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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로 발롱도르-131화 (132/176)

131화

- 어머니께서 입원하셨어.

어지간한 일엔 연락을 하지 않는 친구 석중이의 문자 한 통에 세상이 무너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곧바로 무리뉴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전하는 내내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다녀와라. 축구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동안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핑계로 엄마한테 얼마나 무신경했던가.

선수로서는 1등일지 몰라도 아들로선 형편없는 꼴찌다.

16시간에 달하는 긴 비행 끝에 공항에 도착하니 석중이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엄마는? 혼자 계셔?”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엄마 이야기부터 물었다.

“괜찮아, 임마. 나연 씨가 같이 있어.”

“오늘 평일인데...”

“휴가 썼다더라.”

그러고 보니, 남자친구로서도 꼴찌다.

인간 정백강 정말 형편없네.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하시더라. 바로 병원으로 모시고 갔지. 안 가겠다고 우기시는 걸 억지로 끌고 가느라 힘들었다. 마침 식당에 내가 갔었기에 망정이지.”

“무슨 병이래?”

“고혈압성 뇌증이라던가. 혈압이 높아가지고 뇌 혈관에 피가 너무 많이 돌았대. 약 투여해서 혈압 낮추고 지금은 안정 중이셔. 의사 말로는 뇌졸중까지 안 간 게 천만다행이라더라.”

“고맙다, 정말.”

“됐어, 임마.”

얼굴 가릴 정신머리도 없었다.

병원에 깜짝 등장한 슈퍼스타 때문에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병실로 직진했다.

아... 엄마 진짜...

엄마의 병실은 VIP 병동도, 1인실도, 하다못해 2인실도 아닌 6인실이었다.

엄마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실내로 들어섰다.

왼쪽 두 번째 침대에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는 엄마와, 그런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나연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

동시에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두 여자.

나연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엄마의 표정에는 의혹이 스쳤다.

“아들이 여기 왜 왔어? 내가 절대 연락하지 말랬는데. 누구니, 나연이니? 석중이야?”

“엄마는 지금 그게 중요해요?”

미안함과 서운함, 그 밖의 여러 감정들이 뒤섞이며 한 번에 터져서 또 눈물이 흘렀다.

“다 큰 녀석이 울기는... 얘, 석중아. 커튼 좀 쳐라, 남사스럽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엄마의 눈시울 역시 금세 붉게 물들었다.

사람 없는 곳은 적적해서 6인실을 고집하던 엄마였지만, 결국에는 VIP 병동으로 옮겼다.

내 얼굴 보러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큰 병도 아닌데 그리 비싼 곳에 왜 가냐고 툴툴대던 엄마였지만,

“어우... 좋긴 좋네, 아들.”

막상 가시더니 안락한 시설에 아주 만족하셨다.

역시 돈은 많고 볼 일이다.

한편 엄마의 입원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약간의 골칫거리를 만들었다.

기적처럼 2년 동안 유지하던 나연과의 비밀연애가 기어이 공개된 것이다.

사람들로 넘쳐나는 병원에 계속 들락날락했으니 소문이 안 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사실 한국에서 열애설이란 게 아무래도 여자 쪽에 더 피해가 가는 부분이라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나연의 반응은 세상 쿨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는데 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어머니 간호나 잘 해드려.”

이런 여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행히 열애설이 보도된 후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할 일 없는 새끼들의 악플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악플러에 대한 비난이 훨씬 더 많아서 금방 묻혀 버렸다.

대신 나의 최대 흑역사 중 하나인 <하이, 풋볼> 인터뷰 영상과 짤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건 감수해야 했다.

* * *

“이제 슬슬 가야지, 아들.”

한국에 온 지 3일째 되던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엄마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엄마가 덧붙였다.

“의사 선생님이 곧 퇴원해도 된다잖아. 이제 다 나았으니 그만 가.”

“엄마.”

“응?”

“나, 한국에서 뛸까?”

말이 나온 김에 이번에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했던 생각을 꺼내 들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내가 너무 멀리 있잖아. 엄마가 이렇게 아파도 바로 달려오지도 못하고... 어차피 돈은 평생 써도 다 못 쓸 정도로 벌었는데. 나 이제 엄마랑 같이 살까 싶어.”

“으이그...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네, 잘못 키웠어.”

응?

감동적인 장면을 예상했는데, 전혀 생각도 못한 반응이 나왔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가 좋아할 줄 알았어?”

적어도 잘못 키웠다고는 안 하실 줄 알았죠...

“이왕 큰물에 갔으면 끝까지 버틸 생각을 해야지. 전 세계에서 널 응원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으니. 또 후배들은 너 보면서 꿈을 키울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실망시킬 거야?”

미리 대본이라도 써두셨나?

엄마의 말씀은 청산유수였다.

어디 가서 말로는 절대 안 지는 나지만, 뭐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랬나?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나?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엄마의 목소리가 좀 누그러졌다.

“물론 엄마도 우리 아들이랑 같이 살고 싶지. 하지만 인생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잖니. 아직은 아니야. 그리고 엄마는 괜찮아. 석중이도 있고, 나연이도 있으니...”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알았어요. 대신 나랑 약속 하나 해요.”

“약속?”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무리해서 병이 온 거래. 엄마. 이제 아침 장사는 하지 말고, 1주일에 5일만 일하기. 오케이? 에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일을 줄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요구에 잠시 고민하던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알았어. 우리 아들 돌아올 때까지 건강해야 하니까 그렇게 할게.”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미안하긴...”

환자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더욱 작게 느껴지는 엄마를 품에 꼭 안았다.

그래, 애초에 그렸던 그림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감동적이지.

“아들, 근데 혹시 주 6은 안 될까? 아무래도 5일은 너무 짧은 것 같은데.”

“엄마 진짜!!!”

석중이한테 감시역이라도 시켜야겠다.

* * *

내가 한국에서 엄마 간호에 매진하는 동안, 스페인 쪽 상황은 매우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 팀은 발렌시아와의 라리가 33라운드에서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고도 골 결정력 부재를 드러내며 0-0 무승부에 그쳤다.

반면 리가 2위 바르셀로나는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의 부진을 깨끗이 털어낸 메시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오사수나를 5-0으로 완파했다.

이제 승점 차는 단 3점.

절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건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으니...

더 큰 문제는 곧이어 열린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에서 발생했다.

홈에서 펼쳐지는 경기였기에 반드시 잡아야 했던 승부에서, 0-2로 패하며 탈락 위기에 몰린 것이다.

이날 경기를 딱 한 단어로 요약하면 ‘메시’였다.

0-0으로 팽팽하게 맞서던 전반 33분, 이니에스타의 스루패스를 받아 페널티박스 안에 진입한 메시가 라모스로부터 PK를 유도했다.

순간 모두가 코파에서의 실축을 떠올렸고, 다른 사람이 찰 거라고 예상했지만 메시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결과는 깔끔한 성공.

카시야스 주장을 완벽하게 속여 넘기며, 대담하게도 파넨카 킥을 집어넣었다.

스스로를 극복한 메시는, 이후로도 ‘페페 시프트’를 완벽하게 무력화시키며 우리 수비진을 농락했다.

그리고 운명의 후반 24분.

메시는 챔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을 탄생시켰다.

센터 서클 약간 앞쪽에서 부스케츠로부터 공을 넘겨받은 후 기습적인 단독 돌파를 시도.

뒤에서 라스가 열심히 쫓아갔으나, 이미 옐로카드 한 장을 받은 상황이라 파울로 끊지 못했다.

이어지는 라모스의 도전은 순간적으로 드리블 진행 방향을 오른쪽으로 홱 꺾으며 무력화.

알비올은 발을 채 뻗기도 전에 ‘치달’ 한 방으로 나가떨어졌다.

마르셀루가 백업을 오고, 잠시 균형을 잃었던 라모스가 끝까지 달려와서 슬라이딩 태클을 하고, 카시야스 주장이 각도를 좁히며 나왔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미친 속도로 골문 앞까지 돌진한 메시가 세 명의 방해를 뚫고 딱 하나 있는 코스로 날린 오른발 슈팅이, 야속하게 잔디를 세 번 튕기며 골망을 갈랐다.

무려 30m 거리를 질주하며 우리 팀의 월드클래스 수비진을 혼자서 가지고 논 메시였다.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가득 메운 홈팬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경악스러운 광경에 모두 입을 틀어막았다.

이 골이 준 충격만큼이나, 경기 결과에 따른 후폭풍도 어마어마했다.

나의 결장에 대해 엄청난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프로’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무엇보다 경기 출전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내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기도 했지만, 이런 일 역시 스타가 겪어야 할 숙명 같은 것.

그런데 달라진 팀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여기저기서 나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내가 백강이라도 그렇게 했을 거다. 대체 뭐가 그리 문제인가? (카시야스)

- 백강이 빠져서 진 게 아니야. 그냥 우리가 더럽게 못해서 그렇지. 그러니까 백강보고 뭐라고 하지 좀 마. (라모스)

- 그런 X같은 소리 지껄이기 전에 가족들과 좀 더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떨까? (페페)

- 공격수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백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벤제마)

그중에서도 가장 묵직한 건 역시 무리뉴 감독의 발언이었다.

“며칠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백강을 한국에 보낼 것이다. 설령 백강이 뛰어서 100% 이긴다고 해도. 혹자는 프로 의식을 운운하지만, 우리 모두는 프로이기 전에 인간이다. 당장의 패배 때문에 축구보다 중요한 여러 가치들에 대해 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무리뉴 감독은 끝에 한 마디를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2차전이 남아 있다.”

* * *

2011년 5월 3일.

근 반년 만에 찾은 캄 노우는 여전히 웅장하면서도 살벌했다.

원정 오는 팀들에게 시작부터 압박감을 주는 스케일과, 건드리면 싸움 날 것 같은 성난 관중들의 컬래버레이션.

게다가 오늘은 핸디캡도 있다.

두 골 차의 열세를 뒤집어야만 한다.

“이번 게임은 잔재주 없는 총력전이다.”

무리뉴 감독은 본인의 엄숙한 선언대로, 특별한 포지션 체인지 없이 가동할 수 있는 최상의 선발 라인업을 들고나왔다.

이미 페페 가지고 하는 장난질(?)은 완벽히 파훼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다만 중원의 에너자이저인 라스가 경고 누적으로 인해 결장하게 된 건 치명적인 손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막상 라스가 빠지니까 공백을 메울 카드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비슷한 타입인 마하마두 디아라를 겨울 이적시장 때 잃어버린 게 새삼 크게 다가오는 상황.

알론소-더브라위너를 고정이라고 보면 나머지 한 명으로 누구를 고를 것인지 귀추가 주목됐는데, 무리뉴 감독은 의외라면 의외인 선택을 했다.

페르난도 가고나 에스테반 그라네로를 제치고 카카를 내보낸 것이다.

부상 이후 더브라위너에게 밀리면서 이적료 1130억 원짜리 애물단지로 전락했던 카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던 ‘인성 甲’ 카카가 중요도 별 다섯 개인 경기에서 명예 회복의 기회를 얻었다.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반드시 이기자.”

“네! 감독님!”

여기까지 와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저 죽을힘을 다해 싸우면 될 뿐이다.

“자! 한바탕 놀아볼까?”

아니면 라모스처럼 신나게 놀든가.

킥오프.

홈팀 바르셀로나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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