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2011-2012 라리가 개막전은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양강 체제가 올해도 계속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사라고사를 상대로 7-0, 바르셀로나는 비야레알에게 5-0의 대승을 거뒀다.
나는 첫 경기부터 4골 2어시스트라는 정신나간 스탯을 찍으며 클래스를 입증.
바르셀로나에서는 ‘LCD’가 모두 골을 기록하며 발끝 예열을 마쳤다.
특별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이번 시즌도 라리가의 향방은 결국 엘클라시코 결과에 따라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2라운드인 헤타페전에서도 3-0으로 승리한 우리는, 러시아 원정길에 올랐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이왕 갈 거면 일찍 가는 게 차라리 나았다.
제아무리 모스크바라도 9월 날씨는 영상 7~8도 정도로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이동 거리만큼은 여전히 부담이었다.
비행기만 편도로 7시간 가까이 타야 했으니…
라모스가 왜 그렇게도 몸서리를 쳤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다시 한 번 루이스 피구 형님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
“가운데 앉으세요, 형.”
선수단이 이용하는 비행기에는 가운데 복도를 기준으로 좌석이 세 개씩 양쪽으로 놓여 있었는데, 나의 여행 파트너는 일찌감치 정해졌다.
‘좌자르-우덕배’.
나를 너무 애정하는 이 벨기에 듀오는 내게 평온한 휴식을 허락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냥 너희 둘이 붙어 앉는 게 낫지 않겠어?”
“어유,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형이 든든하게 센터를 지켜주셔야죠.”
더브라위너가 간신배 같이 두 손을 마주 비볐다.
후배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는 건, 때로는 이렇게 피곤한 일이다.
결국 두 떠버리들의 만담을 듣다가 한숨도 못 잤다.
만약 내가 경기에서 부진하면, 녀석들의 책임을 단단히 물어야겠다.
* * *
“뭐야? 춥잖아?”
모스크바 도착 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라모스가 짜증을 확 냈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
영상 7~8도는 얼어죽을.
갑작스레 찾아온 이상 저온 현상으로, 모스크바는 거의 겨울 날씨였다.
“아이고, 경기 당일에는 영상 1도까지 내려가네?”
핸드폰을 꺼내 일기예보를 확인한 마르셀루가 몸을 떨며 크게 탄식했다.
브라질 출신이라 그런지 추위에 유독 약한 모습이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생각 못한 악재를 만난 셈.
만약을 대비해서 경기 중 사용할 방한 용품은 모두 챙겨온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컨디션 조절에 만전을 기하도록.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무리뉴 감독이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이 걱정은 안타깝게도 현실이 되었다.
경기가 열리는 2011년 9월 14일 아침, 대다수의 핵심 선수들이 코를 훌쩍거리며 나타난 것이다.
“머리도 띵하고, 목도 아프고… 난리 났네.”
모스크바 올 때부터 불안불안하던 마르셀루부터,
“씨발… 씨이이발…”
어쩐지 아플 것 같지 않다는 편견을 깬 페페까지.
절대 동료들이 나약해서가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호텔 난방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냉골에서 자야만 했던 것이다.
세상에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루즈니키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에이스 정백강은 멀쩡하다는 것.
만독불침에 금강불괴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나는 감기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 관중들 많이도 왔네…”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라모스의 짜증.
유럽대항전에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러시아 원정을 기피하는 이유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1. 지나치게 긴 이동 거리
2. 적응 안 되는 추위
3. 엄청난 텐션을 보여주는 열광적인 관중들
이번 경기에서는 그야말로 삼위일체가 완성된 셈.
이런 요소들이 기본적인 전력 차이를 좁힐 정도로 작용하느냐가 관전 포인트였다.
삐익-
챔피언스리그 역대급 죽음의 조에서 펼쳐지는 첫 번째 경기가 주심의 휘슬과 함께 시작되었다.
* * *
우오오오오-
러시아의 악명은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관중들이 내뿜는 환호와 야유의 데시벨은 캄 노우에 비견되거나, 오히려 그보다도 더 뜨거웠다.
그 기(氣)를 등에 업은 모스크바 선수들은, 트레블 팀을 맞아 수비적으로 나올 거라는 예상을 깨고 초반부터 강렬하게 몰아붙였다.
한껏 처져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좀 부담스러운 전개.
모스크바의 공격 전개를 이끄는 선수는, 남아공 월드컵 당시 일본 전문가피셜 ‘정백강급 재능의 소유자’인 혼다 케이스케였다.
혼다는 주력이 좋은 모스크바의 투톱 세이두 둠비아와 바그너 러브에게 날카로운 스루패스를 여러 차례 연결하며 우리 골문을 위협했다.
트레블을 이끈 ‘철벽 콤비’ 라모스와 페페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모습으로 마크맨을 놓치며 불안한 모습을 노출.
카시야스 주장까지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면 벌써 실점하고도 남았을 경기력이었다.
전반 15분까지 막아낸 슈팅만 무려 5개.
앞서 포르투와의 슈퍼컵에서는 4백이 잘 해줘서 상대적으로 할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연봉값 제대로 하는 카시야스 주장이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그에 따른 질책은 보너스.
챔스 같은 높은 레벨의 경기에서 감기몸살을 안고 뛴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지금보다도 훨씬 추울 때 여길 와야 하는 맨시티와 도르트문트가 벌써부터 애잔하다.
뻐엉-
카시야스 주장이 골킥을 최전방까지 길게 연결했다.
다들 상태가 메롱이니 믿을 만한 사람이 나뿐인 상황.
도약하면서 빠르게 좌우 상황을 살폈다.
왼쪽의 벤제마, 오른쪽의 아자르 모두 철저하게 견제당하는 중.
둘 다 현직 환자였다.
으이그… 아프다는데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최근에 팀원들과의 연계 플레이에 재미를 들려 어시스트 머신의 면모를 뽐내고 있는 나지만 지금은 좀 애매하다.
일단 분위기를 좀 바꿔볼까?
콰아앙-
공중에서 몸을 틀면서 헤더 중거리슛을 시도했다.
일부러 공의 오른쪽 아래를 맞추며 회전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구장 고급용어로 하면 일종의 ‘시네루’라고나 할까.
골문과의 거리는 약 33미터.
코너킥이라도 얻어내면 금상첨… 으응?
철썩-
뭐야 이거? 이게 들어가?
“으아아아악!”
모스크바의 수문장 이고르 아켄페프 골키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누워서 소리를 질렀다.
분노와 부끄러움이 뒤섞인 비명이었다.
내가 넣었지만 참 어처구니 없는 골.
완전 골키퍼 정면으로 항햔 공이었다.
그냥 펀칭만 했어도 사고는 없었을 텐데, 굳이 잡겠다고 손을 펼친 게 화근.
생각보다 훨씬 힘이 많이 실린 볼이 장갑 사이를 뚫고 들어가 골망을 갈랐다.
결정적인 순간에 최악의 방식으로 등장한 ‘기름손’.
1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시끄럽던 루즈니키 스타디움이 일순 깊은 침묵에 빠졌다.
세리머니하기도 뭔가 뻘쭘해서 멀뚱 서 있던 나를 동료들이 무더기로 덮쳤다.
“아 쫌! 나 껴안고 코 훌쩍이지 말라고!”
* * *
아킨페프의 헌신(?) 덕분에 우리가 겨우 1-0 승리를 거두는 동안, 맨체스터의 에티하드 스타디움에서는 희대의 명승부가 벌어졌다.
만수르라는 갑부 구단주를 등에 업은 맨시티와, 어려운 재정 속에서도 알짜 영입으로 좋은 성적을 낸 도르트문트.
슈퍼스타 공격수였던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과, 선수 시절 2부리그를 전전했던 위르겐 클롭 감독.
모든 면에서 대비되는 이 맞대결에서, 먼제 한 방 먹인 건 도르트문트였다.
맨시티의 골문을 열어 젖힌 열쇠는 특유의 게겐 프레싱.
원정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미친 활동량을 바탕으로 한 압박을 통해 밀어붙이다가 레프트백 가엘 클리시의 치명적인 턴오버를 유발하는 데 성공했다.
실수를 빠른 역습으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클롭 축구의 전형.
상대 진영에서 끊어낸 볼을 따낸 이반 페리시치가 지체없이 측면 돌파 후 크로스를 올렸고, 이 공이 쇄도하던 로베르토 레반도프스키의 오른발에 정확하게 걸렸다.
전반 28분, 자신의 챔스 데뷔전에서 환상적인 발리슛으로 골을 터뜨린 레반도프스키가 득점 후 곧장 찾아간 곳은 클롭 감독의 넓은 가슴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끈끈한지 알 수 있었던 세리머니였다.
하지만 유력한 EPL 우승 후보 맨시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선제골 허용 후 딱 3분 만에 다비드 실바의 스루패스를 받은 세르히오 아게로가 로만 바이덴펠러 골키퍼의 다리 사이로 침착하게 땅볼 슈팅을 성공시키며 균형을 맞췄다.
실바의 탈압박과 창조성, 아게로의 침투와 마무리 모두 완벽했다.
기세를 탄 맨시티는 전반 종료 직전 실바가 추가골을 넣으며 경기를 뒤집었다.
이번에는 아게로가 스피드를 살린 돌파로 어그로를 끌고, 따라 들어오던 실바에게 중거리 찬스를 열어주었다.
훈훈한 상부상조 속에 역전.
후반전 들어서도 주도권은 계속 맨시티 쪽에 있었고, 16분에 기어코 추가골이 터졌다.
거의 하프라인 지점부터 드리블을 시작해서, 들러붙는 도르트문트 수비진을 먼지 털듯 가볍게 튕겨내며 질주한 야야 투레가 호쾌한 중거리포로 팀에세 번째 득점을 선물했다.
공교롭게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발렌시아, 바르셀로나 출신 선수들이 한 골씩 터뜨리며 라리가 출신 슈퍼스타의 위용을 과시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두 골 차까지 벌어지면서 마음이 급해진 도르트문트가 필사적으로 공격하며 득점을 노렸지만, 고비 때마다 빈센트 콤파니의 호수비와 조 하트 골키퍼의 미친 선방이 나오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그렇게 3-1 상황에서 경기 종료가 임박하자 모두가 맨시티의 승리를 점쳤다.
그런데 바로 이때부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후반 41분, 교체 투입된 마리오 괴체가 마이카 리차즈의 엉성한 위치 선정을 응징하며 페널티박스로 침투, 선제골의 주인공 레반도프스키가 이를 놓치지 않고 절묘한 로빙 패스를 연결했다.
당황한 리차즈가 뒤쪽에서 괴체를 슬쩍 잡아챈다는 게 주심에게 딱 걸려 버렸다.
절망에 빠져 있던 도르트문트에게 한 줄기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키커로 나선 레반도스프키가 페널티킥을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멀티골 완성.
리차즈의 본헤드 플레이 한 번에 위기를 맞은 만치니 감독은 총력 수비를 지시했다.
남은 시간이 워낙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맨시티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이 경기의 마지막 영웅이 등장했다.
도르트문트의 센터백 마츠 훔멜스였다.
‘추가시간의 추가시간’인 후반 49분, 코너킥 상황에서 천금 같은 헤더골을 작렬하며 원정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경기력, 박진감, 드라마까지 모든 부문에서 10점 만점에 10점이 아깝지 않은 경기였다.
- 개꿀잼… 최근 본 경기 중 제일 재밌었음
- 양 팀 다 경기력 후덜덜…
- 맨시티는 잘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돌문이 이렇게 센 팀이었나?
- 쯧쯧… EPL충 수준하고는 ㅋㅋ 작년 분데스리가 우승팀이다 임마. 너 어디 가서 축구 본다고 하지 마 ㅋㅋ
- 레알 경기는 레알 눈 썩는 줄 알았는데, 맨시티랑 돌문 덕분에 정화했다
- 진짴ㅋㅋㅋㅋ 레알 그따위로 해서는 16강도 장담 못할듯 ㅋㅋ 모스크바한테 뽀록골로 승리 ㅋㅋㅋㅋ
- 애들 다 감기 걸렸다 그러던데?
- 감기 이 지랄 ㅋㅋㅋ 자기관리도 실력이고 개못한 건 팩트임 ㅇㅇ
- 맨시티랑 돌문이 16강 갈 것 같다… 이 글은 성지가 됨
- 에이 아무리 그래도 트레블팀이 32강 탈락은 아니지
- 설마설마 하다가 훅 간다 ㅋㅋㅋ
한국 네티즌들의 냉정한 평가처럼, 우리 팀의 형편없는 졸전과 에티하드 스타디움에서의 초명경기는 D조의 판도를 더욱 예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