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40화 (141/176)

140화

LA 갤럭시, 과달라하라, 그리고 필라델피아 유니온까지.

훈련 사이사이에 지속적으로 진행된 미국 투어를 전승으로 마치고 유럽으로 건너올 때쯤, 드디어 오피셜이 떴다.

[토트넘 미드필더 루카 모드리치, 레알 마드리드 이적 확정]

[이적료 3500만 유로 추정… 중원에 힘 실은 레알]

우리 돈으로 약 530억 원 정도에 모드리치급의 미드필더를 데려오다니.

물론 이 시기에는 모드리치의 포텐이 다 터지기 전이긴 했지만,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한 금액이었다.

페레즈 회장의 장사 수완을 또 한 번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고.

“세계 최고의 클럽에 입단하게 되어 영광이다. 축구를 시작하면서부터 늘 이 순간을 꿈꿔 왔다. 지금 내 소원은 하루라도 빨리 필드 위에서 흰색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하는 것이다.”

‘하얀 사자 군단’의 일원이 된 모드리치는 매우 정석적인 입단 소감을 밝혔다.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떠나는 이도 생기는 법.

지난 시즌 주전 경쟁에서 밀렸던 페르난도 가고는, 모드리치까지 팀에 합류하자 완전히 자리를 잃어버렸다.

중원 보강이 필요했던 로마가 눈치 보다 잽싸게 임대 제안을 먼저 해왔고, 경기가 고팠던 가고와 주급을 아끼고 싶었던 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일사천리로 임대가 확정되었다.

가고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차후에라도 레알에서 자리를 잡기는 힘들어 보였다.

알틴톱, 카예혼, 바란에 이어 모드리치까지 벌써 4명의 선수를 영입한 상황.

그러나 팀에는 여전히 5000만 유로에 달하는 순 이적자금이 남아 있었다.

이 모든 돈이 호날두의 유산.

추가적으로 영입을 할 것이냐, 아니면 미래를 위해 비축해 놓고 때를 기다릴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무리뉴 감독은 ‘’STOP’을 외쳤다.

“우리는 이미 트레블을 이뤘던 팀이다.현재 스쿼드로도 충분하다. 지나친 영입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뭐,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 볼 순 없었지만 바르셀로나가 워낙 미친 수준의 보강을 했기 때문에 약간의 우려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리뉴 감독의 선언과 함께 2011-2012 시즌을 치룰 주요 로테이션 멤버는 대략 아래와 같이 확정되었다.

GK : 이케르 카시야스, 안토니오 아단

DF : 세르히오 라모스, 페페, 알바로 아르벨로아, 마르셀루, 라울 알비올, 라파엘 바란, 나초 페르난데스

MF : 사비 알론소, 루카 모드리치, 케빈 더브라위너, 카카, 라사나 디아라, 하밋 알틴톱, 에스테반 그라네로

FW : 정백강, 카림 벤제마, 에덴 아자르, 호세 카예혼, 헤세 로드리게스, 호셀루.

* * *

2011년 8월 6일, 톈진 테다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우리 팀의 중국 투어가 모두 끝났다.

아울러 길고 길었던 프리시즌 일정도 마무리되었다.

지난 시즌 출전한 모든 대회를 마지막까지 치르며 강행군을 펼쳤던 우리 선수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대륙을 넘나드느라 휴식을 거의 취하지 못한 건 약간의 찜찜함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인기 구단의 숙명 아니겠는가.

막대한 주급이 땅 파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쨌든 이제 본격적으로 새로운 시즌을 준비해야 할 때.

우리 팀의 2011-2012 시즌 첫 공식 경기 상대는 지긋지긋한 바르셀로나였다.

무대는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직전 시즌 라리가 우승팀과 코파 델 레이 우승팀이 맞붙는 대회였다.

올해 같은 경우는 우리가 두 대회를 싹쓸이했기 때문에, 코파 준우승팀인 바르셀로나가 상대로 결정되었다.

수페르코파는 트로피가 걸려 있긴 하지만, 굳이 따지면 일종의 이벤트성 대회.

어지간한 상대였으면 조금 힘을 뺄 만도 했으나, 하필이면 엘클라시코였다.

지난 시즌 무관에 그치면서 나온 무수한 경질설을 일축하며 생존에 성공한 펩 과르디올라 감독은 이번 수페르코파에 대해 다음과 임전 소감을 밝혔다.

“리가, 코파, 그리고 챔피언스리그. 시즌 말미의 높은 무대에서 우리 두 팀은 반드시 만날 것이다. 어쩌면 여러 번. 그렇게 생각할 때 수페르코파는 긴 전쟁의 첫 번째 전투라고 볼 수 있다. 반드시 기선제압을 하겠다.”

엘클라시코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호날두는 이번에도 말을 아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경기장에서 보여주겠다.”

얘가 이적하더니 철이 든 건지, 아니면 콘셉트를 바꾼 건지.

그것도 아니면 일단 이기고 나서 예전처럼 입을 털 생각인지.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어쩐지 쌔한 기분이 들었다.

“저들이 지난 시즌보다 강력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주 흥미로운 경기가 될 것이다. 결과는… 마드리드 팬들의 뜻대로 되겠지.”

이미 트레블을 통해 서열 정리(?)를 끝낸 무리뉴 감독은, 과르디올라 감독에 비해 덜 비장하고 더 여유로운 인터뷰를 했다.

마지막으로 세계 축구의 정점에 있는 나는…

“180분 동안 재밌게 즐기겠다. 엘클라시코만큼 즐거운 경기도 없으니까.”

* * *

2011년 8월 14일.

챔스 토너먼트와 마찬가지로 홈 & 어웨이로 결판을 내는 수페르코파 1차전이 열리는 날.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일찌감치 만원 사례였다.

따지고 보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부터 오늘까지 지나간 시간은 3개월이 채 되지 않았다.

선수들에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그러나 팬들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을 3개월.

오프시즌 동안의 성과를 보여줄 첫 시험대이자, 최대 라이벌과의 매치업이었으니 관심도는 어마어마했다.

양 팀 선발 라인업은 미리 공개되었다.

바르셀로나는 당연히 메시-호날두-비야, 속칭 ‘LCD’ 3톱을 최전방에 배치했다.

호날두와 함께 야심차게 영입한 파브레가스는… 벤치 에서 스타트.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고 있는 부스케츠는 아예 롤이 다르니까 논외로 하고, 사비나 이니에스타 중 하나를 밀어낸다는 건 천하의 파브레가스에게도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영입 소식을 들었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상대하려니까,

“세긴 세네. 씨발.”

페페의 묵직한 한 마디가 모두의 심경을 대변해 주었다.

아무리 봐도 사기적인 라인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봐야 뭐. 별 거 있겠어?”

이 대담한 발언의 주인공은 오늘 엘클라시코 데뷔전을 치르는 모드리치였다.

외모만 봤을 때는 어딘지 소심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실제 성격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이적 이후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친구,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전쟁까지 겪었으니 어지간한 일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멘탈과 커다란 심장을 갖게 된 것이었다.

“루카 말이 옳다. 방심은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이지만, 미리 얼어서 들어가는 것도 그리 좋은 자세는 아니지.”

무리뉴 감독이 모드리치를 거들고 나섰다.

“다들, 챔피언의 위용을 보여주고 와라.”

“네! 감독님!”

* * *

어색하다, 어색해.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있는 호날두가 그렇게 생경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회귀 전에도, 후에도 보지 못했던 풍경.

아니, 보기는커녕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모습이다.

원래는 세계 축구의 1인자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어야 할 메시와 호날두가, 절대자 정백강을 쓰러뜨리기 위해 힘을 합쳤으니.

나의 존재가 참 많은 것들을 뒤흔들고 바꿔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팀 선배(?)인 비야가 7번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호날두는 9번 유니폼을 입었다.

하필이면 번호도 나와 겹친다.

레알 7번의 원래 주인인 라울은 내가 그 번호를 물려받길 바랐지만, 나의 플레이 스타일상 9번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 굳이 바꾸지 않았다.

이 소식에 가장 기뻐했던 건 아자르.

기다렸다는 듯 7번의 주인공이 되었다.

알고 보니 우리 팀에 이적할 때부터 꿈이었다고.

많은 팬들이 기대했을 경기 전 악수 타임은 별다른 일 없이 넘어갔다.

불과 몇 달 전까지 같은 팀에서 뛰던 녀석이지만,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피차간에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래도 다행히 악수 거부 같은 유치한 행동은 없었다.

그냥 딱 ‘남’을 보는 기분이었다.

한때는 제법 친했던 적도 있었는데 말이지.

인간 관계 쌓아봐야 부질없는 건 한국이나 스페인이나, 축구장 안이나 밖이나 똑같다.

우오오오오오-

엄청난 함성 속에서 원정팀 바르셀로나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우우우우우우-

그리고 함성이 야유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왼쪽 윙포워드로 나선 호날두가 사비의 패스를 받는 순간 거의 저주에 가까운 주파수를 내뿜는 관중들.

예전에 루이스 피구 형님이 바르셀로나에서 레알로 이적한 후에 캄 노우에 갔을 때는, 피 뚝뚝 떨어지는 돼지 머리가 날아오고 그랬다는데.

오늘 그런 불상사는 없을지 심히 걱정된다.

“내가 붙을게!”

알고 보면 담대한 사나이 모드리치가 호날두의 전진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토옥-

무리하지 않고 뒤로 공을 빼는 호날두.

이적이 확정된 후에 혹자는 호날두가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에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레알 마드리드가 둘 다 빠른 역습에 특화된 팀이라 호날두가 자신의 장점인 폭발적인 스피드를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의 평가였다.

맨유나 우리 팀 모두 각자의 리그에서 최강팀 중 하나 아니겠는가.

작정하고 잠그는 팀들의 밀집 수비를 깨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호날두는 그런 상황에서 리그 수위급의 득점력을 보여주었던 선수다.

이쯤에서 불변의 진리 하나 투척.

축구는 그냥 잘하는 놈이 잘하는 법이다.

터엉-

‘초특급 신입’ 기 살려주기의 일환일까.

이번엔 이니에스타의 패스가 왼쪽 측면으로 날아갔다.

바르셀로나 미드필더진이 경기 초반 호날두 쪽으로 볼을 몰아주는 느낌적인 느낌.

이번엔 호날두가 아까보다 보다 전진한 상태에서 공을 받아, 우리 중원에서 채 도움 수비를 가기 전에 아르벨로아를 상대하게 되었다.

옛 동료에게 자신있게 일대일을 걸어 오는 호날두.

현란한 스텝오버 이후 직선 돌파 모션을 취했다가, 왼발로 한 번 접으면서 오른발로 낮고 빠른 크로스를 올렸다.

두 가지 측면에서 놀라운 장면이었다.

하나, 동작이 전광석화처럼 빠르다는 것.

둘, 이렇게 쉽게 패스를 선택했다는 것.

파앙-

아르벨로아가 급히 왼발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크로스의 수취인은 타이밍 맞춰 쇄도하던 메시였다.

“막아!”

메시에게 페널티박스 안쪽에서 슈팅 길을 열어준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각도를 좁히고 나서는 라모스와 페페.

토옹-

아, 메시 이 괴물 같은 녀석.

그냥 받기도 만만찮은 스피드의 공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원터치 로빙 패스가 나올 줄이야.

뒤따라 들어오던 비야의 발 앞에 정확히 떨어지는 그림 같은 패스였다.

철썩-

천하의 카시야스 주장도 어쩌지 못한 완벽한 골.

마르셀루와 라모스가 황망히 손을 들어봤지만 주심의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LCD’ 3인방이 한 번씩 공을 만지며 득점까지 연결되는 과정이, 비록 적이지만 정말 환상적이었다.

골을 넣은 비야와 어시스트를 한 메시가 신이 나서 호날두를 향해 달려갔다.

경기장에 들어온 내내 굳은 표정이던 호날두가 처음으로 웃었다.

복수에 성공한 사람이 지을 법한, 조금은 뒤틀린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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