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패배는 병가지상사지만, 그것이 거듭되면 습관이 된다.
지난 시즌부터 중요한 고비마다 계속 우리에게 발목을 잡혔던 바르셀로나.
한 번쯤은 그 고리를 끊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축구를 시작한 이래로 이렇게까지 승리가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메시의 감정 가득 실린 경기 전 인터뷰가 절박한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소속팀도 만년 2등에, 본인에 대한 축구계의 평가도 몇 년째 ‘넘버투’였으니 그 괴로움이 오죽하겠는가.
푸욜이나 사비 같은 팀의 30대 주축 선수들이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한 개의 트로피라도 더 들어올려야 할 텐데 최대 라이벌에게 번번히 박살나고 있으니…
같은 ‘23승 1패’ 팀 간의 대결이었지만 양쪽 선수단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바르셀로나는 패배 의식을 극복하는 것, 반대로 우리 입장에서는 지나친 자신감이 자만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는 게 포인트였다.
라리가 우승 경쟁의 분수령이 될 이번 시즌 세 번째 엘클라시코가 우리 팀의 선축으로 시작되었다.
“압박해! 압박!”
우리 팀과의 경기가 끝날 때마다 경질설에 시달리는 과르디올라 감독이 초반부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제자들을 독려했다.
선수 시절에는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 정상급 미드필더였고, 감독으로서도 트레블을 달성하며 완벽한 커리어를 쌓아 온 과르디올라 감독.
그러나 한국에서 온, 머리 좀 잘 쓰는 스트라이커 한 명 때문에 팀에서 쫓겨날 걸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내가 참 여러 사람 앞길을 막고 있는 셈.
무수히 많은 정백강의 피해자 중 한 명인 호날두가 왼쪽 측면에서 볼을 잡았다.
리가 16경기에서 무려 19골을 쑤셔 넣고도, 득점 순위에서 1위도 2위도 아닌 3위에 올라 있는 비운의 슈퍼스타.
아르벨로아 혼자 막기엔 아무래도 버거운 상대였다.
‘소포모어 징크스’를 예상했던 것보다 잘 이겨내고 있는 더브라위너가 측면 쪽으로 붙으며 도움 수비를 갈 준비를 했다.
수비 기술적으로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필드 이곳저곳을 다니며 머릿수를 채워주는 데는 더브라위너가 또 일가견이 있었다.
호날두가 욕심 부리지 않고 일단은 공을 뒤로 뺐다.
녀석이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후 가장 크게 변한 것 중 하나가 개인 플레이의 감소였다.
자신보다 안정감이 좋은 메시나 이니에스타에게 온더볼을 맡기고, 본인은 뛰어난 오프더볼 움직임을 살려 순간적인 침투와 연계에 집중하는 쪽으로 스타일을 변화시키는 중이었다.
‘공3업’한 페드로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는 완벽주의자로 이름난 과르디올라 감독이 시즌을 치르면서 가장 효율적인 공격 방식을 찾아낸 결과물이기도 했다.
투욱-
오른쪽 측면에 있던 메시가 중앙으로 이동하면서 사비로부터 볼을 건네 받았다.
자연스럽게 측면으로 빠지며 메시의 빈자리를 메우는 비야.
‘유럽 최강의 3톱’으로 불리는 ‘LCD’ 파괴력의 핵심은 지금처럼 포지션을 구분짓지 않는 활발한 스위칭에 있었다.
수페르코파 때와 비교하면 훨씬 정제되고 효율적인 움직임.
지난 4개월 동안 ‘타도 레알’을 목표로 열심히 훈련한 티가 났다.
“헤이!”
줄기차게 기회를 엿보던 호날두가 아르벨로아를 떨쳐 내며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침투했다.
우리 팀을 상징하는 공격 패턴이 ‘측면 크로스-정백강 헤더’라면, 바르셀로나의 비기는 칼날 스루패스에 이은 마무리.
알론소의 태클을 가볍게 피한 메시가 타이밍 좋게 우리 수비진의 실낱 같은 틈으로 패스를 찔러 넣었고, 쇄도하던 호날두가 골문 오른쪽 상단을 노리고 감아 찬 공이 카시야스 주장의 손끝을 넘어 그물에 감겼다.
너무나도 ‘바르셀로나스러운’ 스무스한 득점.
이예에에에에!!!!!!
긴장 가득하던 캄 노우가 열광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의 폭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 * *
“하하… 하… 이것 참… 다들 미안하다….”
전반 종료 후 하프타임.
카시야스 주장이 침울한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형이 왜 미안해요. 내가 잘못한 거지.”
라모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공격진 대표(?)로는 내가 나섰다.
“어떻게든 골을 넣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라커룸 분위기가 이렇게 된 이유는 스코어보드에 있었다.
0-3이라니.
믿기도, 납득하기도 힘든 결과였다.
배수의 진을 치고 덤벼드는 바르셀로나는 정말 강했다.
힘 한 번 제대로 못 써본 채 일방적으로 얻어맞다 보니 어느새 세 골 차까지 벌어졌다.
호날두가 멀티골, 나머지 한 골은 메시의 몫이었다.
무리뉴 감독이 등장하자 일동 긴장 맥스(MAX) 모드.
아무리 원정이라지만 너무 형편없는 경기를 했기 때문에 엄청난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했다.
“후반전엔 카림 대신 호세가 들어간다.”
으응?
우리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전반전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벤제마-카예혼의 교체 사실만 알리고 라커룸을 나가 버리는 무리뉴 감독.
이 세상 쿨함이 아니었다.
“휴우… 저러니까 더 무섭네….”
바짝 쫄아 있던 아자르가 한숨을 내쉬며 툴툴거렸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침묵이 더 효과적인 법.
암담한 45분을 라이브로 지켜보면서 속에 얼마나 많은 말을 쌓아두었겠는가.
그러나 무리뉴 감독은 선수들 스스로가 문제점을 깨닫고 각성하길 바랐다.
무거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후반전.
호날두 녀석은 아주 그냥 싱글벙글이었고, 메시의 표정도 밝았다.
전체적으로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건방진 놈들 같으니라구…
하긴, 다른 곳도 아닌 캄 노우에서 세 골 차를 누가 뒤집으랴.
삑-
휘슬과 함께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 시작되었다.
전반전 내용을 찬찬히 복기해보면, 역시 중원 싸움에서 밀려버린 게 컸다.
벤제마를 빼고 카예혼을 투입한 선택을 보면, 무리뉴 감독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기술이나 공격력은 벤제마의 확연한 우위지만, 부지런함만큼은 카예혼이 훨씬 뛰어나니까.
한 골이라도 더 먹히는 날엔 그냥 승부 끝인 상황.
레알 이적 후에는 수비 가담을 예전만큼 안 하고 있는 나였지만, 지금은 비상 시국이었다.
“부스케츠한테는 내가 붙을게!”
다른 스타들처럼 두드러지진 않지만, 바르셀로나 점유율 축구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후방에서 빌드업을 도와주는 부스케츠의 존재였다.
간만에 센터백 시절 실력 좀 발휘해 볼까?
‘LCD’와 사비-이니에스타 라인에 수비가 집중된 사이 중원에서 편하게 날뛰던 부스케츠는, 내가 마크맨으로 따라다니자 확실히 불편해 하는 기색이었다.
방금 투입되어 힘이 넘치는 카예혼도, 메시에게 붙었다 사비에게 붙었다 신출귀몰 뛰어다니며 무리뉴 감독의 기대에 100% 부응했다.
우리 공격진의 헌신에 힘입어, 매끄럽던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가 조금씩 삐걱대기 시작했다.
확연히 늘어난 턴오버가 그 증거였다.
전반전에 체감상 100%의 패스 성공률을 보이던 사비의 횡패스가 두 번이나 터치라인을 벗어난 것은 특히 상징적인 장면.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걸 어떻게 득점까지 연결시키느냐가 우리의 과제가 되었다.
일단은 마르셀루의 스로인부터 출발.
타악- 뻐엉-
스로인을 가슴으로 받아 놓은 모드리치가, 공이 채 떨어지기 전에 오른발을 갖다 대며 롱패스를 시도했다.
볼을 잡기 위한 카예혼의 전력질주.
정말 잘도 뛰네.
나도 뒤질세라 함께 달렸다.
카예혼보다 한 발 늦게 들어온 알베스가 크로스를 견제하기 위해 초근접 밀착 마크에 들어갔다.
우리 예혼이가 체력이나 스피드에 비해 테크닉은 쪼까 모자란 구석이 있는데, 알베스를 뚫을 수 있으려나?
“여기!”
“이쪽으로!”
뒤쪽에서 바람처럼 달려오는 두 명의 남자.
마르셀루와 모드리치였다.
전반전에는 통 보이지 않았던 민첩한 움직임.
이것이 ‘무리뉴표 침묵’의 힘인가?
카예혼이 둘 중 수비의 견제가 덜한 마르셀루 쪽으로 땅볼 패스를 전달했다.
바로 올라오는 논스톱 크로스.
반전은 없었다.
콰아앙- 철썩-
드디어 날 상대로 무실점 신화를 써보나 했는데, 결국 지독한 악연을 이어나가게 된 피케가 허탈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 일단 한 골!
* * *
후반 12분, 우리 팀의 첫 골이 터지면서 경기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여전히 바르셀로나가 압도적 우위임은 분명했으나, 역사라는 게 있지 않겠는가.
바르셀로나 녀석들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고 플레이도 어딘가 모르게 조급해졌다.
퍼어엉-
다소 무리하게 시도한 메시의 중거리슛이 장외홈런급 궤적을 그리며 관중석으로 들어갔다.
평소의 메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
승리가 간절한 만큼, 실점으로 인한 부담감 역시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다 올라가!”
카시야스 주장이 양팔을 흔들며 동료들의 전진 배치를 주문했다.
아직도 최소 두 골이 필요했으니 갈 길이 구만리였다.
다이내믹한 포즈로 때린 주장의 골킥이 높이 날아 하프라인을 넘어 왔다.
“백강!”
우리가 공격할 때 이 분 목소리 듣는 게 흔치 않은 일인데 말이지.
마르셀루가 ‘돌아오지 않는 풀백’ 스타일인 만큼, 밸런스를 위해 수비에 전념하는 편인 아르벨로아가 감춰져 있던 공격 본능을 뽐내며 높이 올라와 있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날뛰어 보세요.
터엉-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있었기에 편하게 헤더 패스를 받아낸 아르벨로아가 잠시 멈춰서 전방을 주시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오프더볼 무브를 가져가는 아자르와 더브라위너.
벨기에 듀오 중 아르벨로아의 선택은?
“뭐… 뭐야?”
아자르를 견제하던 아비달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당연히 패스를 할 줄 알았건만, 아르벨로아가 직접 공을 몰고 전진, 또 전진!
상대 의표를 완벽하게 찌른 판단에 바르셀로나 수비진이 크게 흔들렸다.
일단은 레프트백인 아비달이 커버를 하러 나갔는데…
퉁- 탁-
점입가경.
아자르가 센스 있게 공을 받아주기 위해 이동했고, 흥이 잔뜩 오른 아르벨로아가 2대 1 패스로 측면을 박살내 버렸다.
“알바로! 올려!”
“간다!”
자신이 수비만 할 줄 아는 반쪽 선수가 아님을 증명한 아르벨로아가 야심차게 크로스 시도.
그런데 평소 안 하던 짓(?)을 해서 그런지 힘이 지나치게 들어갔다.
어지간한 크로스는 귀신같이 잡아내는 나지만 이건 길어도 너무 긴데?
그러나 지금은 모든 찬스를 소중히 여겨야 할 때였다.
고개를 들어 낙하지점을 계속 확인하면서 사선으로 달렸다.
“막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피케 못지않게,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나를 증오하고 있을 발데스 골키퍼가 절규했다.
센터백 피케와 마스체라노는 물론이고, 반대쪽 측면에 있던 알베스까지 나를 잡기 위해 쫓아왔다.
옛 동화 속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 기분이었다.
일단 공중으로 도약은 했는데 애초에 크로스가 별로였던 탓에 슈팅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 들려오는 천진난만한 음성.
“혀엉!”
이쯤에서 축구장의 리빙 포인트 하나.
득점을 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어시스트를 하면 된다.
‘백강 매직’에 홀린 바르셀로나 수비진이 나만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침투를 마친 아자르.
페널티박스 안에서 외로움을 만끽하고 있던 녀석에게 위장에 직접 들이부어주는 헤더 패스가 무사히 전달되었다.
철썩-
후반 27분.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경기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