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커허억!”
나도 모르게 신음성이 절로 나왔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지.
2년 만에 다시 하게 된 반 부이텐과의 ‘몸의 대화’는 역시나 강렬했다.
어째 그때보다 힘이 더 세진 것 같기도 하고.
이텐 형, 그동안 운동 열심히 하셨나 봐요.
아무래도 평소 하던 스타일대로 플레이하면 고생깨나 할 것 같았다.
파워는 몰라도 민첩성과 순간 스피드는 내가 우위에 있으니, 후방에서부터 잘라들어가는 식으로 요리해보자 싶었는데 상대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반 부이텐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후방 쪽에 자리를 잡자, 이번에는 수비형 미드필더 루이스 구스타보가 즉시 밀착 마크를 시작했다.
발이 느린 나로서는 거친 마크를 뚫어내고 진입해서 헤더까지 연결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페널티박스 안에선 반 부이텐, 밖에선 구스타보라.
구스타보가 나만 바라보면서 생길 수 있는 중원 공백은, 토마스 뮐러가 많이 내려와주면서 해결했다.
하인케스, 이 귀엽고 깜찍한 양반.
나 하나 막겠다고 연구를 엄청나게 하셨네.
내가 어떻게 공격을 풀어가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 사이, 프랑크 리베리가 공을 잡았다.
왼쪽 측면을 따라 천천히 전진하며 기회를 엿보는 리베리.
바르셀로나의 ‘LCD’ 라인도 여러 차례 상대해 본 우리 4백이지만, 오늘은 라모스가 없었기 때문에 느낌이 좀 달랐다.
방심은 절대 금물.
터엉-
와우! 아니지, 젠장할…
아르벨로아와 모드리치가 연합해서 형성한 수비 블록이, 자세를 한껏 낮춘 채 들이미는 리베리의 저돌적인 돌파에 손쉽게 뚫렸다.
몸이 아주 가벼워 보였다.
페페가 커버하러 나가는 사이, 원톱으로 나선 마리오 고메즈가 순간적으로 침투를 시도했다.
이번 시즌 절정의 폼을 과시하며 뮌헨의 공격을 이끌고 있는 리베리.
그는 동료들의 움직임을 놓치는 남자가 아니었다.
투욱-
딱 하나 보이는 코스로 절묘하게 공을 찔러넣는 리베리의 오른발.
고메즈가 완벽한 일대일 찬스를 맞았다.
위기일발이었다.
촤아악-
“나이스 태클!”
지켜보던 더브라위너가 소리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결정적인 장면에 등장한 우리의 영웅은 바란.
공만 정확하게 건드리는 깔끔한 슬라이딩 태클로 베르나베우의 홈팬들을 열광시켰다.
페페가 넘어진 바란을 일으키며 격렬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어지는 코너킥 상황에서도 고메즈보다 한 발 앞서 머리를 갖다 대며 헤더 클리어를 하는 바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면서도 든든한 모습을 연이어 보여주었다.
바란이 내내 이렇게만 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지.
루즈볼을 따낸 알론소가 아자르 쪽으로 한 번에 연결되는 롱패스를 뿌리며 템포를 끌어올렸다.
지공의 상태가 영 시원찮을 땐 역시 속공이 제맛.
부지런히 달려와 수비에 참여한 리베리가 아자르의 앞을 막아섰다.
양 팀 돌격대장 간의 맞대결.
물론 승자는 아자르였다.
리베리의 수비력이 포지션 대비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우리 팀 최고의 드리블러인 아자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삐빅-
탄력받은 아자르를 정상적으로 수비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미션.
뮌헨의 레프트백 디에고 콘텐토가 미련 없이 파울로 끊었다.
정신없는 속공 상황에서 크로스 기회를 주는 것보다, 프리킥을 허용하는 게 낫다는 뜻이었다.
일단 수비가 정돈된 후에야 나를 막을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어서겠지.
예상대로, 세트피스 상황에서 나에 대한 경계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반 부이텐은 말할 것도 없고, 구스타보 역시 187cm 장신에 탄탄한 체격의 소유자.
그런 두 사람이 내게 바싹 붙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이 치사한 녀석들아, 사람이 숨은 좀 쉬자.
예전에 뮌헨을 상대할 때는 찰나의 방심을 틈타서 수비를 떨쳐내고 골도 넣었었는데, 오늘은 그런 기대를 접어야 할 것 같았다.
더블팀을 붙은 두 명 외에 다른 선수들도 나를 계속 곁눈질하고 있었기 때문.
여차하면 보디체크도 불사할 기세였다.
이게 다 지난 2년 동안 내가 너무 거물이 되어버린 탓이다.
내가 거친 사내들의 땀냄새에 질식하기 직전, 알론소의 오른발이 춤을 추었다.
파앙- 철썩-
응? 뭐야?
“우와아아아악!!!”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 첫 골을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무대에서 터뜨린 바란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절규하며 필드 위를 질주했다.
이런 전개는 전혀 예상 못했는걸?
* * *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우리 팀의 ‘넘버 2 뚝배기’인 라모스는 없었지만, 바란이 일을 내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게, 바란은 신장이 191cm에다가 스피드나 점프력 같은 운동능력도 특급이었다.
오매불망 나만 바라보고 있던 뮌헨 녀석들은 돌아 들어가는 바란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쳤고, 나를 미끼로 하는 세트피스에 도가 튼 알론소는, 바란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로빙 패스를 전달했다.
하인케스 감독이 경우의 수를 어디까지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18세 소년에게 공수에서 이렇게까지 얻어맞을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결국 전반전은 그대로 1-0 종료.
애초에 힘든 승부를 예상했었기 때문에,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한 전개였다.
“훌륭해, 정말 훌륭했다, 라파엘.”
평소 칭찬에 인색한 편인 무리뉴 감독이지만, 이번 하프타임만큼은 달랐다.
바란이 잘한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 애송이 유망주.
그런데 이렇게 큰 경기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선보이고 있었으니 기대를 300% 충족시킨 모습이었다.
게다가 코치진들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기용을 결정한 사람이 바로 무리뉴 감독 본인 아니던가.
전례를 찾기 힘든 극찬에는 자신의 선수 보는 눈에 대한 ‘셀프 칭찬’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바란의 눈동자 역시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45분 동안 나보다 더 활약하는 선수는 오랜만에 보는 기분.
물론 팀의 승리가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에이스는 어디까지나 나다.
좀 더 분발할 필요가 있겠어.
* * *
그 어렵다는 ‘정백강 봉쇄’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엉뚱한 친구에게 골을 허용한 뮌헨.
2차전에는 우리 수비의 핵심인 라모스가 돌아오기 때문에, 오늘보다 득점 난이도가 더 올라갈 가능성이 높았다.
또 챔스 토너먼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원정골 아니겠는가.
하인케스 감독은 후반전 초반에 반드시 골을 넣겠다는 각오로, 선수들을 대거 전진 배치했다.
딱 두 명, 반 부이텐과 구스타보만 빼고 말이다.
11명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는 스포츠인 축구에서 2명이 따로 논다는 것.
그건 라인 밸런스를 포기하더라도 나한테 골은 절대 안 먹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이쯤 되면 전생에 나랑 무슨 악연이 있었나 싶다.
작정하고 몰아치기 시작하는 뮌헨의 공격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왼쪽의 리베리, 오른쪽의 아르연 로벤, 중앙에는 토니 크로스가 중심 축을 이뤘고, 공을 돌리면서 직접 슈팅을 하거나 고메즈-뮐러 투톱에게 날카로운 스루패스를 지속적으로 공급했다.
분데스리가에서 왜 도르트문트에게 밀렸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의 경기력이었다.
정작 그 도르트문트는 조별리그에서 내 위대한 머리로 박살을 내버렸었는데 말이지.
상성이란 건 정말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뮌헨이 워낙 라인을 올렸기 때문에 간헐적으로 역습 기회가 생겼지만,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반 부이텐과 구스타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에 대한 밀착 마크를 멈추지 않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공간은 센터백 제롬 보아텡과 라이트백으로 나온 필립 람이 무지막지한 기동력으로 완벽하게 커버해냈다.
세계 제일로 꼽히는 우리 팀의 역습이 이렇게까지 막히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살리지 못한 찬스는 위기가 되어 돌아오는 법.
후반 12분, 경기의 흐름이 180도 뒤바뀌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씨앗을 뿌린 녀석은 리베리.
속도와 기술이 결합된 특유의 드리블로 아르벨로아를 또 한 차례 농락하며 코너킥보다 훨씬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어냈다.
키커로는 크로스가 나섰다.
이 독일산 패스 기계의 오른발이 얼마나 정교한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나를 포함한 우리 선수단 전원이 페널티박스 안쪽에 진을 치고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크로스는 애초에 박스 안쪽 상황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뻐엉-
각도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골문을 노리고 감아 찬 대포알 슈팅이 크로스바를 강타했다.
까아앙-
직접 때릴 거라곤 전혀 예상 못했던 우리 수비진이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고, 끝까지 날카로운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던 뮌헨의 주장 람이 루즈볼에 가장 먼저 달려가서 왼발을 갖다 댔다.
그때 모두는 생각했다.
‘골이구나.’
그런데 상황은 단순한 동점보다 더 안 좋게 흘러갔다.
데뷔 이래 최고의 하루를 보내고 있던 바란이 당황한 나머지 공의 진로를 막기 위해 오른팔을 내뻗은 것이다.
키도 크겠다, 진지하게 골키퍼 전향을 고려해 볼 만한 멋진 선방이었다.
그리고 이 하이라이트 필름의 대가는 컸다.
* * *
우- 우- 우—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엄청난 야유로 뒤덮였다.
판정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주심은 전혀 잘못이 없었다.
‘핸드볼 반칙으로 상대방의 득점을 저지한 경우 레드카드를 부여한다’.
피파가 정한 규정에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문구였다.
어쩌면 영웅이 될 수도 있었던 18세 소년은,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한 셈이었다.
키커로 나선 뮐러는 카시야스 주장을 완전히 속여 넘기며 PK를 성공했다.
이제 스코어는 1-1.
게다가 30분 넘게 10명이 뛰어야 하는 최악의 조건이 만들어졌다.
원정 무승부만 해도 충분히 만족했을 뮌헨 녀석들은, 그보다 훨씬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 되었고.
바란은 60분을 뛰면서 딱 한 번의 실수를 했는데, 그 한 번의 파장이 너무나도 거대했다.
무리뉴 감독은 아자르를 빼고 알비올을 투입하며 4백의 빈자리를 채웠다.
여기까지 온 이상 지상목표는 추가 실점을 막는 것.
“Mein Kopf tut so weh!”
의외의 전개에 잔뜩 신이 난 하인케스 감독이 벤치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제자들에게 힘을 불어 넣었다.
독일어는 잘 모르지만 대충 “박살내버려!” 이런 뜻이겠지.
뮌헨 정도 되는 팀이 한 명 많은 상태에서 쉽게 공을 빼앗겨 줄 리가 없었다.
점유율 싸움은 완전 포기.
웅크리고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다만 의외였던 것 하나는, 무리뉴 감독이 내가 아닌 벤제마를 잔뜩 내려서 수비 요원으로 활용했다는 것.
보통 이럴 때는 나의 높이를 활용해서 상대 예봉을 꺾는 게 정석이었다.
반 부이텐과 구스타보의 합동 수비에 꽁꽁 묶이며 회귀 이후 최악이라고 해도 좋을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지만, 무리뉴 감독은 아직 나를 믿는 듯했다.
그래,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한 건 만들어내는 게 에이스가 할 일이지.
나는 활동량을 최소로 가져가면서, 두 다리에 최대한 힘을 비축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주인공 저격수처럼, 끈질기게 득점 기회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마침내 그 기회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