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삑- 삑- 삑—
“됐다!”
라모스가 두 팔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백강 혀엉!”
“해냈어요!”
벨기에 듀오 아자르-더브라위너가 깡총깡총 뛰며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들도 우르르 필드 위로 몰려나왔다.
관중석은 어마어마한 함성과 각종 악기 소리로 뒤덮였다.
하지만 화룡점정은 역시 페페의 몫이었다.
“씨이발! 조온나 좋아!!!”
2012년 5월 5일.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라리가 37라운드 그라나다와의 경기 직후의 풍경이었다.
우리 팀은 이 게임에서 승리를 거두며, 남은 38라운드 결과에 관계 없이 트레블의 첫 관문인 리가 우승을 확정지었다.
36승 1패라는 압도적 성적에 비하면 다소 늦은 소식.
이게 다 35승 2패를 기록하며 지독하게도 쫓아왔던 바르셀로나 때문이었다.
엘클라시코 두 번을 모두 승리하지 못했더라면, 최종 라운드까지 갈 뻔했다.
디에고 시메오네가 새로 부임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패하며 전승 우승이 좌절된 게 좀 아쉽긴 하지만,(물론 나는 뛰지 않았다) 호날두의 바르셀로나 이적에도 불구하고 리가 트로피를 지켜낸 것은 높게 평가받을 만했다.
이제 이번 시즌 남은 경기는 딱 3개.
크게 의미가 없어진 리가 38라운드, 코파 델 레이 결승, 그리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이었다.
그리고 두 번의 결승전은 그 상대가 동일했다.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한 바르셀로나.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이르다. 아직 시즌 중 3분의 2가 남은 것과 다름없으니까.”
명색이 우승 소감 인터뷰인데, 무리뉴 감독의 어조에는 기쁨이라는 게 별로 섞여 있지 않아 보였다.
솔직히 나도 무리뉴 감독과 비슷한 기분이었고.
인테르와 레알에서 2년 연속으로 연속 트레블을 하고 나니, 이제 리가 우승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어쩌겠는가.
계속 이기는 게 좀 미안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 * *
2012년 5월 19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비센테 칼데론에서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이 열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결승전치고는 우리 팀을 저주하는 현수막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더블이냐, 바르셀로나의 이번 시즌 첫 트로피냐.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시작된 결승전은, 화끈한 난타전이 될 거란 예측을 비웃듯 ‘방패 VS 방패’ 대결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으로, 그들의 축구 철학을 그대로 구현하던 티토 빌라노바 감독의 파격적인 선택 때문이었다.
자기네들 특유의 점유율 축구 대신, ‘LCD’를 앞세운 역습 전술을 들고나온 것이다.
선발 명단부터 충격 그 자체였다.
사비와 이니에스타가 모두 벤치에서 스타트했다.
대신 마스체라노와 파브레가스가 주전으로 나섰다.
더 강한 수비, 더 빠른 템포를 추구하는 선수 구성.
정말 콘셉트 한 번 확실했다.
티키타카로 나섰다가 매번 깨지기만 하니, 겨우겨우 짜냈을 고육지책이었다.
그 잘나신 축구 철학을 포기할 줄은 몰랐던 우리 입장에서도 다소 당황스러운 전개였다.
수비가 다 제자리에 있는 상황에서도 막기 힘든 ‘LCD’가 역습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거의 정백강급 재앙 아니겠는가.
그러니 무리뉴 감독도 섣불리 공격적 운용을 하기가 어려웠다.
한쪽이 공격을 해야 역습이라는 게 성립할 텐데, 서로 가드를 바짝 올린 채 ‘니가 와’를 시전.
결국 전반전은 변변한 골 찬스 한 번 없이 0-0으로 끝났다.
잔뜩 기대하고 치킨을 시켰을 한국 팬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지루한 45분이었다.
관중석에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찐한 욕설과 함께 물병을 던지는 분들도 계셨다.
뭐, 돌 맞아도 할 말 없는 경기력이긴 했지.
이대로 가면 승부차기로 결판이 나게 생겼다.
경기 흐름을 바꾸려면 무리뉴와 티토, 둘 중 한 사람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 * *
“좋아.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한 번 해주지.”
하프타임 동안 작전 지시를 하던 무리뉴 감독이 작전판을 거세게 두드리며 말했다.
솔직히 의외였다.
못 참고 칼을 빼 드는 쪽은 필경 티토 감독일 거라 생각했는데, 무리뉴 감독이 먼저 움직일 줄이야.
“위험하진 않겠습니까? 감독님.”
카시야스 주장이 우려를 표했다.
최고 속도로 달려오는 ‘LCD’를 막아내야 할 최종 책임자로서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무리뉴 감독이 주장을 보며 미소지었다.
“혹시 두려운가?”
“그… 그건 아닙니다만…”
주장이 말끝을 흐렸다.
저렇게 빤히 바라보면서 묻는데 누가 무서워서 그렇다고 하겠어요, 감독님?
“이케르, 네 마음도 물론 이해한다. 그러나 오늘 경기는 단순한 컵 대회 우승 결정전이 아니야. 6일 뒤에 있을 진짜 이벤트, 챔피언스리그 결승의 전초전이지. 우리는 저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줄 필요가 있어. 티키타카든, 킥 앤드 러시든,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전술을 사용하더라도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는 먹히지 않는다는 그런 공포 말이야.”
챔스 결승의 전초전이라.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주장의 표정에는 여전히 근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마르셀루?”
“넵.”
“봉인 해제다. 후반전에는 마음껏 날뛰도록.”
“그렇게 하죠.”
메시 수비에 집중하느라 오버래핑을 자제하던 마르셀루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케빈도 더 적극적으로 올라가. 기회가 나면 과감하게 때리고.”
“옛썰!”
더브라위너가 깜찍발랄하게 대답했다.
“백강?”
“네, 감독님.”
“너는… 가서 완전히 박살내고 와라.”
“알겠습니다.”
나를 무슨 헐크처럼 취급하시네.
* * *
무리뉴 감독의 살벌한 주문을 듣고 새로운 마음으로 나서는 후반전.
첫 슈팅은 더브라위너의 왼발에서 나왔다.
마르셀루가 올리고 내가 떨궈 준 볼을 받아 그대로 하브발리슛.
비록 공이 발데스 골키퍼 대신 관중석에 앉아 있던 주근깨 소년에게 날아가긴 했지만, ‘이제 우리 공격한다’는 인상만큼은 확실하게 심어주었다.
과감하게 때리라는 감독님 말씀도 100% 이행했고 말이다.
그리고 이 슈팅으로부터 약 15분 동안, 지금까지의 엘클라시코에서 보기 힘들었던 아주 기묘한 전개가 이어졌다.
우리가 볼 점유율을 60%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경기를 주도했고, 바르셀로나는 잔뜩 웅크린 채 역습 한 방을 노렸다.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 하나.
우리는 점유율 축구를 꽤나 잘했고, 바르셀로나의 역습도 상당히 날카로웠다.
양 팀이 경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극명하게 충돌하면서, 비로소 팬들이 원하던 화끈한 경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먼저 앞서나가기 시작한 건 바르셀로나.
선제골은 후반 16분 만에 호날두의 발에서 나왔다.
마스체라노가 명품 태클로 더브라위너의 공을 탈취한 후, 역습의 첨병인 메시에게 연결.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하던 두 사람의 역할이 그대로 구현되었다.
결정적 차이가 있다면, 메시의 패스를 받는 사람이 국대만 가면 상태가 안 좋아지는 곤살로 이과인이나 세르히오 아게로가 아닌 호날두였다는 사실.
우리 오프사이드 트랩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메시의 로빙 스루패스가 호날두에게 전달되었고, 레알 마드리드에 대한 복수심을 가득 담은 캐논 슈팅이 골망을 갈랐다.
자존심 다 버린 카운터 어택이 먹혀들자, 티토 감독은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다.
바르셀로나 선수들 역시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부짖었고.
호날두는 팬들 앞에 버티고 서서 유니폼의 엠블럼을 거만하게 두드리며 스타 행세를 제대로 했다.
그러나 녀석들의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어설픈 볼 처리로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던 더브라위너가 아자르에게 ‘속죄 스루패스’를 찔러 주었고, 절친의 패스를 받은 아자르는 아드리아누를 상대로 환상적인 플립 플랩을 구사하며 오른쪽 측면을 허물었다.
황급히 백업을 간 푸욜이 필사적으로 발을 뻗어 보았지만 크로스 차단에는 실패.
대가는, 실점이었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고, 문은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 열리는 법.
후반전에만 내 헤더 슈팅을 무려 4개나 선방해 내며 포효했던 발데스도 다섯 번째는 막지 못했다.
콰아앙- 철썩-
후반 23분, 호날두의 엠블럼에 생긴 주름이 채 펴지기도 전에 경기의 균형이 다시 맞춰졌다.
* * *
호날두가 골을 넣었을 때 모두가 속으로 ‘이번에야말로’를 외쳤을 텐데, 정백강의 머리에 자비란 없었다.
냉정하게 보면 1-0이었던 스코어가 1-1이 된 거고, 그저 게임이 새로운 선상에 선 것 뿐이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녀석들이 동점골로 입은 심리적 타격은 생각보다 매우 커 보였다.
특히 피케는 완전 울상이 되어 안쓰러워 보일 정도.
축구판에 나를 싫어하는 선수가 한둘이 아니겠지만 아마 1등은 단연 피케가 아닐까 싶다.
“이제 시작이야!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주장 푸욜이 힘껏 박수를 치며 후배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어째 표정들이 멍한 게, 멘탈 회복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밀어붙여!”
타고난 승부사 무리뉴 감독은 상대가 약한 타이밍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사나이.
지금이 기회임을 직감하고 파상공세를 지시했다.
감독의 명을 받은 모드리치가 중원에서 공을 잡은 파브레가스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EPL에서 뛸 때는, 각각 토트넘과 아스널의 핵심 선수로서 북런던 더비에서 자웅을 겨뤘던 두 천재 미드필더.
당시에는 파브레가스에 대한 평가가 훨씬 높았지만 스페인 이적 후 두 선수의 운명은 많이 바뀌었다.
파브레가스는 사비와 이니에스타에게 밀려 로테이션 멤버로 만족하고 있었고, 우승하고 싶어서 아스널을 떠났지만 바르셀로나에서도 여태 무관이었다.
반면 모드리치는 라스를 밀어내고 트레블 팀의 주전을 꿰찼으며, 이적하자마자 라리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래서 팀을 잘 골라야 한다니까?
촤아아악-
모드리치의 깊숙한 슬라이딩 태클이 공을 덮쳤다.
“파울! 파울이잖아!”
파브레가스가 어필했으나 주심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깔끔하게 공만 건드렸다는 판정.
먼저 몸을 일으킨 모드리치가 주심을 한 번 힐끗 쳐다본 뒤 직접 공을 몰고 전진했다.
“잡았어!”
후방에서 기다리던 부스케츠가 손을 들며 외쳤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결론적으론 못 잡았다.
휘릭- 탁-
무게중심을 한껏 낮춘 채 시도한 헛다리 드리블에 균형을 잃은 부스케츠를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모드리치.
“백강! 크아아악!”
모드리치가 내 머리를 겨냥하고 로빙 패스를 시도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뒤따라온 마스체라노의 거친 백태클이 모드리치의 발목을 제대로 가격했다.
경기는 중단되지 않았고, 어드밴티지 적용.
어차피 막기 힘들다고 생각한 발데스가 뛰어나왔으나 판단이 너무 늦었다.
발데스가 채 점프를 하기도 전에, 내 이마가 먼저 공에 가 닿았다.
투쾅-
텅 빈 골문으로 날아간 헤더 슈팅이 그물을 찢을 기세로 회전하다가 잔디 위로 툭 떨어졌다.
역전골, 그리고…
“안돼!!!”
절규하는 마스체라노.
퇴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