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카탈루냐의 축구 성지 캄 노우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숙적 레알 마드리드에게 이번에야말로 승리를 거두나 싶었는데, 지긋지긋한 ‘또백강’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
페널티킥 유도에 추가골까지.
2골에 모두 관여하며 합산 스코어를 2-2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후반전 시작 후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승부는 원점이 되었다.
우리 팀은 이미 승리를 확정 지은 것처럼 축제 분위기.
“너 이 새끼! 이 졸라게 이쁜 새끼!”
페페가 내 양 볼을 붙잡고 머리를 비비며 격한 애정표현을 했다.
정말 좋아서 그런 건 아는데, 이렇게 가까이 들이대면 여전히 조금 무섭긴 하다.
“다들 집중해! 집중!”
상대 벤치에서는 과르디올라 감독이 오케스트라 를 지휘하듯 손을 흔들며 제자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얼굴에 드러나는 낭패감과 당혹스러움은 숨기지 못했다.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 이어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서까지 패배한다면 감독으로서 그 타격은...
어우,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다.
킥오프.
이제 바르셀로나도 마음 편히 볼을 돌릴 수는 없는 입장이 되었다.
Tenim un nom el sap tothom-
Barça, Barça, Barça!!!
집단적 멘붕에서 겨우 벗어난 관중들이 소리 높여 응원가를 열창하며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나한테 줘!”
공을 잡은 부스케츠를 향해 공을 요구하는 메시.
팀이 어려움에 빠진 지금, 모두의 눈은 메시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1차전의 괴물 같은 활약이 다시금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투웅-
부스케츠가 팀의 에이스에게 힘있게 땅볼 패스를 전달했다.
사방에서 공을 둘러싸고 군침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맥빠진 패스를 했다간 인터셉트 후 역습으로 치명적인 결과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우와아아-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현재 필드에 있는 선수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더브라위너를 상대로 메시가 기막힌 플립 플랩(Flip Flap)을 성공시킨 것이다.
말 그대로 ‘참교육’의 현장.
눈 깜짝할 사이에 벗겨진 더브라위너는 충격으로 인해 몸이 잠시 굳었다.
“잡아!”
알론소, 아르벨로아, 그리고 페페까지 메시를 타깃으로 모여들며 수비 블록을 형성했다.
메시를 막으려면 세 명 정도는 투입해주는 게 예의였다.
뻐엉- 까앙-
오우야.
우리 메시 화가 많이 났구나.
돌파를 견제하기 위해 약간의 거리를 둔 수비를 펼치자, 곧장 때린 왼발 중거리포가 크로스바를 강타했다.
오늘 경기 통틀어 바르셀로나의 가장 유의미한 찬스였다.
“야! 슈팅을 그렇게 쉽게 주면 어떡해!”
루즈볼을 잡아낸 주장이 호통을 쳤다.
“아직 안 끝났어! 이제 시작이야! 새끼들아,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어지간하면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고, 욕하는 일은 더더욱 없는 주장이다.
챔스 4강이라는 무대의 특별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후 약 30분 동안 잔디 위에서 펼쳐진 힘겨루기는, 뭐랄까, ‘혈전’보단 ‘개싸움’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전반전에 이미 경고를 받았던 피케를 포함해서 알베스, 부스케츠, 사비, 페드로가 옐로카드.
우리 팀도 더브라위너, 알론소, 카카, 라모스, 페페가 노란 딱지를 받아들었다.
워낙 경기가 거칠다 보니, 덕분에 양 팀 주장들은 싸움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 * *
삑- 삑- 삑-
길게 울리는 휘슬.
이 지독한 승부는 결국 90분 내로 결판이 안 났다.
양 팀 모두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긴장 때문인지 마무리에 실패하며 끝내 골은 나오지 않았다.
무리뉴 감독은 연장 시작에 앞서 체력적 한계에 봉착한 카카를 빼고, 대신 페르난도 가고를 투입했다.
교체되는 카카의 표정은 후련해 보였다.
우려를 불식시키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준 카카였다.
잠깐 숨을 고른 후 연장 전반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주어진 시간은 30분.
그 이후에는 승부차기였지만, 양 팀 선수들 모두 공유하고 있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승부차기는 없다!’
승부차기가 두렵기 때문이 아니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평생 축구를 해온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강렬한 촉 같은 게 있었다.
“백강!”
바르셀로나 녀석들도 사람인지라, 슬슬 몸에 입질이 오기 시작했다.
정규시간 동안 집중 견제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알론소가, 오랜만에 압박에서 벗어나 시원스러운 롱패스를 날렸다.
후... 근데 진짜진짜 힘들다.
솔직히 내 다리도 조금은 후들거렸다.
챔스에서 연장 승부는 이미 경험한 바였지만, 심리적으로 예민한 엘클라시코라 그런지 체력 소모가 더 심한 것 같았다.
“흐얏!”
힘을 쥐어 짜내며 도약, 공에 머리를 갖다 댔다.
방금 들어와서 아직 쌩쌩한 가고의 발 앞에 정확히 떨어지는 공.
피지컬 평범, 스피드나 개인기도 평범, 수비력도 평범한 축에 드는 가고의 최대 장기는,
터엉-
바로 패스였다.
최전방부터 최후방까지 수없이 왕복하느라 체력이 고갈됐을 마르셀루가, 가고의 스루패스를 받기 위해 눈물겨운 전력 질주를 펼쳤다.
퍼어억-
그리고 충돌.
“크아아악!”
옆에서 덮친 슬라이딩 태클에 발목을 직격당한 마르셀루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아 진짜! 시뮬레이션이잖아요!”
프랑크 주심을 둘러싼 채 격렬하게 항의하는 바르셀로나 녀석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현존 최고의 라이트백이자 바르셀로나 전술의 핵 중 하나인 알베스가 두 번째 옐로카드를 받으며 경기장에서 쫓겨났다.
우리 팀의 주요 득점 패턴 중 하나가 ‘마르셀루-정백강’으로 이어지는 콤보.
그 시작점인 마르셀루의 크로스를 막아야만 한다는 알베스의 강박증이 치명적인 수비 실수를 유발한 셈이었다.
엘클라시코처럼 서로 엇비슷한 수준의 경기에서, 수적 열세에 놓인다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밀어붙여!”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 무리뉴 감독이 총공세를 지시했다.
“부시! 백강한테 붙어줘!”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은 과르디올라 감독의 선택은 나에 대한 더블팀.
피케와 부스케츠가 내게 찰싹 붙어 앞뒤로 옴짝달싹 못하게 감쌌다.
혹시라도 지금 실점하면, 원정 다득점 룰 때문에 두 골을 더 넣어야 하는 바르셀로나였다.
사실상 골을 먹는 순간 결승 진출은 나가리라는 의미.
상황이 워낙 극단적이라 가장 위협적인 나를 어떻게든 막겠다는 심정은 이해가 갔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한 명이 퇴장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사람 없는데 나한테 둘이 붙어버리니, 골키퍼 빼고 7명이서 9명을 상대해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과르디올라 감독답지 않은 쫄보스러운 더블팀 판단이, 이 경기를 결정짓는 패착이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은 결과론이긴 하지만 말이다.
콰아아앙-
철썩-
오른발등에 얹히는 순간 이미 소리부터 달랐던 더브라위너의 중거리포가, 발데스의 손끝을 스치며 골망을 꿰뚫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이번 시즌 챔스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 * *
[레알 마드리드, 숙명의 라이벌 바르셀로나 격침하며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
[1차전 0-2 패배 딛고 캄 노우 원정서 5-0 완승 거둬]
[정백강 또 해트트릭... 한국행 논란 잠재우다]
나에게 더블팀을 지시한 순간, 우리 팀 선수들의 눈앞에 광활한 공간이 펼쳐졌다.
패스 몇 번만 돌리면 바로 슈팅 찬스.
가뜩이나 90분 넘게 뛴 바르셀로나 녀석들에게 날렵한 커버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더브라위너의 시리즈 역전골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실점 후, 과르디올라 감독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피케를 스트라이커 자리로 올려보냈다.
예쁘게 축구할 시간이 없으니 공중볼로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럽 최고의 ‘뚝배기 군단’인 우리에게 그런 전술이 먹힐 리가 없었다.
라모스와 페페가 피케에게 향하는 공중볼을 오는 족족 끊어냈고, 이는 고스란히 역습으로 연결되었다.
194cm의 피케도 어쩌지 못했던 나의 높이를 178cm에 불과한 푸욜이 어찌 감당하겠는가.
두 골이 필요했던 바르셀로나는, 거꾸로 나에게 두 골을 더 허용하며 완전히 무너졌다.
조별리그 밀란전, 8강 샬케전에 이어 챔스에서 기록한 시즌 3호 해트트릭이었다.
비틀거리며 경기 후 인터뷰에 참석한 과르디올라 감독의 얼굴은 정말 눈 뜨고 못 볼 지경.
마치 120분 동안 월미도 바이킹을 탄 사람처럼 해쓱했다.
- 캄 노우에서 다섯 골 차 패배는 전혀 생각 못한 결과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완패였다. 감독으로서 드릴 말씀이 없다.”
- 패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승리했던 1차전과 오늘 경기의 차이는 딱 하나다. 1차전에는 정백강이 없었고, 오늘은 뛰었다.”
- 정백강 한 명 때문에 졌다는 말인가?
“앞서 열렸던 여러 번의 엘클라시코가 우리 선수단에 정백강에 대한 공포를 심어 놓았다. PK를 줬던 피케의 파울도 그런 이유에서 나왔고. 나라도 냉정을 유지했어야 하는데, 연장전에서 전술 미스로 역전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패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백강의 존재가 가장 컸음은 부인할 수 없다.”
- 이번 시즌 무관 위기에 빠졌는데?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겸허한 마음으로 보드진의 결정을 기다리겠다.”
이어서 무리뉴 감독이 마이크 앞에 앉았다.
- 대단한 승리였다. 2년 연속 결승 진출인데, 소감이 어떤가?
“챔피언스리그는 늘 나를 흥분시키는 최고의 무대다. 그 짜릿한 경험을 한 경기 더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 정백강을 제외하고 오늘 경기 수훈 선수를 한 명만 꼽는다면?
“전부 다 너무 훌륭했다. 그래도 꼭 한 명만 선택해야 한다면 카카다. 신체와 기술 이전에 프로로서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우리 팀에 어린 선수들이 많은데, 보고 느낀 점이 많을 것이다.”
- 결승전 상대로는 누굴 원하나?
“어려운 질문이다. 오늘 경기의 진짜 주인공에게 답변을 넘기도록 하겠다. 기자 여러분들도 나보다는 그 친구의 발언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취재진 사이에서 동의한다는 듯 작은 웃음이 터졌다.
무리뉴 감독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고, ‘진짜 주인공’인 내가 마지막 인터뷰이로 나섰다.
- 경기 전의 모든 논란을 잠재워버리는 활약이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1차전을 패하는 바람에, 부담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만큼 책임감도 더 느꼈고. 결승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 그 짐을 다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 어머니 건강은 어떠신가?
“퇴원하셨고, 원래 하시던 일도 다시 시작하셨다. 좀 더 쉬시라고 말렸지만 원래 내 말을 잘 듣는 분이 아니다.”
- 엘클라시코에서 4경기 9골을 기록 중일 정도로 바르셀로나에게 유독 강하다. 비결이 뭔가?
“정확히 말하면 나는 모든 팀에게 다 강하다. 죄송, 농담이다. 사실은 사실이라고? 고맙다. 흠, 더비는 결국 심장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상대 선수들보다 대범한 게 비결이라면 비결일 거다.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나를 대할 때 좀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높은 레벨의 경기에서 자기 플레이를 못 한다는 건 커다란 문제다.”
- 앞서 무리뉴 감독이 패스한 질문에 답을 해주길 바란다. 결승전에서 어느 팀을 만나고 싶나?
“아마 감독님 생각도 나와 같을 거다. 내 답변은 명확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 2008-2009 시즌 준결승에서 승부차기로 패한 후 그 복수를 아직 못했다. 나는 가슴 속에 빚을 쌓아두고 살 수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