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스페인, B조 1경기에서 네덜란드 상대로 1-5 대패]
월드컵에 존재하는 수많은 징크스 가운데서도 가장 무섭다는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
무적함대 스페인도 피해 가지 못했다.
전반 27분, 디에고 코스타가 얻어낸 페널티킥을 알론소가 깔끔하게 성공했을 때만 해도 이런 결과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남아공 월드컵 결승에서의 패배 이후 칼을 갈아 온 네덜란드의 반격은 매서웠다.
추격의 선봉장은 로빈 반 페르시.
왼쪽 측면에서 데일리 블린트가 기습적으로 시도한 얼리 크로스를 13m짜리 장거리 헤더골로 연결하며 승부의 균형을 맞췄다.
카시야스 주장이 약간 앞으로 나온 틈을 제대로 찌른 인상적인 골이었다.
그렇게 전반전은 1-1로 종료.
본격적인 대참사는 후반전에 벌어졌는데, 아르연 로벤이 역전골의 주인공이 되었다.
역습 상황에서 블린트가 전방으로 찔러준 로빙 패스를 점프하면서 왼발 바깥족으로 멋지게 트래핑한 후, 특유의 잔발 드리블로 피케를 벗겨냈다.
라모스가 끝까지 따라붙으며 슬라이딩 태클을 했지만 로벤의 슈팅이 반 박자 빨랐다.
깔아 찬 공이 카시야스 주장의 다리 사이를 통과하며 2-1.
남아공 월드컵에서 대회 내내 단 2실점에 그쳤던 스페인이, 브라질에서는 첫 경기부터 2골을 내주는 모습이었다.
스페인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티키타카는 수많은 연구를 통해 그 파훼법이 어느 정도 나온 상태였고, 그 티키타카의 핵심인 사비와 알론소는 각각 34세와 32세로 절정기가 지난 선수들이었다.
이미 낡은 전술과 예전 같지 않은 수행자들의 조합은 처참했다.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강력한 압박에 정신을 못 차리며 질질 끌려다녔고, 프리킥 상황에서 스테판 더프레이에게 헤더골을 허용하며 3-1까지 벌어졌다.
후반 27분에는 카시야스 주장이 평범한 백패스를 말도 안 되는 트래핑 미스로 반 페르시에게 헌납하며 네 번째 실점을 자초했다.
월드컵 2연패라는 대기록의 시작을 지켜보기 위해 브라질까지 날아온 스페인 국민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경악할 따름이었다.
이 시점에서 스페인의 멘탈은 완전히 ‘바사삭’.
다섯 번째 골은 로벤의 원맨쇼였다.
스네이더의 스루패스를 받아 라모스를 제친 후, 뛰쳐나온 카시야스 주장을 두 번의 드리블로 농락하며 공을 골문 오른쪽 상단에 꽂아 넣었다.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잔디 위에서 처절하게 구르는 주장의 모습이, 몰락한 스페인 축구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형편없는 경기를 펼친 기분이 어떤지 잘 알기 때문에, 참패의 주역(?)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단톡방은 한동안 잠잠했다.
그러다 이틀 후 벤제마가 멀티골을 넣으며 프랑스가 온두라스를 3-0으로 완파했을 때 또 활기를 찾았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나 때문에 조연에 머무르고 있는 벤제마였지만, ‘레 블뢰’에서는 어엿한 에이스였다.
주전 센터백으로 나선 바란도, 상대가 약체이긴 했으나 안정적인 수비력을 선보이며 활약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하루 뒤에 페페가 속한 포르투갈이 독일과 붙었고, 토마스 뮐러에게 해트트릭을 얻어맞는 등 0-4로 왕창 깨지면서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이처럼 레알 소속 선수들의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가운데, 드디어 우리 대표팀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 * *
2014년 6월 17일, 브라질 중서부의 항구도시 쿠이아바에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축구 스타 정백강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41,112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레나 판타나우는 입추의 여지 없이 꽉 들어찼다.
우리의 조별리그 첫 상대는 러시아.
한국 감독직에 지원했다가 과르디올라 감독보다 높은 연봉을 요구하는 바람에 탈락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이끄는 팀이었다.
뭐, 덕분에 러시아에서 110억 원이 훌쩍 넘는 연봉을 수령하게 됐으니 카펠로 감독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일 수도 있었다.
이번 대회 본선 32개국 감독 중 가장 높은 몸값의 주인공이 바로 카펠로였다.
양 팀의 상대전적은 우리 기준으로 1전 1패.
2013년 11월에 벌인 친선경기에서 1-2로 무릎을 꿇은 바 있었다.
물론 내가 뛰지 않았으니 아주 큰 의미가 있는 전적은 아니었지만.
- 백강 형, 저처럼만 해요. 그럼 당신도 슈퍼스타!
앞서 펼쳐진 알제리와의 대전에서 대포알 중거리포로 월드컵 데뷔골을 넣은 더브라위너가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구.
- 케빈, 나는 네 나이 때 월드컵에서 14골을 넣었어. 최소 10골은 채우고 얘기하자.
나의 팩트 폭격에 가장 신나한 건 역시 아자르.
폭소 이모티콘으로 채팅창을 도배하며 절친을 비웃었다.
더브라위너와 마찬가지로 월드컵 데뷔전을 치른 아자르는, 골은 없었지만 어시스트 2개를 기록하며 팀의 4-1 승리를 이끌었다.
‘벨기에 듀오’의 성장세는 회귀 전보다 확실히 빨랐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했으니 말이다.
이게 다 내가 발굴해주고 키워준 덕분 아니겠는가.
“백강, 컨디션은 어때?”
“아주 좋습니다.”
늘 그렇듯 과르디올라 감독의 관심 1순위는 나의 몸 상태였다.
과장 없이 봐도 팀 전력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선수니만큼 각별할 수밖에.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과르디올라 감독이 본격적인 전술 지시를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되는 시간.
“건호, 평소보다 1미터 정도 더 터치라인 쪽에 붙어서 플레이해. 상대가 측면 압박을 세게 가져갈 테니, 네 쪽에서 벌려줘야 중앙에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
“1미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도리는 전반 20분 전까지는 하프라인을 넘지 마. 러시아가 최근 15경기에서 높은 확률로 초반에 승부를 거는 곳이 왼쪽 측면이거든.”
“그렇게 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수준의 지시가 선발 선수 전원에게 들어갔다.
정말 축구에 미친 사람다운 디테일이었다.
기습적으로 뭘 지시했는지 확인차 물어볼 때가 있는데, 그때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면 상상하기도 싫은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한 마디로 선수를 매우 피곤하게 만드는 스타일.
그러나 반대급부로 배우는 것도 많았다.
처참한 수준의 오프더볼 무브가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손형민의 경우, 과르디올라 감독의 지도를 받은 이후부터 공간 이해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덕분에 정백강-손형민으로 이어지는 득점 루트는 우리 대표팀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백강, 주장으로서 한 마디 할까?”
11명 모두에게 상세한 지시를 마친 과르디올라 감독이 내게 발언권을 넘겼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왼팔에 찬 완장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주장’으로 치르는 월드컵이라…
홍명부, 이원재, 박지승 등 월드컵 대표팀 주장을 역임했던 선배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분들도 이런 부담감을 안고 잔디를 밟았겠구나.
헛기침으로 목을 한 번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도리 선배처럼 이번이 네 번째 대회인 분도 있고, 형민이처럼 첫경험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미치도록 긴장되는 무대가 바로 월드컵입니다. 저도 큰 경기 적지 않게 뛰어 봤는데, 지금 무지 떨고 있어요. 이 긴장감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오늘 승부의 키포인트가 될 겁니다. 자, 얼지 말고 ‘한바탕 놀아보자’는 생각으로 나갑시다. 파이팅!”
“파이팅!!!”
멘트 중 일부는 라모스의 경기 전 말버릇을 가져온 것이었다.
땡큐, 부주장.
* * *
삑—
휘슬이 길게 울리고 대한민국의 브라질 월드컵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포메이션으로만 따지면 우리와 러시아 둘 다 4-3-3이었지만 그 성격은 약간 달랐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바르셀로나에서 쓰던 그대로, 중앙 미드필더를 두 명 배치하는 역삼각형 형태를 선택했다.
반면 카펠로 감독은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 명 쓰는 더블 볼란치를 들고나왔다.
왕년에 하품 나오는 수비축구로 유럽을 호령했던 카펠로 감독다운 전술이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건호 형!”
중원에서 공을 잡은 기성영이 오른쪽 측면의 이건호 선배를 향해 롱패스를 뿌렸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한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후 가장 많이 바뀐 부분이 롱패스에 관대해졌다는 것.
부임 초기에는 바르셀로나식 축구를 구현하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팀 선수 구성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에 맞춰 본인의 철학을 포기하게 된 셈.
다만 긍정적으로 보면 예전보다 유연해졌다는 점에서 전술적 성장을 이뤘다고 볼 수도 있었다.
퍼억-
건호 선배가 공을 잡기가 무섭게 슬라이딩 태클로 걷어내는 레프트백 드미트리 콤바로프.
과르디올라 감독의 예상대로 측면 압박이 상당했다.
비단 러시아뿐만 아니라 우리를 상대하는 모든 팀이 측면 수비만큼은 온갖 공을 들일 공산이 컸다.
‘정백강 수비 교본’의 제1장 제1절이 ‘크로스를 차단하라’였으니.
물론 그 교본을 익혀서 성공한 팀은 여태까지 단 하나도 없었다.
건호 선배가 내 머리를 겨냥한 롱 스로인을 날려봤지만 팔힘이 부족했다.
허무하게 넘어간 공격권.
공을 따낸 러시아는 레프트윙 올레그 샤토프 쪽으로 빠른 공격을 시도했다.
우리 감독님 또 작두 타시네.
사전 지시에 따라 포지션을 단단히 지키고 있던 도리 선배 덕분에 손쉽게 속공을 저지.
일대일이 여의치 않을 것 같자 샤토프가 후방에 대기하던 유리 지르코프에게 볼을 돌렸다.
전성기 때는 ‘러시아의 호날두’라고 불렸을 정도로 대단한 윙어였지만, 잦은 부상으로 파괴력을 많이 상실한 지르코프.
대신 경기 운영 능력은 더욱 원숙해져서, 카펠로 감독은 지르코프를 중앙에 두고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맡겼다.
뻐어엉-
‘플메코프’의 선택은 직접 슈팅.
왼발 킥력 하나만큼은 살벌한 선수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는데, 슛 찬스를 너무 쉽게 허용했다.
까앙-
하느님이 보우하사 크로스바를 강타한 후 벗어나는 공.
“헤이, 쿡연! 지금 머해!”
나왔다, 과르디올라표 한국어.
언어 천재로 알려진 과르디올라 감독은, 부임 1년여 남짓 만에 간단한 일상 회화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 실력을 키웠다.
특히 선수를 질책할 때는 가능한 한 통역을 거치지 않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직접 혼나야 더 무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레이더에 포착된 건 수비형 미드필더 한국연.
지르코프를 경계해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건만 놓쳐 버렸으니 감독 입장에선 화가 날 만도 했다.
불쌍한 국연이, 하프타임 때 많이 힘들겠네.
“다 올라가!”
남아공 월드컵에 이어 2개 대회 연속으로 장갑을 끼게 된 전성룡 선배가 호쾌한 모션으로 골킥을 날렸다.
‘선방 빼고 다 잘하는 골키퍼’라는 세간의 평가답게 성룡 선배의 킥력은 국내 최고 수준.
볼이 하프라인을 훌쩍 넘어 거의 페널티박스 인근까지 날아왔다.
가만 있자… 러시아 골키퍼가 그 유명한 이고르 아킨페프잖아?
투콰아앙-
그동안 기름손 증상은 극복했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때린 헤더 중거리포가 잔뜩 긴장한 표정의 아킨페프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