 통해 벤제마와 자리를 바꾼 아자르가 마르셀루가 호흡을 맞췄다.
터엉-
터치 라인을 따라 때려준 마르셀루의 스루패스.
우치다와의 치열한 달리기 경주 끝에 아자르가 한발 앞서 공을 따냈다.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일대일 시도.
무리뉴 감독이 우치다를 상대로는 무조건 승부하라고 한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아자르였다.
붙었다간 뚫릴까 봐 겁이 났는지 주춤주춤 물러나는 우치다.
이는 일반적으로 우리 팀을 상대할 때는 권장하지 않는 수비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형! 가요!”
거리가 벌어지는 순간 크로스가 올라간다는 뜻이었으니까.
투웅-
쫄보 우치다 덕분에 생긴 찬스.
에이스인 내가 뭔가 보여줄 차례다.
날아오는 공을 보며 생각했다.
만약 노이어가 오늘도 컨디션이 발딱 서서 제정신이 아니라면?
늘 하던 것처럼 상식적인 코스로 헤더를 날리는 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자, 내가 골키퍼라고 가정해보자.
어디로 공이 날아오면 가장 당황스러울까?
마크맨인 메첼더가 거의 유니폼이 찢어질 기세로 잡아당겼지만 나의 도약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공중에서 골문 쪽 상태도 확인.
노이어는 거의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 허를 찌르려면, 저기다!
콰아아아앙-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이마에 부딪힌 공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골라인 앞 잔디를 직격했다.
“Zwischen dem Schritt!”
독일어라서 알아들을 수 없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노이어가 황급히 다리를 오므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지구상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완벽히 노린 ‘알까기 헤더 슈팅’.
아무리 노이어라도, 넓은 공간 다 놔두고 그곳을 노릴 거라고 어찌 예상했겠는가.
촤라라락-
한 번 바운드가 됐음에도 여전히 힘이 실린 공이 그물을 핥는 소리가 아름다웠다.
내 위주의 공격이 팀을 망치고 있다고?
그 망가진 팀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보여줄게.
* * *
잠시 챔스 4강이란 행복한 꿈을 꾸었던 샬케.
그러나 리드는 채 5분을 가지 못했다.
1-1로 경기가 끝난다면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우리가 올라가는 상황.
믿어 의심치 않았던 철벽이자, 주장이기도 한 노이어가 기어이 뚫렸다는 것도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관중석 분위기가 급격히 침울해졌다.
반면 라모스의 치명적인 실수를 금세 복구하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우리 팀은 완전히 안정을 찾았다.
샬케의 치명적인 약점은 중원에서의 창의성 부족.
라스가 플레이 메이커 호세 마누엘 후라도를 거친 수비로 묶어버리면 달리 경기를 풀어줄 선수가 없었다.
헤페르손 파르판은 괜찮은 윙어이긴 했지만 레알 급 되는 팀을 혼자 찢을 정도의 크랙은 아니었고.
아까처럼 치명적인 실수가 나오지 않는 이상, 지공으로는 우리 팀을 상대로 득점하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속공인데, 문제는...
“백강! 케빈! 다 내려가!”
우리 팀 감독이 무리뉴라는 사실이었다.
이 지독한 실리주의자는 속공 상황에서 전진과 마무리를 모두 해낼 수 있는 벤제마만 전방에 남겨둔 채 완벽한 수비 대형을 갖췄다.
딜레마에 빠진 샬케.
‘돌격 앞으로’를 외치다가 역습을 맞아 대패를 할 것이냐, 아니면 조심스럽게 운영하다가 골득실 차로 떨어질 것이냐.
이게 바로 지난해 트레블을 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무리뉴식 2지선다’였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 어떤 상대도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고, 슬프게도 랑니크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반 33분, 그리고 후반 6분, 21분, 28분.
작은 구멍이 거대한 댐을 무너뜨리듯, 나의 한 골이 만든 균열이 철옹성 같던 샬케의 골문을 속절없이 파괴했다.
합산 스코어 5-1.
깊은 침묵에 빠진 펠틴스 아레나에서, 노이어피셜 ‘공격력이 뛰어나지 않은’ 레알 마드리드의 챔스 4강 진출이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