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촤아악-
“나이스 태클!”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페페는 수비를 정말 잘했다.
천하의 메시가 이렇게까지 볼 간수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처음 보는 듯하다.
물론 여전히 다른 선수들의 도움 수비가 필요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거야 뭐, 메시니까 당연한 일이지.
격렬하게 치고받았던 리가에서의 일전과 비교하면, 오늘 경기 초반은 상당히 얌전하게 흘러갔다.
단판 승부 특유의 긴장감이 필드 위에 서려 있었다.
“마르셀루! 약간 전진하고! 라스! 너는 좀 더 내려와!”
라인 컨트롤을 맡은 라모스가 끊임없이 상황을 확인하며 지시를 내렸다.
사비, 이니에스타, 그리고 메시까지.
상대는 패스 마스터가 셋이나 있는 바르셀로나이기 때문에 오프사이드 트랩을 칼같이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비야나 페드로에게 스루패스가 연결되는 순간,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할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를 상대할 때의 어려운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심리적 압박이다.
한순간도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이 피로도를 가중한다.
“아! 미안미안!”
손을 들며 사과하는 페페.
상대가 메시의 부진을 겪는 와중에, 우리는 중원에서의 잦은 패스미스로 역습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 선수는 없는 법.
메시는 더할 나위 없이 잘 막아주고 있는 페페였으나, 확실히 공 다루는 실력은 모자랐다.
빼어난 양발 킥력으로 공을 쫙쫙 뿌려 주던 더브라위너가 페페로 바뀌었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서로 간에 다소 답답한 흐름.
티키타카는 언뜻 보면 팀플레이 그 자체의 완벽한 전술로 보이지만 패스‘만으로’ 상대 수비에 균열을 낸다는 건 어려웠다.
결국 누군가는 크랙 역할을 해 줘야 공격에 방점을 찍을 수 있었다.
무리뉴 감독이 메시 수비에 사활을 건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터엉-
메시가 집중 견제 때문에 영 힘을 쓰지 못하자, 사비가 왼쪽 측면의 비야 쪽으로 볼을 전개했다.
지난 시즌까지만 하더라도 바로 이 에스타디오 데 메스타야에서 발렌시아 왕 노릇을 했던 비야.
남아공 월드컵 우승팀인 스페인의 득점 리더이자 브론즈볼 수상자이기도 한 이 선수가 소속팀에서는 2인자라는 게 참...
그래도 호날두처럼 주인공 욕심은 없는지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알론소가 부지런히 달려가 아르벨로아와 함께 이중으로 수비 블록을 형성했다.
아무리 비야라도 두 명을 상대로 돌파는 어렵겠...
파팟-
뭐야?
같이 뛰더니 메시한테 빙의라도 됐나?
벼락같은 팬텀 드리블 한 방에 알론소-아르벨로아 콤비가 순식간에 뚫려 버렸다.
가속도가 붙은 비야가 멈추지 않고 페널티박스 안으로 질주했다.
“내가 갈게!”
황급히 커버하는 라모스.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쥐새끼처럼 움직이는 선수가 바로 페드로.
화려한 개인기나 드리블을 구사하진 못하지만, 볼 없을 때의 움직임과 센스만 따지면 바르셀로나에서 넘버원이라고 봐도 무방한 녀석이었다.
투앙-
라모스의 태클을 피해 시도한 비야의 낮고 빠른 크로스가 골문으로 쇄도하는 페드로의 발 앞에 떨어졌다.
삐비비빅-
그리고 휘슬.
마음은 급하고, 간만의 선발 출전이라 의욕 만땅이었던 알비올이 페드로의 어깨를 감아 넘어뜨린 게 딱 걸리고 말았다.
“아니! 시뮬레이션이라니까요?”
“제대로 봐야죠!”
“진짜 안 건드렸어요!”
카시야스 주장과 라모스를 필두로 한 동료들이 알베르토 말렌코 주심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판정은 바뀌지 않았다.
양심적으로 말하자면 정심이 맞긴 했다.
전반 23분만에 선언된 페널티킥.
바르셀로나가 자랑하는 ‘MVP’ 라인 중 ‘M’은 기가 막히게 막았는데, ‘V’와 ‘P’가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주장이 세상 비장한 표정으로 장갑을 고쳐 꼈다.
레알에서 뛴 12년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코파 델 레이 트로피를 목전에 두고 맞이한 큰 위기.
주장과 승부할 키커로는 에이스 메시가 나섰다.
양 팀 팬들이 거의 50:50 비율로 앉아 있는 관중석이 고요한 침묵에 잠겼다.
휘슬과 함께 시작된 메시의 도움닫기, 이어지는 임팩트.
정확도를 위해 왼발 안쪽으로 밀어 찬 공이 골문 오른쪽 하단을 향해 쭉 뻗어 날아갔다.
우와아아악-
엄청난 데시벨로 터지는 함성.
고개 숙인 메시와 포효하는 주장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 * *
페널티킥 선방은 골키퍼가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활약.
그것도 상대 주포의 사기를 꺾으면서 기록한 선방이었으니, 주장은 이미 밥값 이상을 한 셈이었다.
이번엔 공격진이 한 건 해야 할 차례다.
뻐엉-
라모스의 롱패스로부터 시작되는 골 사냥.
함께 호흡을 맞추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양쪽 날개인 벤제마-아자르의 침투 타이밍도 점점 맞아들어가고 있다.
머리로 볼을 배급하는 나의 능력 역시 시즌이 지날수록 농익는 중.
바르셀로나에 사비 에르난데스가 있다면, 레알 마드리드에는 ‘대가리 사비’가 있었다.
헤더 직전에야 비로소 패스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수비 입장에서 대응하기가 상당히 까탈스러웠다.
어디 보자...
이번엔 아자르 쪽을 한 번 볼까?
투웅-
적응기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 이적하자마자 팀 최고의 돌격대장으로 등극한 아자르가 떨궈준 공을 오른발에 척 붙여 놓았다.
“헤이!”
모두가 아자르의 다음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을 때, 라스가 기습적인 오버래핑을 감행했다.
평소 공격 가담을 극히 제한받던 라스의 폭주는 사실 무리뉴 감독의 지시사항이었다.
페페에게서 공격 기여는 기대하기 힘들고, 알론소도 정적인 느낌이 강한 선수라, 오늘 더브라위너를 대신해 박스 투 박스 롤을 부여받았다.
파앙-
지체없이 연결되는 아자르의 스루패스.
이적 초기에 비해 가장 많이 나아진 부분이 바로 패스 타이밍이었다.
안 풀리는 날에는 여전히 무리한 드리블로 턴오버를 저지르곤 하지만, 대체로 볼 처리가 빨라지는 중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무리뉴 감독에게 엄청 많이 혼났고, 요즘도 무시무시한 피드백을 받고 있지만...
“후얏!”
우리 라스, 그동안 정말 공격을 하고 싶었구나.
슈팅하기 좋은 상황이 전혀 아니었는데, 괴상한 기합과 함께 억지로 때린 중거리포가 호쾌하게도 날아갔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자연히 빗나가는 볼.
어라?
퍼억-
호세 마누엘 핀토 골키퍼의 형편없는 판단이 나왔다.
아마 떨어진 경기 감각이 원인이겠지.
“대체 지금 뭐 하는 거야?”
나가는 공을 굳이 건드려서 코너킥을 헌납하자, 벤치에서 과르디올라 감독이 길길이 날뛰었다.
최근 만날 때마다 세트피스 실점을 했으니 신경이 날카로워질 만도 했다.
근데 따지고 보면, 그놈의 원칙 때문에 굳이 핀토를 투입한 본인의 잘못도 좀 있지 않나?
발데스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사람 확실히 잡아요! 사람!”
주장이자 수비진의 리더인 푸욜은 오늘 벤치 스타트.
꿩 대신 닭이라고, 푸욜 대신 피케가 지시를 내렸다.
나나 라모스는 말할 것도 없고 알비올도 190cm대 장신에 페페 역시 한 뚝배기 하는 선수.
선발 라인업에 키 작은 녀석들이 대다수인 바르셀로나로선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페널티박스 안에서 거친 몸싸움이 난무하는 가운데, 알론소의 오른발이 춤을 추었다.
퍼엉-
경쾌한 소리와 함께 출발한 코너킥의 행선지는?
“나가! 각도 좁혀!”
“이런 젠장!”
우리가 고공 플레이로 승부를 걸어갈 줄 알았던 바르셀로나 수비진이 멘붕에 빠졌다.
빨랫줄 같은 알론소의 킥은 박스 바깥에서 대기하던 벤제마에게로 향했다.
심리적 허점을 찌른 약속된 세트피스였다.
박스 안에 배치되어 있던 인원들이, 당황해서 한꺼번에 우르르 달려나갔다.
그러나 이는 치명적인 실수.
토옹-
으이그, 이 순진한 친구들아.
벤제마한테 오픈 찬스를 주더라도 나는 끝까지 잡고 있었어야지.
금방이라도 시속 150kmㅠ 캐논 슈팅을 날릴 것처럼 살벌한 모션을 취하던 벤제마가, 별안간 자세를 바꾸며 공을 높이 띄웠다.
“막아야 돼!”
천상의 음악처럼 들리는 피케의 절규.
피케야, 막아야 된다고 막아지면 내가 발롱도르를 받았겠어?
쿠와아앙-
철썩-
두 번의 반전이 있었던 세트피스를 완벽히 마무리하는 헤더가 그물을 출렁였다.
알론소의 초정밀 코너킥과 벤제마의 오스카급 연기력, 나의 명불허전 뚝배기가 만든 합작품이었다.
엘클라시코에서 세 경기 연속 세트피스 득점.
지상에서는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가 최강일지 모르지만, 공중에서는 우리가 확실히 우위에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그리고 이 골이 우승컵의 향방을 갈랐다.
* * *
[레알 마드리드, 숙적 바르셀로나 1-0으로 꺾고 코파 델 레이 우승]
[‘결승골’ 정백강, ‘PK 실축’ 메시... 희비 엇갈린 두 영웅]
불과 4일 전에 3-3의 화력전을 펼쳤던 두 팀의 승부는, 거짓말처럼 딱 한 골로 결정되었다.
동점을 노리는 바르셀로나의 공세는 매서웠으나 우리 수비진은 90분 내내 놀라운 집중력을 유지했다.
바르셀로나의 패인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메시의 ‘역캐리’였다.
파울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친 몸싸움으로 밀어붙이는 페페의 밀착 마크에, 실축으로 인한 정신적 타격까지 겹치면서 이번 시즌 통틀어 최악의 경기를 펼쳤다.
애써 메시 중심으로 짜 놓은 팀 전술인데, 핵심 선수의 상태가 메롱이니 경기가 안 풀릴 수밖에.
삑- 삑- 삑-
“이예에에에에에!”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가장 기뻐한 건 아자르였다.
“백강 형, 저 프로 데뷔하고 우승이란 걸 처음 해봐요!”
“계속 나랑 같이 뛰면 아마 트로피는 지겹게 들어올리게 될 거야.”
“넵! 형만 믿고 따를게요.”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고.
집에서 먹이고 재우고 한 보람이 있다.
“나는 벨기에에서 컵대회 우승한 적 있지롱.”
“야, 벨기에랑 스페인이랑 같아? 그리고 너 그 대회에서 한 10분 뛰었나? 아니, 출전을 하긴 했어?”
“크읍.”
더브라위너가 절친한테 잘난 척 하려다가 본전도 못 찾고 ‘깨갱’ 하며 물러났다.
“고생 많았다, 백강.”
“별말씀을요.”
벌써 6번의 우승, 수페르코파까지 포함하면 무려 8번의 정상을 함께 경험한 나와 무리뉴 감독은 담담한 포옹으로 기쁨을 나눴다.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아는 사이.
비록 라리가나 챔피언스리그에 비해 떨어지는 평가를 받는 대회이긴 하지만, 극성스러운 언론들의 온갖 음해를 뚫고 이뤄낸 우승이기에 정말 값졌다.
‘스페인 4인방’인 카시야스-라모스-알론소-아르벨로아는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며 빙빙 돌았다.
처음 이적해왔을 때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풍경.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내 어깨를 라스가 툭 치며 말했다.
“백강, 우리 포츠머스 때 생각나지 않아?”
“그러게. 내가 유럽 진출하고 처음 우승한 대회가 FA컵이었는데.”
“어? 그러고 보니 대박인걸?”
“뭐가?”
“백강 너, 3대 리그 컵대회 다 우승한 거 아냐?”
“어... 진짜 그렇네?”
생각도 안 해봤는데 정말이다.
라스와 함께 뛰었던 포츠머스 시절에는 FA컵, 인테르 이적 후 코파 이탈리아, 레알에서는 코파 델 레이.
이쯤 되면 다른 팀들에게 좀 미안해진다.
하지만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할 일은 해야지.
2억 유로의 값어치를 하려면 겨우 코파 하나로는 부족하니까.
“씨발! 존나 좋아!”
메시를 꽁꽁 묶으며 우승의 일등공신이 된 페페의 고함이 발렌시아의 밤하늘을 살벌하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