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42화 (143/176)

142화

“으… 이런 분위기구나…”

바란이 몸서리를 치며 덧붙였다.

“여기에 비하면 베르나베우는 조용한 거였네요.”

우리의 유망주 센터백을 떨게 만든 장소는 지긋지긋한 캄 노우.

오늘 2011년도 수페르코파의 주인이 가려지게 된다.

역지사지의 태도로 생각해 보면, 바르셀로나 녀석들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지겹겠지.

2차전에 대한 세간의 예상은 바르셀로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1차전에서 보여준 경기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데다가, 이번엔 홈 경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법.

우리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트레블 팀의 자존심이 있지, 시즌 초반부터 최대 라이벌한테 지고 시작하면 쓰겠는가.

그것도 트로피가 달린 승부에서 말이다.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하자.”

간결하면서도 듣는 사람을 뜨끔하게 만드는 무리뉴 감독의 주문이었다.

1차전 내용을 복기해보면 많이 부끄러웠던 게 사실.

홈에서 그렇게까지 발린 건 어떤 변명을 대더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

“오늘 진짜, 제대로 보여줄게.”

특히 많이 아쉬웠던 4백 라인의 리더 라모스가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투둑’ 소리를 냈다.

홈에서 세 골이나 허용했기 때문에, 오늘도 실점한다면 우승 가능성은 희박해지는 상황이었다.

공포의 ‘LCD’를 상대로 무실점을 한다는 건 힘든 도전이겠지만,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네가 추천해준 식당, 진짜 죽이더라.”

“그치? 내가 이래봬도 미식가라니까.”

“어디 말하는 거야? 나도 좀 알려줘!”

“이탈리아 요리를 끝내주게 하는 곳인데 말이지…”

경기장 입장 전.

나란히 서 있는 양 팀 선수단의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다.

우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닫은 채 대기하고 있는데, 바르셀로나 녀석들은 식당 얘기나 하고 있었으니.

만만히 보는 건가?

순간 열이 확 뻗치려고 하는 걸 꾹꾹 눌러 참았다.

흥분은 문제 해결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침착하자, 백강아.

쟤네한테 이탈리안 대신 빅엿을 먹여줘야지.

우오오오오-

마침내 입장이 시작되자 관중석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거, 되게 시끄럽네.”

상남자 모드리치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캄 노우에 오는 건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긴장한 기색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으… 진짜 싫어… 몇 번을 와도 적응이 안 되네.”

첫경험도 아닌 더브라위너와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오늘 무리뉴 감독은 1차전과 다른 중원 조합을 들고나왔다.

중앙 미드필더 한 자리를 공무원처럼 차지하고 있던 라스를 벤치에 앉히고, 대신 모드리치-더브라위너를 내보낸 것이다.

“골이 필요하니까.”

무리뉴 감독이 밝힌 이유는 단순했으나, 사실은 굉장한 전술적 모험이었다.

그동안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에 대항하는 데 라스의 활동량과 수비력이 큰 역할을 해왔기 때문.

수비가 약화된 만큼, 두 사람이 공격에서 반드시 제몫을 해줘야만 했다.

“자! 한바탕 놀아볼까!”

라모스의 시그니처 대사와 함께 수페르코파 2차전의 막이 올랐다.

“온다!”

휘슬과 동시에 강력한 프레스를 걸어 오는 바르셀로나 녀석들.

아예 초반에 승부를 낼 기세였다.

그 서슬에 살짝 눌린 알론소가 일단 뒤쪽으로 공을 돌렸다.

우오오-

오늘 뭔가 제대로 보여주겠다던 라모스가 과감한 단독 드리블로 비야의 압박을 뚫어냈다.

그리고 모드리치에게 전진 패스.

1차전에서는 생각보다 두드러지지 않았던 모드리치.

그러나 그 경기는 데뷔전이었고, 모드리치의 클래스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적잖은 이적료를 지불하고 데려온 이 크로아티아의 천재 미드필더는 ‘바르셀로나 전용 비밀 무기’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최대 강점 때문이었다.

파박-

그렇지, 바로 저거지.

모드리치가 트래핑하는 순간에 몸을 빙글 돌리며 사비의 다리 사이로 공을 빼냈다.

이어서 이니에스타의 태클은 마르세유 턴으로 회피.

이 예술적인 탈압박이야말로 기존 우리 중원에 없던 요소이며, 강한 압박을 기반으로 한 바르셀로나의 축구를 파훼하는 데 쏠쏠하게 쓰일 수 있는 능력이었다.

터엉-

단 두 번의 볼터치로 캄 노우의 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모드리치가, 전매특허인 오른발 아웃프런트 킥으로 아자르에게 볼을 배급했다.

이 모든 과정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신참내기(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좀 있지만)의 활약에 밀릴 수 없는 아자르가 가슴에 공을 척 붙여 놓았다.

그리고 아비달을 상대로 일대일 시도.

1차전에서 이미 어시스트 하나를 기록했던 아자르는 우리 팀 최고의 크랙 중 하나로 무럭무럭 성장하는 중이었다.

숄더 페이크로 아비달의 중심을 무너뜨린 후, 터치라인을 따라 툭 치고 나가며 거리를 순간적으로 벌리는 아자르.

아주 좋은 크로스 기회였다.

“정백강 잡아!”

푸욜이 크게 소리치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기존 마크맨인 피케와 더불어, 바르셀로나의 센터백 두 명이 모두 나에게 붙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헤더 실점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러나 나만 틀어막는다고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었다면 경기도 오산이다.

부스케츠의 백업이 늦어서, 페널티박스 안쪽은 무주공산이었으니까.

“에덴! 그냥 혼자 해!”

습관적으로 크로스를 올리려던 아자르가 나의 콜을 듣더니 홱 꺾으며 박스 안쪽으로 짓쳐들어왔다.

‘공이 발에 붙어다니는’ 특급 드리블러만이 할 수 있는 급격한 방향 전환.

푸욜의 의도 자체는 좋았으나, 우리 공격진의 역량을 너무 과소평가한 부분이 있었다.

“젠장할!”

천하의 푸욜도 당황했는지, 곧바로 두 번째 판단 미스가 나왔다.

나를 버려둔 채 다시 아자르를 저지하러 가버린 것이다.

으이그, 이왕 나를 묶겠다고 결심했으면 발데스 골키퍼를 믿어봤어야죠.

우리 자르가 드리블은 잘해도 골결정력은 영 별론데 말이죠.

토옹-

아자르가 푸욜의 슬라이딩 태클을 피하면서 공을 띄운 순간 이미 상황 종료였다.

하도 자주 얻어맞아서 ‘정백강 공포증’ 말기 환자가 된 피케는 아예 경합을 포기했다.

투콰앙- 철썩-

고작 2분만에 선제골이 터졌다.

승부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놈들아.

* * *

최소한 3골을 넣어야 하는 경기에서 이른 시간대에 골을 넣었다는 건 큰 메리트였다.

세상 오만하던 바르셀로나 녀석들도 움찔한 눈치.

하필이면 경계대상 0순위인 내가 골맛을 본 것도 상대 입장에선 부담일 터였다.

압도적 우위에 있는 건 변함없었지만, 좀 더 조심스럽게 게임을 풀어가기 시작하는 바르셀로나.

덕분에 경기는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여러 번 전진 패스를 시도할 찬스가 있었는데도, 우선은 점유율부터 챙기는 ‘세 얼간이’.

프리롤을 부여받은 메시까지 많이 내려와서 중원 힘싸움에 참여했다.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여!”

무리뉴 감독이 손질 발짓까지 보태며 좀 더 강력한 압박을 주문했다.

바르셀로나에는 라인 브레이킹에 능한 특급 피니셔가 둘이나(호날두, 비야) 있어 부담스러웠지만, 시간은 상대의 편.

급한 쪽은 우리였다.

간격이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조금씩 조금씩 라인을 끌어올렸다.

파앙-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불을 뿜는 사비의 오른발.

뒷공간을 파고드는 호날두에게로 위협적인 스루패스가 날아갔다.

삐끗하면 바로 실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였다.

촤아아악-

난세에 영웅이 등장하는 법.

페페가 멋들어진 슬라이딩 태클로 결정적인 수비를 해냈다.

넘어진 상태 그대로 알론소에게 패스를 건네는 퍼포먼스까지 완벽했다.

“백강!”

바르셀로나 수비진이 자리를 잡기 전에 일단 롱패스를 때려 버리는 알론소.

숨 고를 시간도 없이 일단 점프했다.

다행히 비교적 정확하게 날아오는 공.

그래도 미리 라인을 올려 놓은 덕분에 패스 선택지는 많았다.

“형! 여기요!”

그 중에서도 가장 의욕적인 건 더브라위너였다.

11살이나 연상인 사비를 따돌리며 한 발 앞서 돌진.

그래, 뭐 좀 보여줘 봐라 녀석아.

투욱-

더브라위너에게 볼을 떨궈준 후, 착지와 동시에 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측면에서의 크로스 못지않게, 중앙에서 직접 띄워주는 로빙 패스가 나의 헤더골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내가 움직여야지, 더브라위너에게 다른 선택지가 생기기도 하고.

콰아앙-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푸욜이 아자르 쪽을 체크하고 피케와 부스케츠가 부지런히 나를 쫓아오는 사이, 더브라위너의 눈앞에 광활한 슈팅 공간이 열렸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건 때려야 한다.

철썩-

일순 침묵에 빠진 캄 노우.

더브라위너의 오른발에 제대로 얹힌 강력한 무회전성 중거리포가 발데스 골키퍼 바로 앞에서 뚝 떨어지며 그물을 갈랐다.

더브라위너의 하이라이트 필름에 꼭 들어가야 할 환상적인 득점.

무리뉴 감독은 왜 그렇게 더브라위너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가?

그건 녀석이 완성된 선수여서가 아니었다.

두드러지는 단점도 분명 많았지만, 앞서 10번의 실수를 해도 딱 1번의 결정적인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재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었다.

타고나야 하는 슈퍼스타의 기질이 더브라위너에겐 있었다.

“이예에에에에!”

본인의 엘클라시코 통산 2호골을 터뜨린 더브라위너가 기쁨에 몸부림치며 내게 달려와 안겼다.

“케빈, 너 쫌 한다?”

“방금 골은 제가 생각해도 멋있었네요.”

오오… 스타다운 거만함까지, 제법이구만.

이제 필요한 건 딱 한 골.

수페르코파의 향방이 오리무중에 빠졌다.

* * *

“다들 정말 잘해주었다. 특히 수비, 정말 훌륭했어.”

전반 종료 후 하프타임.

무리뉴 감독이 흡족한 표정으로 선수들을 격려했다.

우리가 먼저 두 골을 넣는 동안, 1차전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LCD’ 3인방은 우리 4백 + 카시야스 주장의 몸을 사리지 않는 철벽 방어에 막히며 크게 힘을 쓰지 못했다.

경기 분위기는 완전히 우리 쪽으로 넘어온 상태.

희한하게 양 팀 다 원정에서 훨씬 잘하는 모습이었다.

“후반전에는 상대도 어떻게든 득점을 하려고 달려들 거다.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말도록.”

“네! 감독님!”

보무도 당당하게 후반전 출격.

양쪽 모두 라인업 변동은 없었다.

킥오프를 준비하는 호날두의 뭐 씹은 듯한 표정이 아주 볼 만하다.

자기네가 스페인 최강이라며 그렇게 입을 털었는데, 전반전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으니 짜증이 날 만도 하지.

삑-

주심의 휘슬이 길게 울리며 트로피의 주인을 가릴 최후의 45분이 시작되었다.

눈에 띄는 부분은 전반전에 비해 확실히 앞쪽으로 포지셔닝을 한 알베스.

메시와의 콤비네이션을 통해 오른쪽 측면 공격력을 극대화하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무리뉴 감독 말마따나, 반드시 골을 넣을 생각인 듯했다.

그러나 그만큼 뒷공간은 노출된다는 사실!

축구장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바르셀로나는 시커먼 속내를 오래 감추지 않았다.

이니에스타가 메시에게 전진 패스를 건넸고, 타이밍 맞춰 알베스가 오버래핑.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성과를 이뤘던 콤비답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마르셀루가 알베스를 견제하기 위해 터치라인 쪽으로 이동하는 순간, 메시의 폭풍 같은 드리블이 시작되었다.

알론소의 깊은 슬라이딩 태클을 뛰어넘은 후, 어깨 싸움을 걸어가려는 페페마저 발바닥으로 공을 굴리며 가볍게 회피했다.

우오오오오!!!

애타게 기다렸던 광경에 열광하는 캄 노우.

환상적인 쇼를 펼친 메시가 툭 찍어 찬 공이 도움 수비를 가려던 라모스의 등 뒤로 떨어졌다.

놀라운 스피드로 볼을 쫓는 검은 그림자.

호날두였다.

마지막까지 쫓아가 방해하는 라모스를 손으로 슬쩍 밀치며 그대로 땅볼 슈팅.

까아앙-

아직 수페르코파의 신이 우리를 버리지 않은 걸까.

골대가 우리를 살렸다.

완벽한 찬스를 놓친 호날두가 아쉬워할 새도 없이 루즈볼을 향해 질주, 그러나 마르셀루가 좀 더 빨랐다.

공을 걷어내는 그 순간까지 침착했던 마르셀루는 그 와중에 역습 기회를 포착했다.

오늘 경기 내내 클로킹 모드였던 벤제마가 젖먹던 힘까지 다해 달려가는 중이었던 것.

뻐엉-

호날두가 파울로 끊기 0.3초 전에 마르셀루의 왼발을 떠난 공이 절묘하게 휘어지며 벤제마의 발 앞에 안착했다.

그 와중에 또 ‘고려청자 트래핑’을 선보이는 벤제마.

스타트가 한참 늦었던 알베스가 따라잡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

푸욜이 결단을 내렸다.

“정백강! 정백강만 잡아!”

혼자 30여 미터를 질주한 벤제마가 페널티박스 안에 진입하는 동안 푸욜과 피케가 나만 붙잡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명색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귀를 가진 벤제마가 아니던가.

공격수로서 자존심이 팍 상할 만한 장면에서, 이를 악물고 때린 벤제마의 슈팅이 골문 오른쪽 상단을 갈랐다.

“씨발! 씨이발! 씨이이이발!!!”

오늘 경기 3-0, 합산 스코어 4-3.

말 그대로 ‘분노의 역전골’을 터뜨린 벤제마가 누구에게 향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욕설을 뱉으며 거칠게 포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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