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축구장에서 가장 좋은 ‘스팀팩’은 역시 골이었다.
치차리토의 득점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한 맨유 녀석들은 한층 신이 나서 우리를 몰아붙였다.
우리 팀의 가장 큰 문제는 턴오버.
가뜩이나 긴장해 있던 더브라위너는, 결과적으로 실점의 빌미가 된 실수 이후 바짝 얼어서 제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
라스도 홀로 압박을 뚫고 공격 전개를 할 깜냥은 안 되는 친구였고.
그렇다면 알론소의 후방 플레이 메이킹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
이 대목에서 퍼거슨의 비기(祕器)가 등장했다.
박지승 선배를 알론소의 전담 마크맨으로 붙여 버린 것이다.
밀란을 상대할 때 안드레아 피를로를 막기 위해 지승 선배를 활용했던 전술을 다시 들고나왔다.
효과는 굉장했다.
젠나로 가투소의 표현에 따르면 ‘모기 같은’ 지승 선배의 밀착 수비에 말린 알론소는, 전진 패스는커녕 볼을 키핑하는 것만 해도 힘들어했다.
또 한 명의 빌드업 리더인 라모스에겐 치차리토, 측면에서 풀어줄 마르셀루에겐 루니가 붙었다.
퍼거슨 감독이 이 한 경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있는 움직임.
역시 퍼거슨이 명장은 명장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무리뉴 감독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에덴! 내려가!”
무리뉴 감독은 오른쪽 윙포워드로 출전한 아자르의 위치를 미드필드로 내리면서 이 난국을 탈출하고자 했다.
상대 압박 속에서 볼을 지켜내는 능력은 아자르가 우리 팀에서 단연 넘버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레알 마드리드라는 메가 클럽의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센터 서클 아래까지 이동한 아자르에게 페페의 땅볼 패스가 전달되었다.
아자르가 공을 잡자 기다렸다는 듯 긱스가 달려들었다.
거의 2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두 선수의 격돌은 아자르의 완승이었다.
축구계 대선배에게 ‘알까기’ 굴욕을 선사하며 압박을 손쉽게 벗겨낸 아자르가 내 머리를 겨냥하고 공을 높게 띄웠다.
내가 오늘 경기 시작 후 처음으로 받아보는 유의미한 패스였다.
“혀엉!”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 더브라위너가 부리나케 패스를 받기 위해 뛰었다.
그려, 뭐 하나 해봐라.
투욱-
뻐어엉-
위너야, 그건 아니지...
더브라위너가 나의 헤더를 어림없는 발리슛으로 연결했고 공은 골문을 훌쩍 넘어 관중석으로 들어갔다.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는 더브라위너.
“케빈! 천천히 해, 천천히. 아직 조급해할 필요 없어. 시간 많아!”
“넵! 죄송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겨야 하는 상대는 맨유임에 틀림없지만, 그 전에 스스로의 지나친 긴장 혹은 흥분부터 극복해야 했다.
맨유에 비해 우리 팀 쪽에 어린 선수가 훨씬 많았으니까.
올해 나이가 무려 40세,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은 반 데 사르 골키퍼가 아주 천천히 골킥을 준비했다.
이런 사소해 보이는 플레이 하나하나가, 사실은 모두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벤제마가 빅토르 주심에게 따지려는 순간, 비로소 롱 킥을 띄워 보내는 반 데 사르였다.
이 노련한 골키퍼는 모든 타이밍을 완벽하게 계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전 아자르를 상대로 체면을 구겼던 긱스가 유려한 왼발 트래핑으로 공중볼을 잡아 놓았다.
비록 늙어서 전성기 때만큼 재빠른 몸놀림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체력 문제 때문에 포지션 역시 중앙 미드필더로 변경해야 했지만, 여전히 기술은 살아 있는 모습이었다.
파앙-
긱스가 무심하게 깔아준 패스를 어느새 올라온 에브라가 캐치했다.
비록 몇 년 전 피파 베스트 11에 들던 시기와 비교하면 절정의 폼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세계 정상급 레프트백 중 하나인 에브라.
우리 입장에서는 유의해서 지켜봐야 할...
터엉-
와우.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망설임 없이 때린 에브라의 스루패스가 라모스와 페페가 서 있는 공간을 교묘하게 통과하며 쑥 들어갔다.
“오프사이드잖아!”
페페의 외침이 민망하게 부심의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촤아악- 텁-
치차리토보다 반 발 앞서 몸을 날리며 공을 따내는 카시야스 주장.
휴우, 진짜 십 년 감수했다.
“야! 다들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챔피언스리그 결승이 장난이야?”
카시야스 주장이 공을 품은 채 일어나 몸에 묻은 잔디를 툭툭 털어내며 호통을 쳤다.
전문가들의 경기 전 예측이 무색할 정도로 질질 끌려다니는 모양새.
뒤에서 그 못난 꼴을 지켜보고 있는 주장은 얼마나 속이 타겠는가.
“집중 좀 하자, 얘들아!”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낸 주장이 공을 마르셀루 쪽으로 굴렸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안토니오 발렌시아를 슬쩍 제치자 이번엔 루니가 나타나서 슬라이딩 태클로 공을 걷어냈다.
맨유 녀석들 게임 플랜 한 번 확실하다.
원래 이렇게 앞뒤 안 보고 달려드는 친구들을 상대할 때는, 실점하지 않는 선에서 체력만 살살 빼놓고 후반전을 보는 게 속 편한 방법이다.
그런데 골 같지도 않은 골을 먹어 버렸으니, 초장부터 스텝이 제대로 꼬였다.
공 줄 곳을 찾던 마르셀루가 라모스에게 스로인.
오늘 약이라도 거하게 빨고 나왔는지 지칠 줄을 모르는 루니가 곧장 붙었다.
뻐어엉-
그래.
거기서 어설프게 키핑하려다 뺏기느니 그냥 앞으로 뻥 지르는 게 속 편하지.
어어?
“이런 시발!”
우리의 방심으로 한 골 넣은 게 미안해서였을까.
라모스가 아무렇게나 차낸 볼을 끊겠다고 달려나갔던 비디치가, 낙하지점을 완벽하게 잘못 잡으면서 엉뚱한 곳에서 점프를 했다.
비디치를 휙 넘어 바닥에 떨어진 후 높이 튀어 오르는 공.
가만 있던 나는 순간적으로 페널티박스에서 프리한 찬스를 맞았다.
“정백강 잡아!”
비디치의 간절한 외침에 호응한 센터백 파트너 리오 퍼디난드가 옆에서 커버를 들어왔다.
자, 침착하자.
공은 사람보다 빠르니까.
투웅-
오른발등으로 띄워 찬 공이 퍼디난드의 키를 훌쩍 넘었다.
역동작에 제대로 걸린 퍼디난드가 황급히 몸을 돌렸으나 나의 후속 대시가 더 빨랐다.
이 순간 퍼디난드의 얼굴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파울로 끊고 PK로 승부를 볼까?’
‘그냥 내버려 둬야 하나?’
고민 끝에 퍼디난드가 내린 결론은 수문장 반 데 사르를 한 번 믿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공중을 날았고, 퍼디난드는 양팔을 내린 채 멍하니 지켜보았다.
난드 형, 잘한 거예요.
반칙했다가 퇴장이라도 나오면 정말 게임 끝이니까요.
그래도 일단 골은 넣을게요.
투콰앙-
훌륭한 공격수의 덕목 첫 번째.
찾아온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 것.
퍼디난드의 믿음은 무참히도 빗나갔다.
내 이마에 맞은 공이 굉음을 내며 날아가 그물을 출렁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실수로 헌납한 골은, 실수로 갚아줘야 제맛.
전반 22분.
2011년도 빅 이어의 향방이 다시 오리무중에 빠졌다.
* * *
“이제 좀 몸이 풀렸냐?”
“네, 형. 헤헤... 감사합니다.”
1-1 상황에서 맞은 하프타임.
내 동점골 덕분에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벗은 더브라위너가 수줍게 웃었다.
“감독님 말씀대로 역시 쉽지 않네요.”
카시야스 주장이 장갑을 벗으며 중얼거리자 무리뉴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치곤 표정이 밝은데?”
“뭐, 저는 경험이 많으니까요.”
크... 이게 스웨그지.
한 번 들기도 힘들다는 챔스 트로피를 이미 두 번 들었던 사나이가 바로 이케르 카시야스다.
“선배님! 너무 멋있습니다! 존경합니다!”
더브라위너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부 작렬.
“입에 발린 말은 됐고, 축구나 좀 잘해라.”
카시야스 주장이 가볍게 받아치자 다들 빵 터졌다.
특히 아자르는 너무 웃겨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기어이 더브라위너한테 발로 차였다.
라커룸 분위기는 최상.
동점 상황이지만 왠지 절대 지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느껴졌다.
이런 긍정적인 상황을 만든 건 역시,
“우리 백강, 정말 너무 든든하단 말이지.”
아르벨로아의 말마따나 바로 이 몸이었다.
기운차게 후반전 출발.
우리는 선발 라인업 그대로, 맨유에서는 긱스가 빠지고 폴 스콜스가 나왔다.
노장을 노장으로 대체한 셈이었다.
두 명의 레전드에게는 박수를 보내 마땅하겠으나(물론 개인사는 빼고), 반대로 맨유의 현 상황을 한눈에 보여주는 교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중원 세대교체에 실패했다는 의미였으니.
킥오프.
맨유는 ‘노빠꾸 압박’을 계속 가했으나 우리 팀 선수들은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모습이었다.
체력 문제인지 몰아붙이는 기세도 전반 같지 않았고 말이다.
툭- 타악-
라모스가 알론소와의 2대 1 패스를 통해 루니와 치차리토를 동시에 바보로 만들며 시원스럽게 치고 나갔다.
‘이게 스페인의 기술 축구야’라고 외치는 듯한 멋진 플레이.
“여기요!”
완전히 페이스를 찾은 더브라위너가 공간을 찾아 들어가며 동시에 전진.
양쪽 측면의 벤제마와 아자르도 달리기 시작했다.
후방에서는 마르셀루까지 오버래핑하며 합세.
“일단 다 빠져! 뒤쪽에서 막자!”
스콜스의 지시에 따라 물러나면서 저지선을 형성하려는 맨유 녀석들.
이 빈틈을 라모스가 놓치지 않았다.
당연히 어딘가로 패스를 뿌릴 거라는 예상을 보기 좋게 깨부수며 기습적인 단독 드리블로 하프라인을 넘어섰다.
상대 입장에서는 멘붕 그 자체인 돌발 행동이었다.
“막아!”
스콜스와 마이클 캐릭이 공을 노리며 태클 들어가는 순간,
오오오오-
쪽수가 밀리는 가운데서도 분투 중인 우리 응원단에서 탄성이 터졌다.
왼발 안쪽으로 공을 툭 쳐서 오른발에 붙인 후, 그대로 감각적인 노룩 힐패스.
뒤에도 눈이 달린 건지, 알론소가 따라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준 패스였다.
와아아아-
라모스의 환상적인 플레이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일까.
알론소가 왜 자신이 월드클래스인지를 증명했다.
대지를 가르며 날아간 원터치 로빙 스루패스가 쇄도하던 벤제마에게로 정확하게 연결되었다.
우와아악-
뭐야, 다들 미쳤어? 왜 이래?
알론소의 패스도 기가 막혔지만 벤제마의 왼발 트래핑 역시 예술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와 프랑스의 대선배인 지네딘 지단을 연상시키는, 공이 발에 와서 착 붙는 느낌의 볼 컨트롤.
고려청자를 던져도 무사히 받을 것만 같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축구에도 예술 점수가 있다면, 라모스-알론소-벤제마에게 모두 10점 만점을 줘도 무방할 장면들이 연이어 나왔다.
그러나.
아무리 멋진 플레이를 해도 골을 못 넣으면 말짱 도루묵인 법.
이젠 내가 나서서 방점을 찍어줄 차례다.
제마야, 크로스 하나 찔러봐라.
“백강!”
그렇지, 바로 그거다.
비디치의 끈질긴 방해를 뿌리치며 도약하는 순간, 갑자기 2008년도 FA컵에서 결승골을 넣던 순간이 생각났다.
유럽 진출 후 첫 번째 우승, 그리고 두 번째 트레블을 이곳에서 기록하는 셈인가.
웸블리, 너 좀 마음에 든다.
콰아앙-
반 데 사르가 긴 팔을 쭉 뻗으며 몸을 날렸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철썩-
Gran Cabeza!!!
Gran Cabeza!!!!!!
잉글랜드의 축구 성지에서,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를 연호하는 함성이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