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2011-2012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어이없게 당했던 헤더 중거리슛의 잔상이 아킨페프의 머릿속에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었나 보다.
그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플레이가 나왔다.
슈팅이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었고,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볼이었건만 굳이 펀칭을 선택한 것이다.
투웅-
그래도 뭐,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는 법.
수비진이 실수를 하면 골키퍼가 메워주듯, 아킨페프의 실수도 러시아의 4백 라인이 처리해줬으면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놀라운 순간 스피드를 과시하며 쇄도하는 손형민을 아무도 체크하지 않은 것이다.
“какая!”
아킨페프가 비명을 질렀을 땐 이미 늦었다.
루즈볼을 오른발로 툭 밀어 넣으며 한국의 대회 첫 득점이 나왔다.
철썩-
“형민아!”
“선배니임!!!”
첫 출전한 월드컵에서 마수걸이 골을 기록한 형민이가 쪼르르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그동안 넣은 골이 꽤 되는 형민이지만, 방금 이 골만큼 오래도록 기억될 장면은 많지 않으리라.
월드컵은 각별한 무대니까 말이다.
여유로운 얼굴로 벤치에 앉아 있던 카펠로 감독이 벌떡 일어섰다.
엄청나게 수비적인 전술을 들고나왔는데, 전반 13분 만에 바보 같은 실점을 하고 말았으니 게임 플랜이 완전 꼬인 러시아였다.
대- 한민국! 짝짝! 짝짝짝!
대- 한민국! 짝짝! 짝짝짝!
머나먼 브라질까지 원정 온 붉은 악마는 열광의 도가니.
에이스 정백강의 어시스트로 차세대 에이스 손형민이 골을 넣었으니 딱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압박! 압박해!”
만약 무리뉴 감독이었다면 선제골을 넣은 순간 바로 역습 모드로 전환했을 텐데, 과르디올라 감독의 스타일은 전혀 달랐다.
스코어와 상관없이 전방 압박을 멈추지 않는 상남자였다.
내가 과르디올라 감독의 사랑을 받는 데는 물론 사기적인 득점력이 가장 크게 작용했지만, 압박 국면에서의 쓰임새 역시 높게 평가받고 있었다.
“정백강은 내가 여태까지 지도했던 공격수들 중 가장 뛰어난 수비력을 갖고 있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일전에 나에 대해 했던 인터뷰 내용만 봐도 뭐…
센터백 출신의 스트라이커라는 게 처음엔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다양한 전술에 녹아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발은 좀 느리지만 피지컬과 빼어난 수비 스킬을 갖춘 정백강, 빠르고 부지런하며 헌신적인 이건호 선배, 막내 효과로 활동량 버프를 받은 형민이까지.
대표팀 3톱의 전방 압박이 가동되기 시작하자, 상대가 전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 선수들도 기술적으로 아주 높은 수준은 아니어서 개인기로 상황을 타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선택지는,
뻐엉-
하릴없는 롱패스뿐.
그러나 압박에 막혀 황급히 내지르는 롱패스에 정확도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우리 후방에서는 특히 한국연의 움직임이 돋보였는데, 공이 떨어지는 곳마다 정확하게 대기를 타다가 상대 공격을 끊어냈다.
아무래도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크게 혼난 게 각성의 계기가 된 것 같았다.
“헤이, 쏜!”
대표팀에서 볼 배급을 전담하고 있는 기성영이 이번에는 형민이 쪽으로 공격 방향을 잡았다.
한 골 넣더니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형민이가 자신감 있게 일대일 시도.
화려한 스텝 오버로 상대 라이트백 안드레이 예센코의 혼을 쏙 빼놓더니, 터치 라인 따라서 직선 돌파 모션을 취했다.
‘측면 돌파-크로스-정백강 헤더’는 절대 나와선 안 될 공식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예센코가 돌파 예상 경로로 오른발을 뻗는 순간.
터엉-
‘페이크다, 이 병신아’를 외치며 중앙으로 짓쳐들어오는 형민이.
양발잡이의 메리트가 빛을 발했다.
측면에서 중앙으로 몰고 들어오다가 먼 포스트 쪽으로 때려 넣는 형민이의 중거리포는 분데스리가에서도 그 위력을 인정받는 공격 옵션이었다.
이를 알고 있는 센터백 세르게이 이그나셰비치가 슈팅을 견제하기 위해 튀어 나가면서 페널티박스 안쪽에 넓은 공간이 생겼다.
됐다, 딱 걸렸다.
농담이 아니라 천 번은 족히 연습했던 패턴이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끄는 팀에 즉흥적 플레이란 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형민이가 박스 모서리로부터 3미터 정도 중앙 쪽으로 들어오는 순간이 완벽한 침투 타이밍이었다.
토옹-
허를 찌르는 로빙 패스가 이그나셰비치를 훌쩍 넘겨 브라질의 청명한 하늘을 날았다.
마무리는 얄짤 없는 대포알 헤더.
콰아앙- 철썩-
경기 시작 30분 만에 2-0.
아킨페프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전반전이었다.
* * *
“뭐야, 얘네 되게 못하네. 나 심심해 죽는 줄 알았어.”
하프타임.
전성룡 선배가 거만하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마 우리 조에서 러시아가 제일 약할 거예요.”
“그래? 당연히 알제리가 더 만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더 말을 이어가지 않고 그냥 씩 웃었다.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언론에서 알제리를 ‘1승 제물’이라고 떠들다가 4골이나 얻어맞고 패했었지 아마.
화기애애하던 라커룸 분위기는 과르디올라 감독이 들어오면서 급속도로 조용해졌다.
단순히 이기고 있다고 해서 좋게좋게 넘어가는 인물이 아니었으니.
“쿡연!”
과르디올라 감독은 오자마자 국연이부터 찾았다.
“네, 넵, 감독님!”
국연이가 바짝 얼어서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잠시 국연이를 노려보던 과르디올라 감독이 돌연 표정을 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써.”
채찍을 각오했는데 날아온 건 당근.
국연이의 얼굴에 그제야 웃음꽃이 피었다.
“감사합니다!”
확실히 지르코프에게 했던 수비 실수 이후로는 아주 좋은 활약을 펼쳤다.
나는 십년 감수한 국연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전반전은 아주 훌륭했다. 이 기세 그대로 후반까지 밀어붙이자!”
“알겠습니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 정도로 칭찬하는 건 매우 드문 일.
경기력도 경기력이지만, 큰 무대에서도 쫄지 않고 연습한 대로 플레이를 했다는 데 큰 점수를 준 것 같았다.
“선배님, 저쪽은 거의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데요?”
달콤했던 휴식이 끝나고 입장을 대기하는데, 형민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형민이 너, 카펠로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네. 감독 경력 되게 오래 됐다는 건 아는데 다른 건 잘 몰라요.”
“카펠로 별명이 이탈리아어로 ‘Il Sergente di Ferro’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강철의 교관. 선수들을 피도 눈물도 없이 다그치기로 유명하지. 카시야스한테 들었는데, 라모스가 카펠로한테 혼나고 엉엉 운 적이 있대. 라모스가 절대 그런 캐릭터가 아니거든. 카시야스도 여태컷 수많은 감독을 만났지만 카펠로만큼 무서웠던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고.”
형민이가 혀를 내둘렀다.
“와… 저는 지금 감독님도 충분히 무서운데… 카펠로가 우리나라로 왔으면 큰일날 뻔 했네요.”
후반전에도 우리는 라인업 변화가 없었다.
반면 두 골 차를 따라잡아야 하는 러시아는 투톱으로 전환했다.
카펠로 감독의 호통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휘슬과 함께 후반 출발!
“Давайте есть!”
“Жареная кимчи!”
다른 건 몰라도 전반에 비해 선수들의 입이 풀린 게 눈에 띄었다.
공격이든 수비든 항상 기본은 팀워크고, 팀워크의 구축은 의사소통에서 시작하는 법.
우리는 잘 먹혔던 파워풀한 전방 압박을 계속 가져갔는데, 동료에게 빠르게 도움을 요청해서 원투 패스로 탈압박에 성공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기 시작했다.
애초에 선수들의 클래스로 러시아를 압살할 정도의 전력은 아닌지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볼 전개에 숨통이 트인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득점을 노렸다.
플레이 메이커 지르코프를 필두로, 박스 안쪽으로 적극적인 침투 패스를 쏟아냈다.
‘러시아’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리 크지 않은 공격수로 투톱을 구성한 후 스루패스를 통한 속도 대결을 가져갔는데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우리 센터백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곽휘태 선배가 민첩성이 좀 부족한 편이라 더욱 그랬다.
카펠로 감독 사단의 전력 분석도 역시 무시할 수준은 아니라는 게 드러나는 장면.
다행히 휘태 선배의 파트너인 김연권은 스피드가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성룡 선배도 고비 때마다 적절하게 나와 주면서 몇 번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후반 15분경까지는 확연한 러시아의 페이스였으나, 끝내 결정을 짓지 못하면서 우리 쪽으로 턴이 넘어왔다.
기회를 놓쳤으니 벌을 받아야지?
퍼어엉-
선제골의 기점이 되었던 성룡 선배의 명품 골킥이 또 한 번 하프라인을 넘어 최전방까지 날아왔다.
아킨페프가 바보도 아니고, 한 경기에서 두 번이나 당할 리는 없지.
일단 볼을 돌려볼까?
공중에 뜬 채 필드를 스캔하는 나의 눈에 구재철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중앙에서 뿌리를 단단히 내린 채 사방으로 패스를 뿌려주는 게 성영이의 역할이라면, 재철이는 활발한 오버래핑을 통해 공격 흐름에 활력을 불어넣는 녀석이였다.
이해하기 쉽게 바르셀로나로 예를 들자면 성영이가 사비 롤이고, 재철이가 이니에스타에 가깝…
아, 둘 다 아끼는 후배들이지만 좀 너무 나간 것 같다.
대충 역할이 그렇다는 얘기다, 역할이.
내가 초정밀 헤더로 오른발에 공을 딱 붙여주자, 재철이가 한 바퀴 빙글 돌면서 지르코프의 압박을 벗겨냈다.
우오오오오-
우리 팀 응원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팬들이 ‘재철턴’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애용하는 기술.
“재철아아!”
나왔다, 차미네이터.
어릴 때부터 수비수로 큰 게 아니고, 공격수에서 라이트백으로 포지션 변경을 했던 터라 수비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차도리 선배.
그런 선배가 K리그를 씹어먹고,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발탁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만 3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스피드와 피지컬, 그리고 공격 가담 능력에 있었다.
지금까지 감춰 두었던 공격 본능을 폭발시키며 무지막지한 스피드로 달려오는 도리 선배에게 재철이의 스루패스가 전달되었다.
“막아! 파울로라도 끊어!”
카펠로 감독이 이탈리아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통역이 다급하게 전달했지만, 러시아 녀석들의 반응보다 도리 선배가 더 빨랐다.
“백강아!”
대표팀에서 합을 맞춘 것만 어느덧 5년 차.
도리 선배는 내가 원하는 높이와 강도의 크로스를 올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대회를 준비하면서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아주 혹독한 트레이닝을 더 받기도 했고.
쿠아앙- 철썩-
대한민국의 세 번째 골, 이번 경기 멀티골, 그리고 무엇보다…
- (경) 정백강, 월드컵 통산 최다 득점 달성! (축)
붉은 악마가 미리 준비해 놓았던 대형 현수막을 펼쳤다.
전반전에 넣은 골로 호나우두와 15-15 동률을 이뤘던 나는, 후반전에 한 골을 추가하며 단독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축구의 신이 안배한 것일까, 하필이면 시간대도 후반 16분이었다.
“축하한다, 임마!”
“선배님! 정말정말 축하드려요!”
“정백갓! 정백갓! 정백갓!”
말 그대로 ‘역사를 새로 쓴’ 대기록의 탄생에, 벤치 멤버들까지 모조리 나와서 열띤 축하를 건넸다.
이 대목에서 소름돋는 사실 하나.
브라질 월드컵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