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시간이 지날수록 웸블리 스타디움을 찾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나의 역전골 이후 경기는 완연한 우리의 페이스.
맨유 선수들이 끝까지 사력을 다하며 싸웠지만, 기본적으로 전력 차가 나는 건 사실이었다.
후반 34분, 나의 헤더 패스를 받은 벤제마가 쐐기골을 넣으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최종 스코어는 3-1.
일방적이었던 경기력에 비하면 오히려 점수 차가 적게 났다고도 볼 수 있었다.
삑- 삑- 삑-
웸블리 스타디움에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는 맨유 선수들과,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누는 우리 팀 선수들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씨발! 씨이이이발!”
우와, 세상에나.
살다살다 페페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코파 델 레이 먹었을 때도, 라리가 우승 확정했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새삼 느낀다.
챔피언스리그가 정말 특별한 대회라는 사실을.
“임마, 울긴 왜 우냐?”
영혼의 콤비 라모스가 페페를 다독였다.
정작 본인의 눈가도 새빨개졌으면서 말이다.
“혀엉!”
벨기에 2인방은 쪼르르 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잘했다, 얘들아. 정말 잘했어.”
카카가 부상 이후 완전히 무너지고 호날두가 깽판을 치기 시작했을 때, 더브라위너와 아자르가 그 빈자리를 기대 이상으로 메워주지 않았다면?
그래도 트로피 하나는 어찌어찌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트레블이라는 위업은 죽었다 깨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녀석 모두 이제 겨우 스무 살 남짓임을 상기하면, 레알 마드리드의 미래는 아주 창창하다.
저 멀리서는 ‘3회 우승자’끼리 서로 격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무리뉴 감독과 카시야스 주장이었다.
한때 심한 갈등을 겪었던 두 사람이기에, 그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형! 어디 가요?”
나는 자꾸 엉기는 벨기에 듀오를 잠시 밀쳐놓은 뒤, 박지승 선배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패배를 믿을 수 없는 듯 망연자실해 있던 지승 선배가, 나를 보더니 아주 엷은 미소를 띠었다.
내가 미안해 할까봐 그러는 거겠지.
정말 존경할 수밖에 없는 선배다.
“고생하셨습니다.”
“너도.”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대한민국이 낳은 두 명의 축구 스타가 뜨겁게 포옹했다.
* * *
[레알 마드리드, 2010-2011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
[통산 10번째 빅 이어로로 라 데시마(La Décima) 숙원 풀다]
[완벽했던 1년... 구단 역사상 첫 트레블 달성]
1902년 창단 이래 100년이 훌쩍 넘는 기간이 흘렀지만, 레알 마드리드라는 이름이 이렇게 빛났던 시즌은 없었다.
밀라노에서 날아온 두 명의 귀인(貴人), 나와 무리뉴 감독이 중심이 되어 이뤄낸 쾌거.
- 2년 연속 트레블이라니 ㅎㄷㄷ하다 진짜
- 정백갓과 갓리뉴가 함께 하니 막을 수가 없네
- 페레즈 회장도 갓 라인에 껴줘 ㅋㅋㅋ 두 명 다 데려온 게 미친 판단이었음
- 지금 보니 정백강 2억 유로도 개싸게 산 거 아님?? 당시에 오버페이라고 지랄하던 놈들 다 어디 감??
- 그러니까 ㅋㅋㅋㅋ 앞으로 몇 년 더 해먹을 거 생각하면 저렴했지 ㅋㅋㅋ
- 솔직히 다음 시즌에도 레알 막을 팀 안 보이는데...
- 시즌 중에 서로 싸우고 비난하고 별 난리를 했는데 트레블 ㅋㅋㅋ 진짜 누가 막냐
- 그나마 바르샤? 진짜 안 보이긴 한다 ㅋㅋ
- 바르샤는 이번 시즌 너무 개발려서 ㅋㅋㅋ 그래도 한 팀만 꼽으라면 바르샤 인정…
한국뿐만 아니라 성질 급한 전 세계 축구팬들의 관심사는 벌써 다음 시즌 향방으로 넘어갔다.
우리 팀이 이번만큼 압도적인 모습을 또 보여줄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날 것이냐.
이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거의 정확하게 반반으로 갈렸다.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우리 팀의 축구 스타일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바르셀로나처럼 점유율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도르트문트처럼 전방 압박에 목숨을 거는 것도 아니며, 역습이 바탕이지만 지공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무색무취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성적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약점이 없는 팀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팀 레전드 선수이자 세계적인 명장이기도 한 비센테 델 보스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역시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고 두 번의 빅 이어를 들어올렸지만, 현재의 레알만큼 강력하진 못했다. 압도적인 세계 최고의 선수 정백강이 레알에 있고, 주제 무리뉴 역시 뛰어난 감독이다. 아마 이변이 없는 한 다음 시즌에도 챔피언스리그는 레알의 품에 들어갈 것이다.”
반면 회의적으로 보는 쪽은 역사를 논했다.
유럽 챔피언 자리를 유지하는 건 절대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챔피언스리그를 2년 연속으로 차지한 건 1989~1990년의 밀란이 마지막이었다.
당시 밀란은 프랑코 바레시, 파올로 말디니,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 마르코 반 바스텐 등 역대급 선수들을 한 트럭 보유하고 있었던 전설적인 팀.
해당 시기에 밀란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2연패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카를로 안첼로티는 델 보스케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2연패는 정말 어려운 과제다. 과연 올해만큼 동기부여가 될 것이냐도 문제고, 경쟁 팀들도 오프시즌 동안 치열하게 분석할 테니까. 정백강이 워낙 뛰어나서 그렇지, 내가 뛰었던 밀란과 비교해보면 스쿼드 자체에도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다.”
다만 안첼로티 감독은 다음과 같이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수는 있다. 정백강이다. 포츠머스 시절과 비교하면 인테르의 정백강은 훨씬 강력한 선수가 되었었다.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레알 이적 후에는 인테르 때보다도 더 멋진 활약을 보였다. 스페인 생활 2년차를 맞아 혹시라도 지금보다 더 발전한다면? 그러면 2연패가 아니라 3연패도 가능하겠지.”
* * *
“최근 몇 년간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쉬다 갈 예정입니다.”
인천공항을 가득 메운 취재진 앞에서 밝힌 나의 입국 소감이었다.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휴식이 간절했다.
스폰서에서 주최하는 대형 팬미팅 하나 빼곤 다른 일정은 전혀 잡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래봐야 고작 3주 남짓이었다.
우리 팀의 미국 투어가 잡혀 있어서 6월 말에는 미국 LA로 떠나야만 했다.
귀중한 3주 동안 그동안 못했던 아들 노릇, 남자친구 노릇을 좀 할 생각이었다.
나연과의 열애가 알려지면서 한층 집요해진 취재진을 뚫고 홈 스위트 홈에 도착했다.
<백강분식>에 갈까 했는데, 거기도 기자들이 귀찮게 할 확률이 높았다.
제아무리 독한 놈들이라도 집안까지 쫓아오진 못할 테니까 집이 가장 안전했다.
엄마도 나연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시각.
역시 만만한 건 그 녀석인가.
어차피 할 말도 있고.
- 석중아, 나 한국 왔어.
- 알어.
- 뭐하냐?
- 공부하지.
- 공부? 무슨 공부?
- 나 취업준비생이야 임마.
- 공부한다는 녀석이 왜 이리 답장이 빨라?
- 잠깐 쉬는데 연락이 온 거야.
가증스러운 녀석 같으니라구.
딱 보니 그냥 누워 있었구만 뭘.
- 놀아줘.
- 공부해야 된다니까?
- 일단 와봐.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할게.
-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뭔데?
- 그건, 오면 들려줄게. 너한테 좋은 얘기야.
- 수상한데?
- 아 그냥 쫌 와!!!
챔피언스리그에서 골 넣는 것보다 김석중 꼬시는 게 백 배는 더 힘들다.
띵동-
이 스피드는 또 뭐여?
한 10분 지났나?
자기도 심심했으면서 빼기는.
“어서 와라.”
“좋은 얘기라는 게 뭔데?”
“성질도 급하셔라. 일단 한 잔 해.”
“나 아무 것도 안 사왔는데?”
“우리 김영순 여사님이 벌써 다 준비해 놓으셨더라.”
잠시 후, 부글부글 끓는 불고기 전골 냄비를 앞에 두고 불알친구 두 명이 마주앉았다.
“짠!”
크으, 이거지.
목구멍을 통과하는 소주의 알싸한 느낌.
비로소 한국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엄마 음식 솜씨는 뭐 두 말할 나위가 없고.
“자, 이제 얘기해 봐.”
“좀 하기 민망한 말이라서. 딱 한 잔만 더 하고 말할게.”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술잔.
석중이가 화끈하게 원샷 때리고 잔을 내려놓는 걸 확인한 내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두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고마웠다고. 우리 엄마 일 말이야. 지난번에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고맙다는 말을 못한 게 마음에 걸렸어.”
“쓸데없는… 너희 어머니는 나한테도 친엄마나 다름없는 분이야. 뭘 대단한 걸 했다고.”
“에이,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정말 고맙다.”
“그래. 알았다, 임마. 그러면 두 번째는 뭐야?”
“사실 그게 본론인데 말이지.”
나는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계획을 석중에게 말했다.
“나 말이야. 자선 재단을 하나 만들려고 해.”
“자선 재단?”
“응. 나처럼 편모 편부 가정에서 어렵게 자라는 아이들 지원하는 재단 말이야.”
이 생각을 처음 하기 시작한 건 인테르 때였다.
더 정확히는 패션계 거물 미켈레 시빌로티가 주최하는 자선 패션쇼에 모델로 선 이후부터였고.
당시 너무 파격적인 의상 때문에 비웃음을 받고 흑역사를 남기긴 했지만, 아이들을 위한다는 시빌로티 씨의 마음만큼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한 번 머릿속에 움트기 시작한 생각은 뿌리를 내리고 점점 구체화되었다.
어차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데, 이 돈 쌓아놨다가 무덤에 같이 묻을 것도 아니고 말이지.
집 사고 차 사는 것도 좋지만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돈을 쓰고 싶었다.
“이야… 백강이 너 좀 멋있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나는 원래 멋있어. 너 빼고 다 알아. 하여튼 그래서 말인데, 너 그 재단에서 일할 생각 없냐? 월급은 아쉽지 않게 줄게.”
“내가?”
“응, 네가.”
이게 바로 내가 얘기했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석중이가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소주 한 잔을 혼자 들이켰다.
“너무 갑작스럽나? 천천히 고민해 봐, 짜식아. 예스인지 노인지는 나중에 알려줘도 되니까.”
내가 잔을 채워주면서 덧붙였다.
한참 동안 말없이 생각하던 석중이가 비로소 대답했다.
“다 좋은데 말이야.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뭔데?”
“너, 나 취업준비하는 거 아니까 도와주려고 이 일 꾸민 거 아니야?”
김석중 이 녀석, 평소엔 둔한데 이럴 때는 쓸데없이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
그러나 이미 예상했던 반응 중 하나일 뿐.
나는 이미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마음이 0.0001%도 없다곤 하지 않겠어. 근데 생각해 봐라. 내가 이 재단에 쓸 돈이 못해도 수십 억은 될 텐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한테 다 맡기고 외국에 나가 있으면 어디 불안해서 살겠냐? 나도 보험은 있어야지. 그래서 내가 제일 믿을 수 있는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나랑 가까운 사람이 딱 버티고 있으면 나쁜 마음 먹은 사람들도 함부로 이상한 짓은 못할 거 아니야. 안 그래?”
숨도 안 쉬고 내뱉은 다음에 소주로 목을 축였다.
유럽 3개국 유학(?)을 거친 나의 현란한 혓바닥 신공에 완전히 말린 석중이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할게.”
“잘 생각했어 짜샤. 부딪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