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47화 (148/176)

147화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 되는가를 과르디올라 감독이 제대로 보여주었다.

메시와 비야를 빼고 푸욜과 아드리아누를 투입, 필드 위에 전문 수비수만 6명이 되었다.

그 전에 이니에스타도 파브레가스로 바꿔 줬기 때문에 남은 교체 카드도 없었다.

바르셀로나 레전드인 요한 크루이프도 아마 이 경기를 보고 있을 텐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안티 풋볼’이라며 비난하려나?

상대가 누구든 관계 없이 자신들의 축구를 구사한다는 바르셀로나의 철학은, 또 패배할 것 같다는 두려움 앞에서 가차없이 내팽개쳐졌다.

하긴, 철학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지.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약 15분.

넣어야 하는 우리와 막아야 하는 상대의 치열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바르셀로나의 밀집 수비에 대한 무리뉴 감독의 대응은,

“세르히오! 올라가!”

라모스의 공격수화(化)였다.

높이와 스피드, 파워와 기술을 모두 갖춘 라모스야말로 이런 개싸움(?)에는 최적화된 선수라고 볼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두줄 수비를 상대하게 될 줄이야.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작정하고 잠그는 팀 상대로는 지상전보다 공중전이 효과적인 법.

알론소, 더브라위너, 마르셀루 등 킥력 좋은 선수들이 번갈아 가며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공을 띄워 보냈다.

바르셀로나는 눈엣가시인 내게 더블팀을 붙인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날아오는 볼들을 걷어내며 버텼다.

Tenim un nom el sap tothom-

Barça, Barça, Barça!!!

필드 내의 상황과,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응원가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엄청나게 처절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 상황이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아마 악전고투 끝에 귀중한 승리를 지켜내는 바르셀로나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팬들의 모습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비극의 씨앗은 내가 지독한 더블팀을 피해 잠깐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뿌려졌다.

뻐어엉-

오른쪽 측면에서 공을 잡은 더브라위너가 크게 휘어져 들어가는 크로스를 시도했고, 그와 거의 동시에 내가 남은 힘을 쥐어짜서 골문으로 쇄도했다.

공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던 피케가 왼손으로 내 유니폼을 움켜잡은 채 한 발 앞서 달렸고.

시선이 나에게 꽂힌 나머지, 발데스 골키퍼가 뛰쳐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제라르, 뭐해? 비켜!”

“크어어억!”

발데스와 피케가 교통사고를 당해 넘어지는 사이, 하늘에 외롭게 떠 있던 주인 없는 공이 정백강의 이마를 만났다.

철썩-

자존심 다 버리면서 갈구했던 승리가 무산되는 소리였다.

게다가…

“으악! 으아아악!”

점프했다가 떨어지는 과정에서 손으로 바닥을 짚은 발데스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골절이 의심되는 상황.

정확한 건 검진을 해 봐야 알 수 있겠지만, 더 이상 뛰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바르셀로나 입장에선 청천벽력.

과르디올라 감독이 침통한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졸지에 가해자가 된 피케가, 치료를 받으러 간 발데스를 대신해서 골키퍼 장갑을 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이미 완벽하게 무너진 피케가 수문장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수적 열세에 놓인 바르셀로나 녀석들 역시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이전처럼 악착 같은 수비를 보여주지 못했고 말이다.

결국 후반 44분, 알론소-정백강으로 이어지는 오늘 경기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골이 터지면서 캄 노우에서의 혈전이 마무리되었다.

삑- 삑- 삑—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피케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울었다.

눈물 살짝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성통곡 수준이었다.

피케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자, 팀의 정신적 지주인 푸욜이 피케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위로를 건넸다.

속으로 ‘이번에야말로’를 얼마나 많이 외쳤을지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장면이었다.

패자의 아픔과 비례하는 게 승자의 기쁨.

카시야스 주장을 비롯한 동료들이 저마다 두 손을 하늘 위로 번쩍 쳐든 채 믿을 수 없는 역전승의 여운을 만끽했다.

물론 나도.

* * *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4-3으로 꺾고 라리가 선두 굳혀]

[전반전 3골 리드 못 지키고 무너진 바르셀로나]

[정백강, 해트트릭에 어시스트까지… 4골 모두 관여하며 ‘펄펄’]

바르셀로나에게 시즌 두 번째 패배를 안긴 캄 노우에서의 엘클라시코는 생각보다 그 파장이 훨씬 컸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과르디올라 감독이 사퇴를 선언한 것이다.

설마 설마 하던 일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내 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느꼈다.”

짧지만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사퇴의 변.

후임으로는 수석코치인 티토 빌라노바가 선임되었다.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감독의 퇴장치고는 다소 초라한 모습.

축구판의 비정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편 리가에서 최대의 경쟁자를 물리친 우리 팀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일본 요코하마를 향해 떠났다.

우리 팀이 역사상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대회, 바로 피파 클럽 월드컵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월드컵’이라는 거창한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각 대륙을 대표하는 챔피언들이 총출동하는 대회였지만, 실상은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이 트로피를 들지 못하면 이변으로 여겨지는 측면이 있었다.

클럽 축구의 중심지는 누가 뭐래도 유럽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번 대회 역시 이변은 없었다.

4강전에서 아시아 챔피언 알사드, 결승전에서는 남미 대표로 나온 산투스를 각각 5-0으로 무자비하게 완파하며 6관왕 달성에 성공했다.

나는 가볍게 2경기 연속 해트트릭으로 득점왕에 올랐다.

클럽 월드컵 결승전에서의 해트트릭은 전무한 기록이라는데, 그런 자잘한 기록들은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워낙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 크게 감흥은 없었다.

수페르코파, 슈퍼컵, 그리고 클럽 월드컵까지.

한 팀이 들어올릴 수 있는 들어올릴 수 있는 모든 트로피를 차지하며 아주 알차게 보낸 2011-2012 시즌 전반기가 모두 끝났다.

그리고 새해가 밝았다.

* * *

2012년 1월 9일.

이제는 마치 내 집처럼 편안한 스위스 취리히의 콩그레스 하우스.

2011 피파 발롱도르 시상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뭐야, 안 온 거야?”

나의 질문에 옆자리에 앉은 메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민망한 듯 대답했다.

“그렇게 됐어….”

나, 그리고 메시와 함께 최종 후보 3인에 오른 호날두 녀석이 오지 않았다.

호날두가 ‘노쇼’하는 게 아주 신기한 일은 아니지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으이구, 치졸한 녀석 같으니라구…

오늘 사회자로 위촉된 루드 굴리트가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번엔 챔피언스리그 조 추첨에 나오셨었죠.

요즘 행사에 자주 보이시네요.

혹시 어디 출마라도 하시나?

“첫 번째 순서입니다. 2011년 한 해 가장 멋진 골을 뽑는 푸스카스 상! 후보들 함께 만나보시죠.”

경직된 얼굴과 국어책 읽는 듯한 어조가 인상적이다.

필드에서는 못하는 게 없는 만능이셨지만 방송 체질은 아니신가 봅니다, 굴리트 선배님.

후보는 모두 세 명이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메시, 브라질의 신성 네이마르, 잉글랜드와 맨유의 자존심 웨인 루니까지.

뭐, 나도 골은 엄청나게 넣었으니 그 중 하나 뽑아서 후보에 넣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만 상이라는 건 좀 골고루 뿌려야 하지 않겠는가.

초대 푸스카스상 위너라는 타이틀만 갖고 있어도 나는 충분하다.

“영예의 수상자는… 네이마르 주니오르!”

귀에 헤드셋을 낀 채 동시통역을 열심히 동시 통역을 듣고 있던 네이마르가,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활짝 웃으며 일어나 무대로 나갔다.

삐쭉 세운 머리, 양쪽 귀에는 반짝 거리는 귀걸이.

그래, 한창 멋부릴 때지.

트로피를 받아든 네이마르가 상기된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섰다.

“감사합니다. 피파 발롱도르 시상식에 초청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인데, 이렇게 훌륭한 상까지 받게 되었네요. 내년에도, 또 후년에도 이 자리에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오늘보다 더 큰 상을 받아야겠지만요. 아, 아무리 그래도 당분간 가장 큰 상은 힘들 것 같네요. 우리 팀 상대로 해트트릭하신 어떤 분 때문에 말이죠.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네이마르의 소속팀은 산투스.

‘해트트릭하신 어떤 분’은 나를 지목한 것이었다.

귀여운 공개 저격 덕분에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카메라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얼굴을 잡았고,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 마르가 어떻게 해야 주목받는지 잘 아는구만.

이런 스타성 역시 타고나는 것일까?

“이어서 피파 베스트 일레븐입니다. 먼저 골키퍼에 이케르 카시야스!”

2008년부터 시작해서 무려 4년 연속으로 ‘지구 대표팀’ 수문장으로 선정된 카시야스 주장이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다음은 수비수입니다. 마르셀루 비에이라, 세르히오 라모스, 페페, 다니 알베스.”

아르벨로아까지 선정되었으면 싹쓸이였는데.

조금 아쉽긴 하지만 알베스가 더 잘하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니까…

로아 형, 좀 더 분발하자.

“미드필더 세 자리는 사비 알론소, 케빈 더브라위너, 그리고 사비 에르난데스가 차지했습니다.”

31세 사비와 30세 알론소 사이에 낀 스무살의 더브라위너가 유난히 돋보였다.

무려 이니에스타를 밀어내고 차지한 베스트 11.

순수 실력으로 붙는다면 아직 이니에스타가 더 낫겠지만, 트레블이라는 업적이 역시 컸다.

눈에 보이는 스탯도 이니에스타가 어시스트 개수는 많았지만 득점은 오히려 더브라위너가 우위에 있었고.

위너야, 너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영광은 내가 널 감독님한테 추천했을 때 시작했단다.

앞으로도 나한테 잘하렴.

“마지막으로 공격수입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리오넬 메시, 그리고 정백강!”

당연하게도 발롱도르 최종 후보 세 사람이 공격진을 구성했다.

정말 외계인과 붙어도 골을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조합.

“오늘 개인 사정으로 불참한 호날두에게는 나중에 따로 트로피를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이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었으면, 분명 야유가 나왔을 거다.

추날두야, 호하다.

11개의 자리 중에 7개는 우리 팀, 나머지 4개는 바르셀로나에게 돌아갔다.

현재 유럽 축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

올해의 감독상 역시 무리뉴 감독이 들어올리면서, 시상식이 레알 마드리드를 위한 잔치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순서.

피파 발롱도르를 시상하기 위해 제프 블라터 피파 회장, 미셸 플라티니 UEFA 회장, 그리고 투 타임 발롱도르 위너 호나우두가 나섰다.

수상자 발표는 셋 중에서 가장 짬밥 후달리는(?) 호나우두의 몫이었다.

사실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결과는 알고 있었지만.

“2011년도 피파 발롱도르 수상자는… 정, 백, 강!”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서, 2년 연속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선정된 내가 무대에 올랐다.

“축하하네.”

“작년 한 해 정말 대단했어.”

블라터-플라티니 두 회장과 차례로 악수를 나눈 뒤 호나우두로부터 트로피를 건네 받았다.

인테르-레알 두 클럽의 선배인 호나우두가 씩 웃으며 말했다.

“백강, 아무래도 2개로는 성에 안 차겠지?”

역시 슈퍼스타의 마음은 슈퍼스타가 아는 법.

“물론입니다. 앞으로 한 3개는 더 받을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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