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꺾고 코파 델 레이 우승]
[2관왕 달성 레알, 2년 연속 트레블 정조준]
[정백강 멀티골… ‘바르셀로나 킬러’는 역시 달랐다]
마스체라노가 무리한 백태클로 레드카드를 받는 순간 이미 승부는 결정되었다.
무리뉴 감독은 변수를 주지 않기 위해 즉각 수비 전술로 전환.
바르셀로나 입장에서는 얄밉기 그지없는 판단이었다.
결국 역습으로 벤제마에게 한 골 더 얻어맞으며 3-1로 경기 끝.
우여곡절은 조금 있었지만 더블과 코파 2연패에 성공했다.
오늘도 털린 피케는 기어이 눈물을 쏟았고, 푸욜이 자신보다 키가 한참 큰 후배를 껴안고 한참 동안 위로했다.
이 경기 결과에 대한 후폭풍은 어마어마했는데, 스타트는 팀 레전드인 요한 크루이프가 끊었다.
“90분 내내 눈이 썩는 줄 알았다. 그건 축구라고 부를 수도 없는 쓰레기였다. 티토 그 망할 자식이 한 짓은 바르셀로나에 대한 모욕이었다. 나에게 권한이 있었다면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이미 해고 통보를 했을 거다.”
티키타카를 포기하고 수비적인 전술을 들고나온 것에 대한 분노였다.
이 발언이 도화선이 되어 현지 바르셀로나 팬들의 비난 여론이 무지하게 거세졌다.
- 크루이프가 옳아, 당장 경질해야지!
- 동감 100만 표.
- 이기기라도 했으면 모르는데 또 졌잖아?
- 라이벌이라고 하기도 창피하다.
- 요즘처럼 응원하기 힘든 적이 없었어.
- 보나마나 챔스에서도 형편없이 깨지겠지.
- 말해 뭐해. 이번엔 한 0-5로 시원하게 질걸?
- 차라리 결승에 못 갔으면 좋았겠네.
- 내 말이 그 말이야. 레알 새끼들한테 져서 준우승할 바에는 차라리 먼저 떨어지라고.
- 카탈루냐에서 태어난 게 원망스럽다.
- 나는 이제 에스파뇰로 갈아타려고 해.
- 나도 같이 가자. 화딱지 나서 바르셀로나 경기는 더 못 보겠어.
엄밀히 말해 티토 감독에게 잘못이 있다고는 볼 수 없었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지는데, 감독으로서 그걸 바라만 보고 있는 게 더 직무유기 아니겠는가.
다만 결과가 안 좋았기 때문에 이 모든 비난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비정하디 비정한 프로의 세계.
이번 시즌 가장 중요한 경기를 앞둔 상태에서 팀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닫자 결국 티토 감독이 용단을 내렸다.
“결과와 상관없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제가 감독하는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이다.”
말 그대로 극약처방이었다.
아무리 독한 사람이라도 제발로 나가겠다는 감독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티토 감독의 폭탄 선언에 들끓던 여론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거기에 동기부여라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그의 결정을 존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마지막이 찬란하게 빛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푸욜)
“티토는 내가 유소년 팀에 있을 때부터 이끌어준, 마치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이다. 이렇게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보내진 않을 것이다.”(메시)
“그동안 레알 마드리드에게 많이 져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정말로 다를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사비)
* * *
2012년 5월 25일.
바이에른 뮌헨과의 4강전이 끝난지 딱 한 달 만에 알리안츠 아레나를 다시 찾았다.
쉴 틈 없이 달려온 2011-2012 시즌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2년 연속 트레블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에 도전하는 레알 마드리드와, 배수진을 치고 맞서는 숙명의 라이벌 바르셀로나.
두 팀이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 본연의 스타일대로 상대하겠다. 잔재주는 없다.”
코파 결승에서 홍역을 겪었던 티토 감독은 정정당당한 힘싸움을 공언했다.
티키타카의 핵심인 사비와 이니에스타도 다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경기만큼은 ‘바르셀로나스럽게’ 치르겠다는 의지였다.
“형, 저쪽 분위기가 살벌한데요?”
경기장 입장 전, 바르셀로나 녀석들을 바라보며 아자르가 속삭였다.
과연 그랬다.
잡담 한 마디 나누지 않고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엄숙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로마 시대의 검투사를 연상시켰다.
흔히 축구를 전쟁에 비유하는데, 정말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딱 그런 모습이리라.
순간 무리뉴 감독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휙 치고 지나갔다.
- 아마 이번 시즌 치른 엘클라시코 중 가장 어려운 경기가 될 거야. 각오 단단히 해.
정신무장의 차이인가.
그동안 지겹도록 만난 바르셀로나이건만, 확실히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성대한 오프닝 세리머니가 끝나고, 드디어 22명의 전사들이 잔디를 밟았다.
벌써 3년 연속으로 경험하는 챔피언스리그 결승.
오직 이 무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오케이, 또 한 번 유럽을 정복하러 가 보실까?
* * *
킥오프.
우와아아아아악-
상상하기 힘든 데시벨의 함성과 함께, 우리 팀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잔재주는 없을 거란 티토 감독의 공언대로 초반부터 라인을 쫙 끌어올린 채 압박에 나서는 바르셀로나.
달려드는 녀석들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았다.
서슬퍼런 기세에 눌린 더브라위너가 길게 백패스.
직접 뭘 해보려던 라모스가 결국 포기하고 카시야스 주장에게 볼을 돌렸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 압박.
비야의 거친 태클을 피해 급하게 차낸 공이 터치라인을 벗어나면서 조금은 허무한 턴오버가 나왔다.
알베스의 스로인으로 경기 재개.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화려한 패싱 쇼가 막을 올렸다.
툭- 탁- 틱-
상대가 누구든 간에 압도적인 점유율로 가지고 놀다가 자연스럽게 승리를 쟁취하는 게 바르셀로나의 축구.
돌아온 사비와 이니에스타, 그 뒤를 받치는 부스케츠까지.
바르셀로나가 자랑하는 역삼각형 3미들은 완벽한 키핑과 탈압박, 볼 배급을 선보였다.
이번 시즌 치른 엘클라시코를 통틀어서 가장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세 얼간이’가 중원을 장악하면서 자연스럽게 경기도 바르셀로나의 흐름.
우리 팀은 근 10분 가까이 공 한 번 잡지 못한 채 녀석들의 꽁무니를 쫓아만 다녔다.
뭐, 사실 이런 상황이 크게 낯설진 않았다.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이 특이했던 거지, 원래 엘클에서 점유율은 항상 밀렸으니까.
어쨌거나 골만 안 먹히면 장땡이다.
“집중! 집중해!”
라모스가 쉴 새 없이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최근 엘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데는 물론 나의 역할이 가장 컸지만, 후방에서 수비를 지휘하는 라모스의 공도 빼 놓을 수 없었다.
욱하는 성질 때문에 가끔 쓸데없는 카드를 받았던 걸 제외하면, 이번 시즌 라모스의 활약은 경이로울 정도였…
삐빅-
이런, 양반은 못 되네.
패스를 받던 메시를 뒤에서 걷어찬 라모스에게, 페드루 프로엔사 주심이 옐로카드를 꺼내들었다.
잘한다 잘한다 하면 꼭 이런 일이 생긴다니까?
이른 시간에 경고를 받은 것도 문제지만, 프리킥을 허용한 위치 역시 썩 좋지 않았다.
오른발과 왼발 모두 직접 슈팅을 노릴 만한 각도.
골문과의 거리는 약 21m로 매우 가까웠다.
“왼쪽으로 더! 아니, 케빈! 왼쪽이라고! 그래! 두 걸음만 더! 오케이!”
커다란 도전에 직면한 카시야스 주장이 손짓까지 해가며 수비벽의 위치를 지정해 주었다.
상대 팀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프리키커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었으니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호날두와 메시가 공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흡사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긴장되는 순간.
주심의 신호가 떨어진 후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건 호날두였다.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천천히 도움닫기.
진짜일까? 페이크일가?
뻐어엉-
진짜다.
호날두의 오른발등이 공을 강타하는 순간, 벽을 세웠던 선수들이 반사적으로 점프했다.
이런 젠장.
간사한 포르투갈 대표팀의 에이스는 애초에 벽을 넘길 생각이 없었다.
수비벽이 뛰어오를 걸 예상하고 깔아 찬 땅볼 슈팅이 빠른 속도로 골문 구석을 향했고, 동료들에 의해 시야가 가려졌던 주장의 반응이 늦었다.
철썩-
전반 11분.
호날두의 이번 시즌 챔스 12호 골이 결승전에서 나왔다.
아직 호우 세리머니를 개발하기 전이었지만, 잔디 위를 미끄러지면서 호날두 녀석은 분명 이렇게 외쳤다.
“호오오오오오우!”
* * *
음… 상황이 영 좋지 않다.
가뜩이나 전의에 불타던 바르셀로나 녀석들은, 선제골 이후 더욱 거세게 우리를 몰아붙였다.
코파 결승을 통해 기선제압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티토 감독 사퇴의 버프가 더 센 것 같았다.
설마 요한 크루이프가 여기까지 예상하고 그런 심한 말을 지껄인 걸까?
“다들 내려가!”
무리뉴 감독의 지시에 따라 우리 팀의 모든 선수들이 하프라인 아래쪽에 진을 쳤다.
지금은 이 파도가 지나갈 때까지 버텨야 할 때.
아무래도 바르셀로나 녀석들은 한 골로 만족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이번에는 오른쪽 측면에서부터 메시의 단독 돌파 시도.
섣불리 발을 뻗었던 마르셀루를 가볍게 제치고, 도와주러 온 알론소에게는 알까기를 시전하며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라모스가 덮치기 전에 한 박자 빠른 슈팅.
파아앙-
메시의 왼발에 제대로 감긴 공이 날카로운 호를 그리며 골문 왼쪽 상단으로 날아갔다.
퍼억-
“그렇지!”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마음의 소리.
모두가 골이라 생각했던 그림 같은 슈팅을, 카시야스 주장이 그보다 더 멋진 펀칭으로 막아냈다.
‘굿 오펜스, 베터 디펜스(Good offence, better defence)’의 전형.
“씨발! 개쩌는데?”
넘어진 주장을 일으킨 페페가 거칠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하지만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바로 이어지는 바르셀로나의 코너킥.
오늘 체감상 100%의 패스 성공률을 보여주고 있는 사비가 키커로 나섰다.
“사람 확실히 잡아! 사람!”
이미 세트피스 실점이 하나 있어 심기가 매우 불편한 주장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터엉-
사비의 코너킥 행선지는 또 한 번 호날두 쪽.
그러나 녀석이 꾸었을 멀티골의 꿈은 라모스에 의해 저지되었다.
위치를 제대로 잡고 있다가 한 발 앞서 헤더 클리어.
루즈볼이 아자르의 품에 안겼다.
모처럼의 역습 찬스를 날릴 순 없었다.
“에덴! 그냥 가! 달려!”
목청껏 내지른 나의 목소리에 반응한 아자르가 공을 몰고 나가기 시작했다.
후방에서 대기하던 부스케츠가 파울로 끊기 위해 다소 위험해 보이는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
하지만 아자르가 태클을 가볍게 뛰어넘으면서 바르셀로나의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단순 주력으로만 보면 특급까지는 아니었지만, 드리블 중에도 속도가 많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아자르의 큰 장점 중 하나였다.
“빅토르! 나와야 돼!”
푸욜이 아자르의 뒤를 부리나케 쫓으면서 발데스를 향해 소리쳤다.
발데스가 골문을 비우고 뛰쳐나왔고 그것을 본 아자르는 슈팅 모션을 취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콰아앙-
공을 사이에 두고 아자르의 발등과 발데스의 발바닥이 거세게 충돌.
힘을 이기지 못한 볼이 공중으로 높게 떠올랐다.
“주장! 뒤요!”
“뒤?”
발데스의 다급한 외침에 뒤를 돌아본 푸욜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인해 커졌다.
투쾅-
공중에서 두 다리를 살짝 벌리며 푸욜을 뛰어넘은 후 시도한 나의 헤더슛이 텅 빈 골문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