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Gran- Cabeza!!!
Gran- Cabeza!!!!!!
전반 22분, 알리안츠 아레나가 ‘위대한 머리’를 연호하는 팬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필생의 점프로 만들어낸 동점골.
멍하니 서 있다가 당한 푸욜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발데스는 잔디 위에 누워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미쳤다, 미쳤어!”
“형! 대체 얼마나 높이 뛴 거예요?”
“이제 놀라기도 지친다, 임마!”
“첫 골을 이렇게 넣으면 다음부턴 어쩌려고?”
동료들이 달려와 나를 얼싸안고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내가 넣었지만 좀 대단한 골이긴 했다.
“자,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금부터야!”
잠시 멘탈이 나간 주장 푸욜을 대신해서 부주장 사비가 선수들을 독려했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필드 위에서 경기 재개.
평소 같았으면 1-1이 된 바르셀로나 녀석들의 마음속에 ‘역시 안 되는구나’라는 패배 의식이 싹텄을 텐데, 오늘은 아직 눈빛들이 살아 있었다.
정백강의 최대 피해자 푸욜만큼은 좀 더 회복 기간이 필요해 보였지만 말이다.
킥오프.
신나게 몰아붙이다 역습 한 번 제대로 얻어맞은 바르셀로나가 조심스럽게 볼을 돌렸다.
우리는 여전히 만반의 수비 태세를 유지.
승부를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었다.
최전방의 ‘LCD’ 라인이 쉴 틈 없는 스위칭으로 우리에게 혼선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동점 이후 확연히 안정감을 찾은 4백 라인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점유율은 여전히 바르셀로나가 가져갔지만, 큰 의미 없는 백패스와 횡패스가 대부분이었다.
티키타카가 잘 안 풀릴 때의 전형적인 흐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니에스타가 나섰다.
부스케츠로부터 짧은 패스를 이어받은 후 볼을 몰고 직접 전진하는 이니에스타.
사비와 메시를 더한 후 2로 나누면 이니에스타가 나올 거라는 세간의 평가대로, 중원에서의 조율과 돌파를 통한 크랙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유니크한 선수가 바로 이니에스타였다.
단독 드리블로 2011 피파 베스트 일레븐에서 자신을 밀어낸 더브라위너를 가볍게 제치며 클래스를 입증한 후, 비야와의 2대 1 패스를 통해 페널티박스 인근까지 순식간에 이동.
왼쪽 측면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호날두가 타이밍 맞춰 공간 침투를 시도했다.
투욱-
소름끼칠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에 들어가는 이니에스타의 스루패스.
일단 왼발로 공을 받아 놓은 호날두가 한 번 접은 후 반대쪽 포스트를 노린 오른발 강슛을 날렸다.
퍼억-
아이고, 진짜 아프겠다.
부지런히 뒤따라 간 페페가 뒷짐을 진 자세로 몸을 날려 복부로 슈팅을 차단.
호날두의 어마무시한 발목 힘을 고려했을 때, 공이 조금만 더 아래쪽에 맞았으면 큰 사달이 날 뻔했다.
우리 페페, 요새 아이 갖고 싶다고 노력 중이었으니까 말이지.
“크아악!”
일단 공을 걷어낸 페페가 비명을 터뜨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이 볼!”
페페의 극심한 고통이 얻어낸 역습 기회.
볼을 좇아 있는 힘껏 점프했다.
아까 푸욜을 뛰어넘었던 게 우연이 아니었는지, 몸이 상당히 가벼웠다.
어디 보자… 아자르나 벤제마한테 찔러줄까?
아니면 일단 뒤로 돌린 후 천천히 갈까?
아무 방해 없는 공중에서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던 중 발데스가 눈에 들어왔다.
극단적으로 라인을 끌어올리는 바르셀로나의 전술에서는 골키퍼 역시 필드 플레이어 못지않게 볼 흐름에 참여할 것이 요구된다.
그 이야기인즉슨, 다른 팀들보다 골키퍼의 포지션이 한참 앞쪽에 형성된다는 의미.
내 시커먼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발데스는 페널티박스 밖에서 수비수들을 향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오케이, 장전 완료.
발사.
콰아아앙-
하프라인 부근에서 작렬한 초강력 헤더 슈팅이 놀라운 기세로 골문을 향해 날아갔다.
“뭐… 뭐야?”
당황한 기색으로 뒷걸음질치던 발데스가 이윽고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
그러나 때는 늦었다.
철썩-
끝까지 몸을 날린 발데스의 손에 끝내 닿지 않은 공이 그물을 출렁였다.
* * *
전반 31분, 그러니까 호날두의 선제골 이후 정확히 20분 만에 경기가 뒤집혔다.
우리 팀의 흰색 유니폼을 입고 뮌헨까지 원정온 응원단이 모두 일어나 손가락 두 개를 높이 들었다.
그리곤 미친 듯이 이마를 두드렸다.
사람 뛰어넘는 걸로도 모자라서 오랜만에 터진 하프라인 헤더골까지.
나는 역대급 골을 두 개나 쏟아내며 ‘결승전의 사나이’다운 면모를 뽐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바르셀로나가 동점골을 넣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끝내 해답을 찾진 못했다.
결국 전반전은 2-1로 우리가 앞선 채 종료.
그동안 엘클라시코에서 지겹도록 반복되던 패턴 그대로였다.
경기를 지배한 바르셀로나와, 골을 더 많이 넣은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팬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게 이 대목이었다.
차라리 신나게 ‘가패’ 당하다가 지면 인정이라도 할 텐데, 그 망할 놈의 점유율과 슈팅 숫자는 항상 앞서니 얼마나 약이 오르겠는가.
비싼 이적료 지불하고 호날두까지 영입하며 ‘LCD’라는 꿈의 공격진을 구성했는데, 셋이 합쳐도 정백강 하나를 이겨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장담하건대, 이대로 끝나진 않을 거다.”
하프타임.
원체 방심이라는 걸 모르는 무리뉴 감독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조심스러웠다.
“후반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다. 너무 들뜨지 않는 것. 알겠나?”
“네! 감독님!”
다들 대답은 시원스럽게 했으나, 사람 마음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
선수들의 얼굴에 벌써 빅 이어를 들어올린 것 같은 웃음이 어렸다.
다른 건 몰라도 승부 감각만큼은 초일류인 무리뉴 감독이 반복해서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커다란 기대와 약간의 찜찜함을 안고 후반전에 나섰다.
삑-
휘슬과 함께 킥오프.
뒤지고 있는 바르셀로나 쪽에서 뭔가 액션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초반은 잔잔하게 흘러갔다.
여전히 볼 점유에 중점을 둔 채, 신기할 정도로 차분하게 경기를 운영하는 녀석들.
어째 등골이 서늘했다.
일단 앞서기 시작하면 서두르는 상대에게 역습을 통해 철퇴를 내리치는 게 우리의 전형적인 승리 공식.
엘클에서도 항상 이런 패턴으로 이겨 왔는데, 상대가 세월아 네월아 볼만 돌리고 있으니…
오히려 우리 쪽에서 먼저 몸이 달았다.
특히 혈기 넘치는 벨기에 듀오는 증상이 심각했다.
공을 빼앗기 위해 무리하게 달려들다가 쓸데없는 체력 소진에, 아자르는 탈압박 장인 사비한테 태클 잘못 들어갔다가 옐로카드까지 받아들었다.
“너무 흥분하지 마, 얘들아!”
주의를 줘도 먹히는 건 그때뿐.
무리뉴 감독이 우려했던 사태가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 * *
이런 썩을.
우오오오오-
후반 16분, 동점골을 터뜨린 메시가 광분하는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달려가 오른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비극의 씨앗을 뿌린 건 더브라위너.
경고를 받은 아자르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쓸데없이 사비의 유니폼을 잡아챘다가 프리킥을 헌납했다.
그래도 여기까진 괜찮았다.
사비가 파울 선언 후 0.8초 만에 기습적으로 경기를 재개하기 전에는.
무리뉴 감독이 걱정했던 대로, 우리 팀 선수들은 조금 들떠 있었다.
더불어 집중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고.
터엉-
티토 감독의 지시 때문인지 짧은 패스를 고집하던 사비가 갑자기 프리킥을 길게 때려넣은 것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 킥의 행선지였던 메시의 트래핑은 더욱 비범했고.
토옥-
내가 프리킥 순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는데, 그렇게 부드럽게 잡을 수 있는 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신자는 다른 누구가 아닌 메시.
왼발 바깥쪽으로 속도를 죽이며 완벽하게 공을 잡아 놓았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정말 발에 자석이라도 달린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짜 하이라이트는 그때부터.
대체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호기롭게 달려드는 마르셀루를 가볍게 요리한 메시가 페널티박스 안쪽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라모스가 황급히 따라붙었으나, 전반전의 불필요한 파울 때문에 옐로카드를 한 장 안고 있는 몸.
퇴장이 두려워서 파울로 끊지도 못하고 이도저도 아닌 거리를 유지하다가 메시의 급격한 방향 전환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졌다.
메시가 박스 안에 들어왔는데 앞에 버티는 수비수가 없다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상황 종료였다.
차가울 정도로 정확한 마무리.
물론 메시의 화려한 기술이 만들어낸 골이었지만, 우리가 정신줄만 제대로 잡고 있었어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실점이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골이 들어가는 순간 양쪽 벤치의 풍경은 극명하게 갈렸다.
멋지게 따라붙은 티토 감독은 알아듣기 힘든 괴성을 내지르며 코치진들과 격하게 기쁨을 나누었다.
반면 무리뉴 감독은 심한 욕설로 추정되는 입모양과 함께 물병을 걷어찼다.
2011-2012 시즌 빅 이어의 향방은 그렇게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2-2 동점 상황에서 무리뉴 감독의 선택은 수비 강화.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더브라위너를 즉각 라스와 바꿔 주었다.
덕분에 더브라위너의 뛰어난 킥 능력을 써먹을 수 없게 됐지만, 대신 모드리치는 좀 더 공격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일장일단이 있는 선택.
방금 투입되어 체력이 팔팔하게 남아 있는 라스는 특유의 활동량과 강력한 대인마크로 우리 중원에 힘을 불어 넣었다.
상대적으로 수비력이 약한 더브라위너와 모드리치를 상대로 꿀 빨던(?) 사비-이니에스타 콤비도, 라스가 동네방네 뛰어다니기 시작하자 아까처럼 활개치진 못했다.
더군다나 후반전도 중반을 넘어서면서 슬슬 선수들의 체력적인 문제도 대두될 만한 시점.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되던 티키타카에 균열이 발생했다.
촤아악-
사비가 호날두 쪽으로 뿌려준 횡패스를 멋들어진 슬라이딩 태클로 끊어낸 라스가, 욕심부리지 않고 알론소에게 볼을 넘겼다.
오랜만에 우리에게 넘어온 볼 소유권.
습관처럼 롱패스 길을 봤던 알론소가 멈칫하더니 마르셀루 쪽으로 짧은 패스를 연결했다.
포지션 상으로 마르셀루를 일차적으로 막아줘야 할 선수는 메시였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무결점으로 보이는 메시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가 바로 체력이었다.
전방 시야가 훤하게 트인 마르셀루가 아무런 방해 없이 단독 드리블로 순식간에 하프라인을 넘었다.
메시는 지쳤는지 한참 뒤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할 수 없이 사비가 급하게 백업을 갔으나 마르셀루의 볼 처리가 더 빨랐다.
투웅-
쇄도하는 벤제마 쪽을 본 스루패스가 작렬했고, 벤제마는 알베스가 붙기 전에 다이렉트로 크로스를 올렸다.
이제는 나와 피케의 대결.
내가 공이 떨어질 위치를 선점하자, 피케가 등 뒤에 찰싹 붙어 밀어대기 시작했다.
파울도 불사한 거친 수비.
여기서 그냥 넘어진다면, 과연 주심이 페널티킥을 줄까?
이게 평범한 경기였다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챔스 결승이란 무대가 주는 압박, 게다가 동점 상황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휘슬이 불릴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이대로 점프해도 피케는 어떻게든 방해 공작을 펼칠 것이다.
공중에서는 지상보다 파울에 버티기가 더 힘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해야 할 플레이는?
휘릭-
피케를 등진 상태에서, 오른발을 축으로 반 바퀴 빙글 돌았다.
농구에서 자주 나오는 일종의 스핀 무브(Spin Move).
필사적으로 나를 밀치고 있던 피케가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균형을 잃으며 앞으로 넘어졌다.
그리고 절규.
“안돼!”
내가 피케를 벗겨내는 사이, 벤제마의 크로스가 바닥에 한 번 튕겼다.
그대로 몸을 날려 다이빙 헤더.
뻐어어엉-
소리 한 번 좋고.
철썩-
자타가 공인하는 바르셀로나 킬러가 또 한 번의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