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약 5분 뒤에 도착합니다.”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승객들이 슬슬 내릴 준비를 했다.
승객이라고 해 봐야 고작 세 명이었지만 말이다.
나, 엄마, 그리고 나연까지.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제일 잘한 쇼핑 중 하나가 전용기를 구입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쓰고 다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편한 일인지, 회귀 전엔 미처 몰랐다.
“엄마, 슬슬 내릴 준비 하세요.”
오늘 여행이 성사되기까지 가장 큰 걸림돌은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 정백강도 아니고, GBS의 간판 아나운서 최나연도 아니었다.
<백강분식> 사장님이신 우리 김영순 여사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원래 최소한 동남아 정도는 갈 계획이었으나, 가게를 오래 쉴 수 없다는 엄마의 철칙에 의해 최종적으로 낙찰된 곳은,
“제주도는 정말 오랜만에 와 봐요, 어머님.”
아들이 1년에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인데 제주도라니.
하지만 여기엔 저항할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
- 네 아빠랑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갔었어. 이제 아들하고 또 한 번 가봤으면 소원이 없겠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말리겠는가.
어차피 엄마를 위해 계획한 여행이니, 100% 엄마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비행기가 널따란 활주로를 따라 천천히 착륙했다.
“엄마, 가방 나한테 주세요.”
“됐어 아들. 나연이 거나 좀 들어줘.”
“어머님. 저 힘 엄청 세요. 괜찮아요.”
내리기 전에도 가방 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세상 훈훈한 모습이긴 하지만 이러다간 출발을 못할 것 같아, 내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에이! 그냥 둘 다 저한테 주세요. 운동선수 아들 뒀다 뭐에 써요?”
거의 뺏다시피 두 여인의 캐리어를 낚아채고는 성큼성큼 내렸다.
아… 평소에 팔 운동 좀 열심히 할걸.
2박 3일 일정인데 뭘 이렇게 챙겨오셨담?
다행히 이두박근에 경련이 올 때쯤 호텔에서 보내 준 리무진 앞에 도착했다.
“세상에 이런 큰 차가 다 있다니. 테레비에선 많이 봤다만 실제로 보니까 훨씬 길쭉하네.”
엄마가 리무진의 모양새가 신기한 듯 감탄을 연발했다.
“엄마는 비행기보다 리무진이 신기하세요?”
“우리 아들이 뭘 모르는구나. 비행기는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오히려 덜 신기해.”
오호, 듣고 보니 그럴 듯한 논리다.
“타요, 엄마. 일단 호텔에 짐 풀고 좀 쉬었다가 움직이면 될 것 같아요.”
창밖으로 보이는 제주도의 6월 풍광은 아름다웠다.
뭐, 막상 오니 좋긴 하네.
하긴, 1년 중에 한국에 있는 기간이 3개월이 채 안 되는데 굳이 외국 여행을 가는 것도 우습다.
결론적으로 제주도는 굿 초이스였나.
“어머님, 이것 좀 드세요.”
옆에서는 나연이 엄마에게 뒷좌석 스낵바에 있는 간식거리들을 챙겨주고 있었다.
왜 김영순 여사가 “아들보다 낫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지 알 것 같다.
같이 와준 나연에게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고.
그러나 갈등 요소는 아직 남아 있었다.
“내가 혼자 써야지. 너희 둘 오랜만에 보는 거잖니.”
“어머님도 마찬가지시잖아요. 제가 방 혼자 쓸게요. 백강 씨랑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방 2개를 예약했는데, 서로 나랑 방을 쓰라고 배려해주는 통에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 나연이랑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그냥 제가 혼자 쓸게요. 그럼 되겠네요.”
나의 희생(?)으로 극적 타결.
실제 모자보다 더 모녀 같은 두 사람 때문에 죽겄다, 죽겄어.
* * *
내가 한국에서 간만에 휴식을 취하는 동안, 여름 이적시장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팀은 예상대로 만수르 구단주를 등에 업은 맨체스터 시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세르히오 아게로를 영입하더니, 아스널에서 레프트백 가엘 클리시와 미드필더 사미르 나스리를 데려왔다.
이 세 명의 선수 영입에 들어간 돈만 거의 8천만 유로 가량 됐다.
그러나 만수르의 투자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마침내 우리 팀에 오퍼가 들어왔다.
이적 명단에 오른 호날두를 영입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 입장에선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호날두의 이적이야 이미 확정된 사안이었고, 맨시티는 우리에게 막대한 이적료를 안겨줄 수 있는 팀이었으니까 말이다.
한국에서 ‘초갑부’의 대명사처럼 된 만수르 구단주의 무지막지한 투자는 2010-2011 시즌 FA컵 우승으로 그 결실을 맺었다.
맨시티가 모든 대회 통틀어 41년 만에 차지한 트로피였다.
호날두는 이제 FA컵보다 더 높은 무대를 바라봐야 할 맨시티에게 가장 좋은 매물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세상사는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갑자기 바르셀로나가 눈치 없이 영입전에 끼어든 것이다.
당시에는 모두가 놀랐으며, 시간이 좀 지난 후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행보였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바르셀로나 수뇌부는 2010-2011 시즌 결과에 대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최소 몇 년 동안은 유럽을 호령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무관에 그쳐 버렸으니 말이다.
게다가 최대 라이벌의 트레블까지 지켜봐야 하지 않았던가.
지난 시즌을 찬찬히 복기해 본 수뇌부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스쿼드로는 레알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백강이라는 괴물을 상대해야 하는 바르셀로나 입장에서는 아무나 영입할 수 없었다.
큰 무대에서 실력이 검증된 ‘초 S급 선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가 처음으로 찍은 타깃은 아스널의 주장 세스크 파브레가스.
이미 EPL 정상급 미드필더로 인정받고 있는 파브레가스는 바르셀로나의 기준을 충족시킬 만한 선수였다.
또 선수 본인이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이기도 하고, 팀에 대한 애정도 컸기에 영입이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아스널 팬들이야 피눈물을 흘려야 했지만…
결국 3400만 유로에 파브레가스를 데려오는 데 성공.
사비의 말마따나 ‘DNA’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중원 보강을 마친 바르셀로나는, 멈추지 않고 공격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메시, 비야, 페드로로 구성된 소위 ‘MVP’ 라인은 물론 강력했으나, 결과적으로 시즌이 끝나고 보니 셋이서 정백강 하나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비야나 페드로보다 확실하게 클래스가 높은 선수.
거기에 레알과 무리뉴, 그리고 정백강에게 강한 적개심까지 품고 있는 선수.
호날두는 여러모로 바르셀로나에게 딱 들어맞는 먹잇감이었다.
이렇게 호날두를 두고 ‘바르셀로나 VS 맨시티’의 영입전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바르셀로나 역시 세계적인 빅 클럽이지만, 돈으로 만수르에 맞선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때문에 녀석들은 이적료나 돈 대신 다른 측면에서 접근했다.
- 네가 맨시티에 간다면 EPL 정도는 우승할 수 있겠지. 그러나 과연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할 수 있을까? 그곳은 아직 시간이 필요한 팀이야. 하지만 우리 바르셀로나는 어떻지? 너만 오면 바로 유럽 정상을 노릴 수 있어. 네가 싫어하는 레알 마드리드의 유일한 대항마가 바로 우리라고. 어때, 끌리지 않아?
색안경을 벗고 보면 옳은 말이긴 했다.
맨시티가 폭풍 영입을 했다지만 단기간에 너무 많은 선수가 바뀌다보니, 조직력을 끌어올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전반적인 선수들의 클래스도 아직까지는 바르셀로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어떻게든 실추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해야 하는 호날두에게 바르셀로나의 유혹은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맨시티의 매력은 돈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어차피 호날두 녀석도 돈은 벌 만큼 벌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나와 그랬던 것처럼, 메시와도 충돌하면 어쩌나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이건 당사자인 메시가 직접 나서서 못을 박았다.
“호날두와 함께 뛰는 건 환상적인 일이 될 것이다. 때로는 그가 주연이 될 거고, 또 어떤 때는 그가 나를 도와주기도 하겠지. 팀의 1인자가 누군가 하는 논쟁에는 관심 없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승리뿐이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바르셀로나의 상징적인 선수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호날두 마음 속의 저울추가 급격하게 기울어 버렸다.
영입 성공을 확신하고 있던 맨시티는 뒤통수를 맞은 격.
당황스러운 건 우리 팀도 마찬가지였다.
아틀레티코 정도만 돼도 난리 부르스가 났을 텐데, 상대는 그보다 더 심한 바르셀로나였다.
호날두가 기어이 바르셀로나로 가겠다고 선언하면서, 구단 내부에서는 세 가지 선택지를 놓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1. 미쳤어? 호날두 같은 월드클래스 포워드를 최대 라이벌에게 보낸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무리뉴 감독이 먼저 손을 내밀어서 잔류시키고, 다음 시즌부터는 제대로 활용하자. 지금 바르셀로나에 호날두까지 합류하면 너무 위험해.
2. 아니지. 팀보다 위대한 선수가 되려고 했던 녀석이야. 회복될 기미가 보이는 사이도 아니고, 이미 팀에서 마음도 떠났잖아. 그냥 바르셀로나로 보내고, 대신 이적료를 톡톡히 뜯어내자. 그 돈으로 다른 좋은 선수 영입하면 돼.
3. 일단 팀에 잔류시켜. 대신 케미스트리를 해칠 우려가 있으니 출전은 시키지 말자. 지난 시즌처럼 하는 거야. 바르셀로나에 보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이 중에서 세 번째 안은 현실성이 부족했다.
호날두는 나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많은 주급을 받는 ‘돈 먹는 하마’ 같은 녀석이라 너무 부담이 컸다.
결국에는 양자택일이었다.
무리뉴 감독이 먼저 숙이느냐, 아니면 쿨하게 보내버리느냐.
그러나 자존심 빼면 시체인 무리뉴에게 명분도 없는 사과를 바라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렇게 ‘세기의 이적’이 성사되었다.
이적료는 1억 유로였다.
사올 때 9400만 유로였으니, 물가 상승률 감안하면 원금 회수 정도는 한 셈이었다.
만약 맨시티에게 팔았으면 1억 5천만 유로까지 가능했을 거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어떤 선수인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이적 후 신이 나서 떠들 줄 알았던 호날두는 의외로 진중하게 소감을 밝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한 녀석 아니겠는가.
클래스를 생각하면 새로운 팀에 적응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게 축구 게임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희대의 조합 ‘메날두’가 탄생했다.
여기에 비야까지.
스페인, 아르헨티나, 포르투갈의 에이스가 모두 한 팀에 모이게 된 것도 정말 진풍경이었다.
이 사기적인 공격진에게 패스를 공급하는 게 사비, 이니에스타, 파브레가스라니…
바르셀로나 팬들은 자신들이 봐도 말이 안 되는 라인업에 한껏 고무되어, ‘다음 시즌 빅 이어는 우리 것’이라며 부르짖었다.
물론 공은 둥글고 뚜껑은 열어봐야 알 수 있는 법이지만, 2년 연속 트레블을 노리는 우리 팀에 최대의 경쟁자가 생긴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