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49화 (150/176)

149화

최종적으로 완성된 챔피언스리그 8강 대진은 아래와 같았다.

<포트 1>

밀란 VS 벤피카

바르셀로나 VS 아포엘

<포트 2>

바이에른 뮌헨 VS 마르세유

레알 마드리드 VS 첼시

나 다음으로 추첨에 나선 크루이프와 펠레가 각각 뮌헨과 마르세유를 뽑으면서, 자연스럽게 남은 두 팀인 우리와 첼시가 맞붙게 되었다.

깔끔하게 한 마디로 표현하면 ‘최악의 대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첼시를 이기고 올라가도 준결승 상대가 (아마도) 뮌헨이었으니까.

한편 정백강의 ‘신의 손’ 덕분에 아포엘을 만나게 된 바르셀로나는 싱글벙글 모드였다.

밀란이나 벤피카도 뮌헨이랑 비교하면 확연히 약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팀들.

하여튼 바르셀로나 녀석들, 옛날부터 대진운 좋은 건 알아줘야 한다.

이번엔 내가 커다랗게 일조를 했으니 할 말은 없다만…

“역시 백강이야, 기가 막혔어.”

“형은 어떻게 추첨까지 그렇게 잘하세요?”

“첼시 만나서 다행이야. 나는 아포엘이랑 붙을까봐 엄청 걱정했었거든.”

“뮌헨 아닌 게 아쉽네요. 아, 어차피 준결승전에서 만날 거니까 상관 없나?”

“난이도보다 챔스 흥행을 먼저 걱정하는 당신이 진정한 슈퍼스타!”

동료들이 고생하고 온 나를 격하게 반겨(?) 주었다.

에이, 더럽고 치사해서 정말.

8강전은 내가 하드캐리한다.

생각해 보면 늘 그렇긴 하지만.

* * *

2012년 3월 27일.

인테르 소속이었던 2009-2010 시즌의 챔스 16강 이후 2년 만에 찾는 스탬퍼드 브리지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 동안 가장 크게 달라진 게 있다면 나의 위상 정도?

그때만 하더라도 그저 정상급 선수 중 하나에 불과했던(?) 정백강은 이제 이견의 여지가 없는 세계 축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펠레가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말이지.

오늘 첼시와의 8강 1차전은 통산 네 번째 맞대결로, 상대전적은 우리 기준 1무 2패였다.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건 조금 의외다.

그래도 명색이 ‘20세기 최고의 클럽’ 레알 마드리드인데 조금은 기분 나쁜 기록.

하지만 이런 데이터는 엄밀히 말해 과거의 이야기일 뿐.

이번 시즌 두 팀의 분위기는 완전 상극이었다.

우리는 수페르코파 1차전 패배 이후 무려 46연승을 거두며 세계 축구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반면, 첼시는 EPL에서 6~7위권을 왔다갔다 하면서 체면을 제대로 구기고 있었으니…

만에 하나라도 첼시가 이긴다면 이변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간절함이란 측면에선 첼시가 우위에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하게 리그 우승을 경쟁하던 팀이 다음 시즌 챔스에도 못 나간다면 그 무슨 망신이겠는가.

“이제 챔피언스리그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덕분에 선수들의 동기부여도 최상이다. 어려운 경기가 되겠지만, 모든 것을 걸고 임하겠다.”

로베르토 디 마테오 감독의 출사표였다.

전임자인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한 게 불과 한 달도 안 된 시점.

감독으로서는 완전 초짜라고 할 수 있는 디 마테오의 눈앞에 아주 커다란 산이 나타난 셈이었다.

회귀 전을 상기해 보면, 바로 이 시즌에서 첼시가 전력 열세를 극복하면서 난적들을 다 물리치고 올라가 기적적으로 빅 이어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디 마테오 감독은 모 개그맨을 닮은 외모 덕분에 한국 팬들로부터 ‘소년 명주’라는 애정 어린 별명을 얻기도 했었지.

그러나 내가 또 자타공인 ‘역사 브레이커’ 아니겠는가.

이 세계에서 오직 나만이 아는 역사를 하나하나 깨부수며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이미 ‘메날두의 시대’를 오롯이 ‘정백강의 시대’로 만들지 않았던가.

“오랜만이야, 백강. 이렇게 일찍 붙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경기에 앞서 몸을 푸는데 드록바가 와서 인사를 건넸다.

“그러게나 말이야. 오늘 컨디션은 어때?”

“그냥 그렇지 뭘.”

드록바도 벌써 서른넷.

EPL을 자근자근 씹어먹던 파괴적인 모습은 이미 잃은 상태였다.

모든 대회 통틀어 넣은 골이 10골이 채 안 됐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첼시를 떠난다는 이야기도 스멀스멀 나오는 중.

한때는 신이라 불리던 사나이도 흘러가는 세월을 막지는 못했다.

“대진 추첨할 때 당연히 네가 올 줄 알았어. 엉뚱하게도 에투 녀석이 왔더라고.”

나의 농담에 드록바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UEFA가 나를 별로 안 좋아해. 보는 눈도 부족하고 말이지.”

* * *

삑-

우오오오오오-

휘슬, 그리고 경기장을 가득 메운 첼시 팬들의 거센 함성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수들만큼이나 팬들의 염원 또한 간절해 보였다.

4-2-3-1 포메이션을 들고나온 첼시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선수는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의 후안 마타.

발렌시아에서 뛰다가 이번 시즌 개막 전 첼시에 이적했는데, 팀에 합류하자마자 팀 내 득점 4위, 어시스트 1위에 오르며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이 친구도 알고 보면 ‘믿고 쓰는 레알산’.

축구계의 유니세프, 아낌 없이 주는 나무가 우리 팀이었다.

“온다!”

바로 그 마타가 공을 잡자 라모스가 긴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기본적으로 킥력이 좋아서 슈팅과 패스가 모두 가능한 선수라, 수비하기 까다로운 타입이었다.

일차적으로 저지에 나서는 알론소.

마타의 보디가드로 드록바가 나섰다.

비록 늙어서 폼은 떨어졌을지언정 피지컬에서 나오는 파워는 여전했다.

페페를 몸싸움으로 완전히 제압한 후 마타에게서 볼을 받아 키핑 후 리턴 패스.

이렇게 동료들과의 유기적인 호흡을 통해 탈압박하는 게 마타의 스타일이었다.

알론소를 손쉽게 벗겨낸 마타가 자신에게 어그로가 쏠린 틈에 침투하는 프랭크 램파드에게 땅볼 패스를 깔아주었다.

퍼어엉-

작정하고 때린 램파드의 중거리포가 크로스바를 스치듯 날아가며 골라인 아웃.

빗나가긴 했지만 간담이 서늘한 슈팅이었다.

드록바의 노쇠화와 페르난도 토레스의 부진으로 공격진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첼시가 꾸역꾸역 골을 넣을 수 있는 건 ‘미들라이커’ 램파드의 존재 덕분이었다.

미드필더 주제에(?) 이번 시즌 팀 내 득점 1위를 달리는 중이었으니 말 다했지 뭐.

카시야스 주장이 골킥을 하기 전에 살짝 시간을 끌었다.

너무 쉽게 슈팅을 허용하는 바람에 다소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사소한 센스 하나하나가 다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뻐엉-

길게 내지른 골킥이 예쁜 호를 그리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낙하 지점에 자리를 잡고 다음 플레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옆구리 쪽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삐비비빅-

그리고 주심의 휘슬.

나를 마크하던 존 테리가 점프하면서 팔꿈치를 들이밀어 가격한 것이었다.

“위험한 플레이 하지 마세요! 다음부턴 바로 카드 꺼냅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파올로 타글리아벤토 주심이 테리에게 구두로 경고를 주었다.

알았다는 듯 오른손을 펴드는 테리의 두 눈이 어쩐지 기분 나쁘게 빛났다.

프리킥으로 경기 재개.

습관적으로 마르셀루 쪽을 봐주려던 알론소가 살짝 당황하더니 뒤로 공을 돌렸다.

우리 공격의 첨병인 마르셀루는 상대 오른쪽 윙어 하미레스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중.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박지승 선배가 개척한(?) ‘수비형 윙어’ 전술을, 디 마테오 감독이 하미레스를 통해 써먹는 느낌이었다.

팀의 오른쪽 공격을 책임지는 아자르는 역시 상대 왼쪽 윙어인 살로몬 칼루가 밀착 마크하고 있었다.

이거이거, 제대로 칼을 갈고 오셨구만.

진짜 우리를 한 번 이겨볼 생각인가?

첼시의 수비가 당초 생각보다 훨씬 탄탄했다.

“백강!”

후방에서 공을 잡은 라모스가 나에게 한 번에 연결되는 롱패스를 시도했다.

아 진짜!

이번에도 테리였다.

슬쩍 뒤로 다가오더니 내가 점프하는 순간 등을 힘껏 밀쳤다.

뭔가 안 좋은 낌새를 눈치채고 조심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크게 떨어질 뻔했다.

더 짜증나는 건 파올로 주심이 이 장면을 못 봤다는 사실이었다.

경기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대로 진행되었고, 내가 못 건든 공을 따낸 다비드 루이스가 멀리 걷어냈다.

한 번은 실수할 수 있지만 두 번째부터는 명백한 고의다.

“이봐, 적당히 하지?”

내가 윽박지르자 테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뭘? 내가 뭘 했는데?”

“하긴… 네가 주장 완장 달고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밖에 없겠지. 아, 하나 더 있네. 친구 여자 건드리는 거. 웨인 브리지는 잘 지내나 몰라?”

동업자 정신은 쌈을 싸 드신 플레이를 두 번이나 하셨으니, 나도 예의 따위는 버리기로 했다.

치명적인 약점을 저격당하자 테리의 얼굴이 급격하게 시뻘게졌다.

“다… 닥쳐.”

“이제 이해되네. 인성이 파탄 났으니까 방금 같은 더러운 짓거리도 할 수 있는 거겠지?”

“닥치라고 했다…”

“원한다면 닥쳐줄게. 근데 더 자극하진 마. 너한테도, 그리고 팀한테도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

뭐, 테리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나를 막을 수 없었으니까 본인도 조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법.

테리는 방금 그 선을 좀 세게 넘었다.

레알의 에이스와 첼시의 주장이 설전을 벌이는 동안에도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첼시는 전반적으로 수비에 무게중심을 둔 채, 공격 작업은 마타의 창의성과 램파드의 한 방에 기대를 거는 모양새였다.

매우 실리적인 작전이었는데 효과적이었다.

선수들의 전반적인 기술 수준은 아무래도 우리 쪽이 더 훌륭했지만, 피지컬 부문은 첼시가 우위에 있었다.

우리 팀의 최대 장점인 강력한 측면이 거친 몸싸움을 앞세운 수비에 약간 말렸다.

모드리치와 더브라위너 역시 램파드나 존 오비 미켈 같은 선수들을 힘으로 이겨내기는 어려웠다.

라리가와 EPL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전개였다.

양 팀의 전력 차를 생각해 보면, 일단은 첼시의 게임 플랜대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파아앙-

오늘따라 볼 배급에 어려움을 겪는 알론소가 다시 한번 ‘믿을맨’인 내게 기대를 걸어 보았다.

퍼억-

하, 진짜 장난하나.

테리가 자연스럽게 경합하는 척하면서 손바닥을 활짝 펴서 내 얼굴을 밀쳤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파올로 주심이 정확하게 보고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저요? 왜요? 저 아무것도 안 했어요.”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어필하는데, 정말 경기만 아니면 죽빵 한 대 갈기고 싶다.

아마 테리가 원하는 게 그거겠지.

나를 흥분시켜서 경기장 바깥으로 몰아내는 것.

혹시 같이 퇴장당하더라도 첼시 쪽이 개이득이다.

내가 화나는 건 하드 파울을 당한 것 자체보다, 그걸 한 녀석이 테리라는 사실이다.

그래도 나름 월드클래스 센터백 소리 듣던 녀석이 이렇게까지 치졸하게 하고 싶을까.

“야! 이 새끼야! 미쳤어?”

분쟁의 냄새를 맡은 페페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됐어, 하지 마. 괜찮으니까.”

나보다도 더 흥분한 페페를 급히 뜯어 말렸다.

테리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원래 한국인은 삼세번이야.

앞으로 가열차게 조져 줄게, 기대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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