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34화 (135/176)

134화

“곧 시작해요!”

더브라위너의 발랄한 신호에 따라 텔레비전 앞으로 사람들이 착착 모여들었다.

어느새 레알 마드리드 공식 사랑방이 된 우리 집에서 다 함께 시청하는 경기는, 볼 것도 없이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이었다.

각각 잉글랜드와 독일을 대표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VS 바이에른 뮌헨의 빅매치.

오늘 격전이 펼쳐질 장소는 맨유의 유서 깊은 홈구장 올드 트래포드였다.

앞서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열린 1차전 결과는 접전 끝 1-1 무승부.

후반 8분 뮌헨의 토마스 뮐러가 코너킥 상황에서 헤더골을 넣으며 앞서갔으나, 정확히 10분 뒤에 네마냐 비디치가 똑같이 헤더로 갚아주면서 포효했다.

맨유는 소중한 원정골을 넣었기 때문에 2차전에서 실점만 하지 않는다면 결승으로 갈 수 있었다.

“올드 트래포드라, 옛날 생각이 나네.”

카시야스 주장이 감상에 젖어 중얼거리자, 아자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옛날이요?”

“응, 거의 10년 된 이야기네. 2000년도랑 2003년도에 챔스 토너먼트에서 맨유랑 만났었거든. 두 번 다 8강전이었어.”

2000년도라니.

새삼스레 주장의 레알 짬밥에 놀라고, 그럼에도 아직 30살이라는 데 두 번 놀랐다.

“그때는 누가 이겼어요?”

눈을 반짝거리며 묻는 더브라위너에게 주장이 윙크를 하며 대답했다.

“케빈, 나는 맨유한테 져본 적이 없어.”

“크으...”

“우와...”

주장의 넘쳐나는 스웨그(Swag)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벨기에 듀오.

“형은 무슨 애들 앞에서 옛날이야기를 그렇게 해요. 완전 아저씨 같게.”

“크흠...”

라모스가 초를 치는 바람에 주장의 커리어 자랑은 조기에 종료되었다.

추억팔이를 듣는 동안에 킥오프.

홈팀 맨유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올해 나이 36세의 노구(?)를 이끌고 선발로 나선 폴 스콜스가, 오른쪽 측면의 안토니오 발렌시아 쪽으로 본인의 특기인 롱패스를 뿌렸다.

“이봐 사비, 너하고 스콜스 중에 누구 킥이 더 정확할까?”

아르벨로아의 도발에 알론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유치하게 뭐 그런 걸 물어봐?”

“에이, 재미로 하는 거지 뭐. 어때? 다른 요소는 깔금하게 다 빼고 킥만 딱 비교하면.”

일동의 시선이 알론소에게 집중되었다.

잠깐 고민하더니 이윽고 입을 여는 알론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좀 낫지.”

“올~ 자신감이 넘치는데? 역시 월드클래스 미드필더.”

“그만 놀려라.”

“장난이야, 장난.”

아르벨로아가 알론소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끌어안았다.

스페인에 온 지 꽤 오래 됐지만 여전히 동성 간 스킨십에는 적응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맨유가 이겼으면 좋겠어.”

마르셀루가 다이어트 콜라를 한 모금 넘기며 말했다.

“왜?”

“왜라니? 나는 수비수잖아. 아무래도 로벤보단 발렌시아를 상대하는 게 마음 편하지.”

듣고 보니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다.

“그래, 인정한다.”

마르셀루피셜 ‘로벤보다 훨씬 만만한’ 발렌시아가 특유의 매크로 플레이를 펼쳤다.

터치라인 따라 직선 돌파 후 크로스.

반댓발 윙포워드가 대세인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물게 클래시컬한 스타일로 맨유의 주전 자리를 차지한 발렌시아였다.

공중볼을 두고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와 다니엘 반 부이텐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결과는 반 부이텐의 승리.

몸싸움에서 완전히 제압한 뒤 깔끔하게 헤더 클리어.

베르바토프도 189cm의 장신 스트라이커지만, 197cm에 100kg가 넘는 근육질의 반 부이텐을 힘으로 상대하기엔 버거웠다.

“아, 맞아. 다니엘 선배님이 저한테 백강 형 얘기 한 적 있어요.”

아자르가 피스타치오 맛 아이스크림을 한 술 가득 뜨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반 부이텐이 벨기에 국가대표였지?

“내 얘길 했다고? 뭐라고 하디?”

“자기가 순수 높이로 프로 데뷔 후 딱 한 번 져봤는데 그게 바로 형을 상대할 때였대요. 그래서 절대 다시 만나기 싫다고 하시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텐이 형, 사람 볼 줄 아시네.

“나중에 보게 되면 내 이야기도 전해줘. 나도 엄청 힘들었다고.”

“그럴게요.”

“그리고 아이스크림 적당히 먹어.”

“네...”

아자르는 다 좋은데 먹는 걸 너무 밝혀서 탈이다.

회귀 전에도 체중 관리 때문에 뒷얘기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버릇을 잘 들여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 임마. 그만 좀 먹어라.”

더브라위너가 덩달아서 놀려대다가 아자르의 차가운 눈빛 공격에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귀여운 녀석들, 참 잘들 논다.

반 부이텐이 걷어낸 볼을 잡은 바스티안 슈바인스타이거가 지체없이 프랑크 리베리 쪽으로 패스를 뿌렸다.

“진짜 무조건 맨유가 이겨야 돼.”

카메라가 리베리를 클로즈업하자, 아르벨로아가 힘주어 말했다.

여전히 오른팔은 알론소의 목을 감은 상태였다.

“설마 리베리가 무서운 거야?”

“무서운 건 아닌데 말이지... 그냥 좀 그래.”

“무서운 거 맞네.”

알론소가 껄껄 웃는 사이, 리베리가 직접 공을 몰고 거침없이 전진했다.

반대쪽의 로벤이 보다 적극적으로 득점을 노리는 쪽이라면, 리베리는 돌격대장 겸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담당했다.

확실한 건 둘 다 무지무지 잘한다는 것.

만약 뮌헨이 올라온다면 마르셀루와 아르벨로아는 오버래핑을 자제하고, 수비에 전념해야 할 확률이 높았다.

“오우! 나이스 플레이!”

라모스가 벌떡 일어나며 손뼉을 쳤다.

과감한 슬라이딩 태클로 리베리를 막아선 웨인 루니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아니, 무슨 공격수가 저기까지 내려와서 태클을 해?”

벤제마가 놀라워하자 가만 듣던 페페가 일침을 가했다.

“야! 우리 팀 공격수 짜식들도 저런 건 좀 배워라. 얼마나 보기 좋아? 아, 백강은 빼고. 쟤는 골 넣어야 되니까.”

괜히 입 열었다가 억울하게 말로 맞은 벤제마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공격수는 골을 많이 넣고 볼 일이다.

아무래도 다음 리가 경기에서는 우리 제마한테 어시스트 좀 해줘야겠다.

“어? 어? 어어?”

더브라위너의 호들갑 속에 맨유가 득점 찬스를 맞았다.

공을 따낸 루니가 호쾌하게 때려 준 장거리 스루패스가 베르바토프에게 정확히 연결되며 뮌헨의 오프사이드 트랩이 순간적으로 깨졌다.

황급히 따라 들어간 반 부이텐이 베르파토프의 유니폼을 잡아채며 파울 선언.

맨유가 아주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어냈다.

“루니가 역시 한방이 있네. 일어서자마자 저렇게 패스를 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말이지.”

아재가 되어가는 카시야스 주장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라모스 선배나 페페 선배였으면 저런 패스는 그냥 끊었죠. 안 그래요?”

어린 나이임에도 훌륭한 정치적 감각을 갖춘 더브라위너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아부에 나섰다.

“당연하지!”

“루니 정도는 쉽지.”

실력만큼이나 자부심도 대단한 레알의 센터백 콤비가 동시에 대답했다.

위너야, 너는 선수 은퇴하면 꼭 출마 한 번 해봐라.

“루니가 차겠죠?”

아자르의 예상대로 루니가 공 앞에 버티고 섰다.

수비벽을 형성한 뮌헨 선수들이 자꾸 슬금슬금 나오는 통에 경기가 약간 지연되었다.

“무조건 직접 슈팅이겠지? 이럴 땐 웨슬리가 있어야 하는데.”

카시야스 주장의 입에서 스네이더의 이름이 나왔다.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웨슬리가 이런 거 이상하게 잘 맞춰. 프리킥이나 페널티킥 같은 거.”

“저는 알죠. 근데 그 능력, 하등의 쓸모가 없던데요? 신기하긴 한데. 우리 팀 건 못 맞추기도 하고요.”

“하긴, 그건 그래.”

주장이 나의 말에 동의했다.

겨우 상황을 정리한 주심이 경기 재개 선언.

한 번 호흡을 고른 루니가 짧은 도움닫기 후 오른발을 휘둘렀다.

* *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

[4강 2차전서 바이에른 뮌헨에 1-0 승리... 웨인 루니 프리킥 결승골]

역시 에이스는 에이스였다.

이번 시즌이 개막하기 전, 재계약 문제로 온갖 언플을 펼치며 팬들을 실망시켰던 루니가 전반 15분 만에 속죄포를 제대로 터뜨리며 맨체스터의 영웅으로 등극했다.

슈팅의 궤적과 속도, 모든 게 완벽했던 그림 같은 프리킥이었다.

한스외르그 부트 골키퍼가 사력을 다해 손을 뻗었지만, 야신 사각지대로 빨려 들어가는 공을 막아내지 못했다.

선빵을 세게 얻어맞은 뮌헨은 ‘로베리’를 축으로 즉각 반격에 나서며 맨유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전반 29분에는 로벤의 전매특허인 왼발 중거리포가 크로스바를 강타, 이어서 35분에는 리베리의 환상적인 스루패스를 마리오 고메즈가 날려 먹으며 땅을 쳤다.

에드윈 반 데 사르 골키퍼의 눈부신 선방이 없었다면 금방 동점이 됐을 경기력이었다.

‘노련한 여우’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나니를 빼고 박지승 선배를 투입했다.

이 교체가 ‘역시 퍼거슨’이란 소리가 나오게 만든 신의 한 수.

표면상으로는 왼쪽 윙어 자리였지만, 지승 선배에게 포지션은 중요하지 않았다.

맨유의 ‘13번’이 특유의 미친 활동량으로 필드 전역을 누비기 시작하자, 갈대처럼 흔들리던 공수 밸런스가 완벽하게 딱 잡혔다.

로벤이든 리베리든 슈바인슈타이거든, 뮌헨의 핵심 선수들이 공을 잡을 때마다 그곳엔 항상 지승 선배가 있었다.

왜 큰 경기에서 퍼거슨 감독이 지승 선배를 신뢰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맹활약이었다.

분데스리가에서 예상 밖 부진을 겪으며 우승 경쟁에서 밀려난 후 챔스에 올인했던 뮌헨은 이 패배로 무관이 확정되었다.

명색이 ‘독일의 제왕’인데 무관이라니, 체면을 단단히 구긴 셈이었다.

반면 프리미어리그에서 아슬아슬하게 선두를 지키고 있는 맨유는 챔스에서도 결승에 오르면서 야심차게 더블을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두 명문 구단의 희비가 완전히 엇갈린 승부였다.

한편, 결승 대진이 확정되면서 가장 신난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이역만리에 있는 한국의 축구팬들이었다.

- 크... 맨유 대 레알이라니. 맨유 대 레알이라니!!!

- 불편하네요. 레알 대 맨유가 맞습니다.

- ㅋㅋㅋ 그나저나 퍼거슨 영감님한테 편지라도 써야 되는 거 아니냐?

- 그러게. 제발 박지승 선발이어라 ㅠㅠ

- 챔스 결승에서 정백강 VS 박지승이라니 ㅋㅋ 상상만 해도 쌉소름이다

- ㅉㅉ 정백강이랑 박지승이랑 비교가 되냐?

- ㅂㅅ아 당연히 정백강이 훨씬 뛰어난 건 맞는데 지금 그게 포인트가 아니잖아 ㅋㅋ 문맥을 봐라 쫌 ㅋㅋㅋ

- 형제대결 고고씽~

- 정백강이 골 넣고 맨유가 이겼으면 좋겠다

- ㄴㄴ 박지승이 골 넣고 레알이 이겨야 됨

- 서울에서 치킨집 한다. 벌써부터 설레서 잠이 안 온다

- ㅋㅋㅋ 결승전 날 대한민국 닭들 다 죽었다 ㅋㅋㅋㅋㅋ

2년 전에 이미 챔스 4강에서 만난 적이 있었지만, 결승전은 또 전혀 다른 느낌 아니겠는가.

경기 종료 후 지승 선배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 결승전 기대하겠습니다. 이번엔 꼭 이길 거예요.

한참 있다가 도착한 선배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 백강아. 제발 살살 하자.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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