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스포츠에서 경험, 특히 우승 경험이 왜 중요한가?
바란이 퇴장당한 이후의 경기 내용은 위 질문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뮌헨의 맹공을 버텨내는 우리 팀의 수비력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사비! 좀 더 빨리 붙어줘야지!”
“로벤 들어온다. 간격 좁히고! 오케이!”
“그냥 때리게 둬, 내가 막을테니까. 대신 사람 잡아!”
우리에겐 토너먼트를 끝까지 이겨 본 선수들의 특권인 ‘위닝 마인드’가 있었고, 그 정신은 몸을 사리지 않는 악착같은 수비로 이어졌다.
결정적 위기 때마다 터진 카시야스 주장의 눈부신 선방은 보너스였다.
뮌헨이 신나게 때리다가 제풀에 지칠 무렵인 후반 33분.
오늘 신출귀몰하며 셀 수 없이 많은 클리어를 했던 페페가, 또 한 번 토니 크로스의 중거리슛을 몸으로 막아낸 뒤 최대한 멀리 차냈다.
이건 패스도 뭣도 아니었다.
그냥 다음 공격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급하게 뻥 걷어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축구에서 기회라는 건 때로 엉뚱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법.
“으아아아아!”
나는 아껴 놓았던 마지막 힘을 다해 무작정 달렸다.
잠깐 공격에 참여했던 구스타보가 무섭게 나를 쫓아왔고, 반 부이텐은 일단 자리를 지키면서 변수에 대비했다.
스타트는 내가 빨리 끊었지만, 정백강 발 느린 건 세상이 다 아는 일.
부지런히 쫓아온 구스타보와 도착은 거의 동시에 했다.
터치라인 바깥으로 벗어나기 직전 겨우 공을 겨우 살려낸 후 구스타보를 마주보며 섰다.
“백강 혀엉!”
어린 게 좋긴 좋구나.
아직 체력이 남아 있는 더브라위너가 내 이름을 외치며 후방에서부터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백패스를 했을 만한 상황.
그러나 지금은 템포를 늦출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상대 수비가 정돈되기 전에 변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전진이 필요했다.
백강아, 머리를 써보자.
지금 내 앞에 있는 상대는 하인케스 감독으로부터 ‘정백강 봉쇄’라는 특명을 받고 나온 구스타보야.
이 녀석은 우리 팀 경기를 수도 없이 돌려보며 나에 대한 분석을 마쳤겠지.
그렇다면 오히려 그 분석을 역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더브라위너 쪽으로 시선을 두는 순간, 당연히 패스할 거라고 생각한 구스타보의 무게중심이 미세하게나마 후방 쪽으로 쏠렸다.
에라 모르겠다, 해보자.
터엉-
됐다, 통했다.
내 생각대로였다.
구스타보 녀석의 머릿속에 ‘정백강의 돌파’라는 옵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잔디 위에서 처음 시도해보는 것 같은 정백강의 ‘치달’.
오른쪽 측면에서 구스타보를 벗겨낸 후 중앙 쪽으로 밀고 들어가며 최대한 빨리 달렸다.
이제 눈앞에 있는 수비수는 두 명.
반 부이텐과 마누엘 노이어였다.
심리적 허점을 이용해 구스타보를 뚫어내긴 했지만, 반 부이텐까지 드리블로 제칠 자신은 전혀 없었다.
그 괴물 같은 덩치와 더 몸을 부대끼고 싶지도 않았고.
이도 저도 안 된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케빈! 바로 띄워! 높이!”
뒤쪽에서 열심히 따라오던 더브라위너에게 땅볼 패스를 깔아주면서 주문했다.
내 말이라면 깜빡 죽는 더브라위너가 트래핑 후 곧바로 로빙 패스를 시도했다.
다리야, 조금만 더 버텨다오.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점프.
공중에서 반 부이텐의 강철 같은 몸뚱아리와 충돌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끝내 공에 머리를 갖다 댔다.
콰아아앙-
제발 들어가라!
투욱-
노이어가 쭉 뻗은 오른손 장갑 끝자락에 공이 맞았다.
틀렸나?
철썩-
됐다.
끝내 공을 건드린 노이어의 반사신경은 경이적인 것이었으나, 슈팅이 워낙 강력해서 경로를 바꾸진 못했다.
우오오오오오!!!!!
홈에서 펼쳐지는 반코트 게임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관중석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졌다.
그리고 영웅에 대한 찬사가 시작되었다.
Gran- Cabeza!!!
Gran- Cabeza!!!!!!
뮌헨전에서 넣는 골은 왜 항상 이리도 극적인가.
관중석 앞으로 달려가서 오른손 검지를 높이 들었다.
나의 리듬에 맞춰 일제히 이마를 두드리기 시작하는 수만 명의 관중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 * *
[레알 마드리드,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서 2-1 신승]
[정백강 짜릿한 결승골… 슈퍼스타의 품격 증명하다]
[10명이 뛰고도 승리한 레알, 디펜딩 챔피언의 위엄]
무리뉴 감독은 내가 역전골을 넣자마자 곧바로 아껴두었던 ‘정백강 시프트’ 카드를 꺼내들었다.
공중볼로 뭘 해볼 생각은 하지 말라는 엄중 경고였다.
대신에 내가 수비하러 내려가면서 역습 부담을 덜게 된 뮌헨은, 공격의 수위를 한층 높이며 정말 미친 듯이 우리 골문을 두드려댔다.
혈전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공방이었다.
결국 오른쪽 골포스트를 강타하며 골라인 아웃된 로벤의 슈팅을 마지막으로 휘슬이 울리면서 파란만장했던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아쉽다, 정말 아쉽다. 그래도 희망을 봤다. 비록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정백강에 대한 수비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2차전은 우리 홈에서 열리는 만큼, 더 좋은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으로 갈 팀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한 채 끝내 패배한 하인케스 감독은, 2차전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한편 우리와 뮌헨의 경기 하루 뒤에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서 펼쳐진 밀란과 바르셀로나의 대결에서는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
축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르셀로나의 승리를 예상했던 매치업이었고, 실제 경기 내용도 그렇게 흘러갔다.
전반 5분만에 메시가 얻어낸 페널티킥을 호날두가 성공시켰을 때까지만 해도 모두가 생각했다.
‘역시는 역시구나.’
너무 이른 시간에 골이 터져서 어쩌면 대참사가 나오진 않을까 걱정되었던 흐름.
그러나 밀란의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감독은 팀이 뒤지고 있는 와중에도 수비라인을 한껏 내린 채 실점을 막는 데 주력했다.
그 콧대 높은 즐라탄까지 하프라인 밑으로 내려와서 몸을 던져 가며 수비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감독의 지시도 있었겠지만, 바르셀로나라는 팀에 대한 즐라탄의 증오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카테나치오’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이탈리아 팀 특유의 늪 수비에 말린 바르셀로나는 결국 추가골을 넣지 못했고 0-1로 전반전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후반전.
점유율이나 슈팅 수 등 모든 면에서 바르셀로나가 경기를 주도해 나갔지만, 역시나 골은 터지지 않았다.
어째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간다 싶었는데…
이번 시즌 세리에 득점 1위를 질주 중인 남자, 즐라탄이 상황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월드클래스 센터백으로 차근차근 성장 중인 티아구 실바가 호날두의 돌파 시도를 저지한 후 호나우지뉴에게 공을 전달했고, 호나우지뉴는 전방에서 대기하던 즐라탄의 발 앞에 정확한 로빙 스루패스를 떨궈 놓았다.
여기가 이 경기 최고의 하이라이트.
즐라탄이 무슨 프리킥을 하듯 골문을 쓱 바라보며 공을 한번 툭 차놓은 후 때린 38m짜리 중거리포가 미친 속도로 날아가더니 골문을 그대로 꿰뚫었다.
관중들이 약 0.8초 동안 소리지르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환상적인 골이었다.
이제 경기는 원점.
밀란이 휘두른 철퇴에 제대로 얻어맞은 바르셀로나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쉴 새 없이 몰아붙였지만 ‘밀란 성벽’은 정말로 굳건했다.
발로 막고 몸으로 막고 손으로 막으며 바르셀로나의 필사적인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그렇게 후반 40분이 넘어가자, 바르셀로나의 승리를 점쳤던 사람들은 무승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축구의 신은 평화로운 결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완벽해 보이는 바르셀로나의 고질적인 약점, 세트피스 수비가 발목을 잡았다.
역습 상황에서 호비뉴가 얻어낸 코너킥이 즐라탄의 두 번째 골로 연결되면서 역전.
그것으로 경기 끝이었다.
볼 점유율 65% 대 35%
패스 성공률 88% 대 56%
슈팅 수는 25 대 3
하지만 스코어는 1-2.
축구란 골을 넣는 스포츠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켜주는 한판이었다.
“메시? 호날두? 비야? 다 괜찮은 선수들이다. 그러나 역시 즐라탄이 최고다.”
만장일치 MOM에 선정된 즐라탄은 특유의 3인칭 화법을 뽐내며 포효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두 구단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린 1차전이 이렇게 끝났다.
이제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는 딱 한 번의 승부만이 남아 있었다.
* * *
똑똑똑-
“들어와.”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앉지.”
중요한 승부가 연이어 벌어지는 시기라 그런지, 무리뉴 감독의 얼굴이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요새 잠을 잘 못 주무시나 봅니다, 감독님.”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나서 자도 늦지 않지.”
허세가 잔뜩 섞인 게 참 주제 무리뉴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날 보자고 했나? 백강?”
그렇다.
보통은 무리뉴 감독이 나를 불러서 면담을 하곤 했는데, 오늘은 내가 자청한 만남이었다.
미사여구로 포장할 만큼 먼 사이도 아니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1차전 경기력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결승골의 사나이께서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닌가?”
“감독님께서 저한테 기대하는 수준은 그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스스로의 기준도 충족하지 못했고요.”
무리뉴 감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래서 너를 좋아한다니까. 이미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지만 끊임없이 올라가려는 향상심. 나도 그걸 갖고 있지.”
은근슬쩍 자기도 최고라고 묻어가시네요, 감독님.
“그래. 네가 아무 대책 없이 올 성격은 아니고, 뭐 건의할 내용이라도 있나?”
역시 무심술사, 내 마음을 잘 아는군.
“네, 감독님. 2차전에선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한참 동안 이어진 나의 설명을 신중하게 듣던 무리뉴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흥미로운 생각이야.”
이 비밀 대화(?)로부터 사흘이 지난 2012년 4월 25일.
뮌헨의 홈구장인 알리안츠 아레나에 구름 관중이 몰려들었다.
뮌헨에게는 2000-2001 시즌 이후 11년 만에 찾아온 빅 이어의 기회.
비록 1차전에서 아깝게 패하긴 했지만, 가능성만큼은 충분히 확인한 일전이었다.
중요한 원정골도 하나 넣었고, 천하의 정백강을 고작 1골로 싸게 막았으니 말이다.
“뮌헨 새끼들, 다 죽었다 오늘.”
1차전에 경고 누적으로 결장했던 라모스가 축구화 끈을 질끈 동여매면서 호기롭게 외쳤다.
복귀한 레알 마드리드의 부주장을 제외하면, 양 팀 모두 선발 라인업은 1차전과 동일했다.
아, 정확히 말하면 ‘선수 이름만’ 같았다.
2차전을 위해 나와 무리뉴 감독이 짜낸 필살기가 있었으니까.
“Was machen sie?”
킥오프 이후 우리의 진형을 확인한 반 부이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
이미 늦었어요, 이텐이 형.
45분 동안 지옥을 한 번 보여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