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와아아아아-
메시가 그냥 공을 잡았을 뿐인데, 관중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졌다.
안 그래도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선수가, 1차전에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활약을 펼쳤으니...
위대한 영웅에게 걸맞는 찬사였다.
툭- 탁- 툭- 탁-
급할 게 없는 바르셀로나 녀석들이 여유롭게 볼을 돌렸다.
원래 티키타카에 대해서는 ‘무대응으로 대응한다’는 게 우리 팀의 기본 전략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얘네는 그냥 놔두면 90분 내내 볼을 돌릴 수도 있는 놈들이니까.
체력 소모와 공간 허용의 부담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공을 뺏기 위해 달려들어야 했다.
그래서 이 경기의 콘셉트는 ‘토털 사커’.
모든 선수가 수비에 참여해서 공을 탈취하고, 공격할 때도 최대한 많은 숫자가 참여해서 골을 노리는 전략이었다.
사실 말이 좋아 전략이지, 그냥 ‘X 빠지게’ 뛰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바르셀로나에는 워낙 탈압박과 볼 키핑에 도가 튼 애들이 많아서, 어지간한 수비로는 절대 공을 뺏을 수 없었다.
파울, 경우에 따라서는 옐로카드까지 받을 각오로 들이받아야 변수를 창출할 수 있었다.
“크아악!”
삐빅-
그러다가 휘슬 불리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뭐.
내가 사비의 정강이를 슬쩍 걷어찼다가 파울이 선언되자, 아까 메시에게 쏟아졌던 찬사와 동일한 데시벨의 야유가 경기장을 뒤덮었다.
다 이해된다.
바르셀로나 팬들 입장에서는 내가 얼마나 밉겠는가.
인테르에서 뛸 때 바르셀로나의 챔스 2연패 도전에 초를 쳤지.
최대 라이벌 팀에 이적했지.
라리가 3연패는 저지 직전이지.
코파 델 레이도 결승골을 넣으며 강탈해(?) 버렸지.
악당도 이런 악당이 없었다.
어느새 벌떡 일어난 사비가 프리킥을 짧게 연결하며 경기가 재개되었다.
볼을 잡은 채 잠시 템포를 조절하며 전방을 주시하는 이니에스타.
오늘 동기부여가 제대로 되어 있는 카카가 저돌적으로 접근했고, 더브라위너도 압박을 가했다.
스윽- 퉁-
그 좁은 틈바구니에서 발바닥으로 공을 굴리며 순간적으로 공간을 확보한 후 비야 쪽으로 전진 패스 시도.
‘이야’ 소리가 절로 나오는 장면이었지만 감탄할 시간이 없었다.
“덮쳐!”
알론소의 구호에 따라, 아르벨로아가 비야의 시야 뒤쪽에서 급습하며 공을 끊어내는 데 성공했다.
최상급의 온더볼 능력을 가진 바르셀로나 선수들.
그나마 가장 취약할 때가 바로 공을 받기 직전이었다.
이때를 잘 공략하는 게 오늘 경기의 포인트 중 하나였다.
“달려!”
비야 상대로 오랜만에 한 건 한 아르벨로아가 곧바로 아자르를 향해 장거리 패스를 때려 넣었다.
티키타카에 대항하는 우리의 무기는 스피디한 역습.
공을 건네받은 아자르의 쾌속 전진이 시작되었다.
원래 바르셀로나의 왼쪽 측면 수비를 책임지던 에릭 아비달이 지난 3월 간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는 바람에, 백업 요원인 아드리아누가 주전 레프트백을 맡고 있는 상황.
아자르가 날뛰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부시! 아드리아누 도와주고! 피케! 정백강 확실히 잡아!”
자칫하면 흔들릴 수도 있는 장면에서 푸욜이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수비 위치를 지정했다.
그러나 우리의 팀워크도 만만찮았다.
“헤이!”
부스케츠가 측면을 도와주러 간 사이, 더브라위너가 그 공간을 파고들며 절친에게 공을 요구했다.
파앙-
과감하게도 부스케츠의 다리 사이를 노린 패스가 무사히 배송 완료.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경기에서 굴욕짤 하나를 생성한 부스케츠가 씩씩대며 공을 쫓았다.
“형! 가요!”
더브라위너가 수비 붙기 전에 반 박자 빠르게 찍어 찬 공이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높이 날았다.
지난 1차전 때 이런 패스를 얼마나 하고 싶어 했을까.
위너야, 형이 기대에 부응해줄게.
어어어?
* * *
삐빅- 삐비비빅-
프랑크 더블레이케러 주심이 맹렬하게 휘슬을 불며 오른팔을 뻗어 바닥을 찍었다.
페널티킥을 선언하는 수신호였다.
공포심이 인간을 얼마나 어리석게 만드는지, 이 중요한 경기에서 터진 피케의 본헤드(Bone head) 플레이가 제대로 증명했다.
10초 전으로 시계를 돌려 보면, 사실 더브라위너의 로빙 패스는 생각만큼 정교하지 않았다.
가만 내버려 뒀으면 발데스 골키퍼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던 공이었다.
그러나 나의 전담 마크맨으로, 만날 때마다 골을 허용하며 체면을 구겼던 피케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든 점프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다급히 팔을 감았고, 덕분에 균형을 잃은 나는 넘어져서 캄 노우의 잔디를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자칫하면 큰 부상을 입을 뻔한 거친 파울.
“너 이 개새끼야! 일부러 그랬지?”
수비할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온 페페가 피케를 윽박질렀다.
“퇴장! 이건 레드 줘야죠!”
라모스는 프랑크 주심에게 강력하게 어필.
우우우우우-
금방이라도 패싸움이 날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에, PK 판정에 대한 관중들의 야유까지 겹치면서 필드 위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만! 다들 진정해!”
“페페, 세르히오, 이리로 와!”
혼돈의 캄 노우에 등장한 두 명의 천사.
양 팀 주장인 카시야스와 푸욜이 몸을 던져 선수들을 말리고 나섰다.
지역감정이 무지 강한 스페인이 월드컵 우승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가 이 두 사람의 존재였다.
퇴장까지 나왔으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갈등이 커질 뻔했는데, 다행히(?) 옐로카드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의도성이 다분했고, 상당히 위험한 파울이라 레드도 충분히 가능했으나 경기가 경기인지라 프랑크 주심이 피케에게 기회를 준 것 같았다.
이제 관건은 페널티킥 성공 여부.
절대 실축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기회였다.
“백강, 네가 얻어냈으니까 네가 찰래?”
유력한 키커 후보 중 하나인 알론소가 내게 물어 왔다.
“음, 아니. 내 생각엔... 카카가 차면 어떨까 싶은데?”
“뭐? 내가?”
전혀 기대가 없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카카.
“응. 나는 발이 영 시원찮아서. 너는 큰 경기 경험도 많고 킥도 좋잖아.”
“그래도...”
카카는 어쩐지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찬성.”
“저도요!”
“선배, 한 방 먹여줘요!”
“놓치면 각오하라고.”
내 마음을 읽었는지 동료들이 옆에서 한 마디씩 거들었다.
부상으로 인한 급격한 기량 하락, 돈값 못하는 선수라는 비난, 그리고 자신의 주전 배제로부터 시작된 온갖 평지풍파들까지.
일련의 사태들을 묵묵히 견디며 훈련에만 매진했던 카카였다.
“알았어, 내가 찰게.”
결연하게 대답하는 카카의 얼굴에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골문과의 거리는 약 11m.
발데스가 손뼉을 팡팡 치며 기합을 넣었고,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긴 카카가 주심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삑-
운명의 순간.
퍼엉-
카카는 골문 오른쪽 하단을 노렸고, 발데스가 방향은 잘 잡았지만 슈팅이 0.5초 정도 빠르게 통과했다.
철썩-
결승 다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득점이자, 카카의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1호 골.
골을 확인하는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던 카카가, 이내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본인의 시그니처 세리머니를 펼쳤다.
그러나 기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부리나케 뛰어온 동료들이 카카를 덮쳐서 넘어뜨렸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다들 고마워!”
한때 세계 축구계를 주름잡았던 2007년 발롱도르 위너가 정말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 * *
삑- 삑- 삑--
휘슬과 함께 1-0으로 전반전이 종료되었다.
동점을 만들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실점 없이 한 골을 따라잡았으니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45분이었다.
오랜만의 선발 출전에서 골까지 기록한 카카는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표정.
무리뉴 감독이 그런 카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잘했다. 긴장을 많이 했을 텐데, 정말 잘 성공시켜줬어.”
“감사합니다, 감독님.”
평소에는 세상 냉정한 모습을 주로 보여주는 무리뉴 감독이지만, 알고 보면 인간적인 면모도 있는 사람.
카카의 마음고생을 왜 몰랐겠는가.
“자자, 그래도 아직 지고 있다는 건 잊지 말자고요.”
너무 훈훈해지는 걸 경계한 라모스가 일침을 날렸다.
“그래. 옳은 말이다. 승부차기 따위는 생각하지 마라. 우리가 두 골을 더 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이라고 생각해. 멈추지 말고 압박하고, 수비하고, 공격해라. 알았나?”
“네! 감독님!”
후반전, 양 팀 모두 선수 교체는 없었다.
현재 가동 중인 라인업이 최선이라는 확신이 분명한 두 감독이었다.
킥오프.
최근 엘클라시코에서 과르디올라 감독이 줄기차게 괴롭히는 대상을 딱 한 명만 꼽으라면,
“공 받아주러 와야 돼!”
역시 알론소였다.
우리 팀의 에이스야 물론 나였지만, 나는 상대 감독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어찌할 수 없는 상수에 가까웠다.
압도적인 높이로 찍어누르는데 전술이고 나발이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알론소는 달랐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알론소에 포커스를 맞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우리 팀의 볼 공급을 방해할 수 있다.
둘째, 방해에 성공했을 경우 바로 득점 찬스를 만들 수 있다.
한마디로 알론소만 잡으면 공수 양면에서 개이득을 본다는 이야기였다.
알론소의 발재간이 뛰어나지 않다는 게 우리 팀 입장에선 너무나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우리 ‘소형’은 단독으로 탈압박을 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항상 주변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알론소급의 패싱력, 피지컬, 수비력에 화려한 개인기까지 갖춘다면 그거야말로 ‘밸붕’ 캐릭터 아니겠는가.
타악-
사비와 이니에스타가 앞쪽에서 패스 경로를 차단하고 비야까지 거칠게 들러붙자, 알론소가 황급히 왼쪽 측면을 본다는 게 그만 전진해 있던 알베스에게 끊기고 말았다.
집요한 노림수가 마침내 통한 바르셀로나.
알베스가 여유 있게 패스 줄 곳을 찾았는데...
촤아악-
아무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카카가 그대로 백태클을 시도했다.
까놓고 말해서 카카에게 수비적으로 누가 크게 기대를 했겠는가.
산전수전 다 겪은 알베스가 넋 놓고 당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의 카카는 분명 뭔가 달랐다.
“파울! 파울이잖아!”
바르셀로나 녀석들이 난리가 났지만 판정은, 노파울이었다.
카카의 허슬 플레이를 이어받은 마르셀루가 지체없이 터치라인을 따라 스루패스를 뿌렸다.
터엉-
알베스가 방금처럼 높은 위치에서 공을 잡았다는 건, 라이트백 자리가 비어있다는 뜻.
백태클에 쓰러진 알베스보다 한 타이밍 빠르게 출발한 벤제마가 공의 속도를 살려 크게 치고 나갔다.
알론소 잡으러 들어갔다가 예상 못한 상황에 역습 위기를 맞은 바르셀로나 수비진이 뒤늦게 돌아오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수비나 하고 있을 것이지.
건방지게 한 골 더 넣을 생각을 한 게 너희들의 실수란다.
푸욜의 태클을 피하면서 올린 벤제마의 얼리크로스가 내 이마 쪽으로 멋지게 휘어져 들어왔다.
피케는 이미 비극을 예감했는지 체념한 채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깝다.
이번에도 나 건드렸으면 진짜 퇴장인데.
콰아앙-
후반 8분.
‘프로정신이 부족한’ 정백강의 스페인 복귀 신고 골이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