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대한민국, 러시아 3-1로 꺾고 대회 첫 승 신고]
[정백강, 멀티골 기록하며 월드컵 역사 새로 쓰다]
“완패였다. 팀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잘 추슬러서 벨기에전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도록 하겠다.”
본선 첫 경기를 완전히 말아먹은 카펠로 감독의 경기 소감은 짧았다.
내용과 결과 모두 놓친 형편 없는 경기였다.
명색이 ‘최다 연봉 감독’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냉랭한 표정으로 인터뷰장을 떠난 카펠로 감독에 이어, 승장(勝壯) 과르디올라가 마이크 앞에 앉았다.
- 승리를 축하한다. 감독으로서 월드컵에서 거둔 첫 승이라 기분이 더욱 남다를 듯하다.
“고맙다. 94년 미국 월드컵 때 선수로 참가한 이후 딱 20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서게 됐는데, 역시 클럽 축구와는 좀 결이 다른 감정이 느껴진다.”
- 경기 내용은 어떻게 평가하는지?
“전반적으론 좋았다. 특히 공격은 잘 풀렸다. 정백강은 자신이 왜 세계 최고인지 똑똑히 보여주었고, 손형민이 득점한 것도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다만 막판에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실점한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갈 생각이다. 나는 선수들이 90분 내내 최상의 정신 상태를 유지하길 바란다.”
축구에 있어서 만족이라는 걸 모르는 과르디올라 감독다운 반응이었다.
마지막 인터뷰이는 바로 이 몸.
내가 단상에 등장하자 미친 듯 플래시가 터졌다.
- 대단한 일을 해냈다. 지금 기분이 어떤가?
“우선은 팀의 승리가 가장 기쁘다. 거기에 의미 있는 기록까지 달성했으니 두 배로 행복하다.”
- 원래 기록 보유자였던 호나우두와 친분이 있는 걸로 안다. 혹시 대회 전에 기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나?
“사실은, 경기 직후에 직접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 무슨 내용이었나?
“우선은 축하한다는 말이었고, 그 다음에는 ‘골 좀 적당히 넣으라’는 당부가 있었다. 너무 심하게 앞서 나가면 후배들이 지레 겁을 먹는다나? 일단 알겠다고 답장은 했는데 그래도 팀을 위해서는 더 넣어야 할 것 같다.”
- 첫 경기부터 멀티골이다. 이번 대회에서도 가장 유력한 득점왕 후보인데, 몇 골 정도를 예상하나?
“개인적인 기록에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답변하고 끝내면 팬들이 실망하실테니… 좋다, 한 번 두 자릿수 득점에 도전해 보도록 하겠다. 혹시 실패하더라도 너무 질책하진 말아주시길 바란다. 하하하.”
- 다음 상대는 1패를 안고 있는 알제리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쉽게 이길 거라고 예측하는데?
“이곳은 월드컵이고, 쉬운 상대는 절대 없다. 개인적으로는 러시아전보다 더 터프한 경기가 될 거라고 본다. 혼신의 힘을 다하도록 하겠다. 자, 그럼 여기까지. 이제 나는 마지막 실점에 대해 감독님께 혼나러 가야 한다.”
* * *
2014년 6월 22일.
벨기에의 16강 진출이 확정되었다.
카펠로 감독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몰라도, 처참했던 우리와의 대결에 비하면, 러시아의 경기력도 상당히 훌륭했다.
조직력이 돋보이는 탄탄한 수비로 벨기에의 화려한 공격진을 꽁꽁 묶으면서, 기회가 생기면 날카로운 역습으로 벨기에의 골문을 위협했다.
전반전의 유효 슈팅 개수는 러시아가 오히려 앞섰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끗이 부족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의 지도 하에 세계적인 골키퍼로 성장한 티보 쿠르투아의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0-0 상황에서 맞은 후반전.
벨기에의 마르크 빌모츠 감독은, 아자르 중심의 공격이 잘 풀리지 않자 ‘펠라이니 시프트’ 카드를 꺼내 들었다.
공중볼 장악에 일가견이 있는 미드필더 마루앙 펠라이니를 스트라이커 자리까지 올려 롱볼 축구를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보면 단순무식한 방법이었으나 의외로 이게 잘 먹혔다.
펠라이니는 0.1% 정도 정백강을 연상시키는 헤더 패스로 로멜로 루카쿠의 선제골을 도왔고, 코너킥 상황에서는 직접 득점까지 올리며 영웅이 되었다.
한국전에 이어 두 경기 연속으로 뚝배기의 매운맛에 제대로 당한 러시아였다.
2패면 사실상 탈락이 확정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라인을 바짝 끌어올린 채 공격적인 운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넓은 뒷공간을 유린하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감독이 무리뉴였고, 그 무리뉴의 제자가 벨기에에 두 명이나 포진해 있다는 게 러시아의 비극이었다.
더브라위너가 역습 상황에서 두 번의 환상적인 스루패스를 선보였고, 아자르가 그 패스들을 모조리 골로 연결하며 러시아를 무너뜨렸다.
후반전에만 네 골을 몰아치며 최종 스코어 4-0.
벨기에가 ‘황금 세대’라는 평에 걸맞는 화끈한 승리로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12년 만에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 * *
- 오늘 꼭 이기셔야 돼요. 왜냐면 저희가 한국도 이길 거거든요. 아무래도 지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
두 골을 넣으며 러시아전 MOM으로 선정된 아자르가 매우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내 왔다.
요 귀여우면서도 건방진 녀석 같으니라구.
- 안 그래도 이길 생각이야. 응원이나 열심히 해.
- 넵! 분부대로 합죠!
아자르의 도발과는 상관없이, 알제리는 반드시 잡아야 할 상대였다.
16강 진출 결정전을 막강 전력의 벨기에와 치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미 1패를 안고 있는 알제리 역시 우리와의 승부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상황.
결과가 어떻게 되든 아주 치열한 경기가 펼쳐질 가능성이 높았다.
“정백강을 보유한 팀을 상대로 수비 축구를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는 어떻게 수비해도 반드시 골을 넣을 테니까. 다득점 양상으로 끌고 가야 승산이 있다.”
알제리를 이끄는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은 경기 전 인터뷰를 통해 공격적인 축구를 시사했다.
“공격력으로는 우리가 질 이유가 없다. 우리 팀의 스트라이커는 정백강이다.”
과르디올라 감독 역시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창 대 창의 대결이 예상되는 대한민국의 브라질 월드컵 두 번째 경기가 휘슬과 함께 시작되었다.
킥오프와 동시에 우리 진영으로 밀려오는 ‘사막 여우들’.
알제리에는 S급이라고 부를 만한 녀석은 없었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이 유럽 빅리그에서 뛰고 있는 탄탄한 전력의 팀이었다.
터엉-
알제리의 플레이 메이커인 미드필더 야신 브라히미가 왼쪽 측면으로 공격 방향을 잡았다.
패스를 이어받은 레프트윙 나빌 벤탈렙이 곧바로 얼리 크로스 시도.
공격 템포가 무지하게 빨랐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게 할릴호지치 감독이 준비한 콘셉트인 듯했다.
“마이 볼!”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김연권이 헤더 클리어.
그러나 공이 멀리 뻗지 못했고, 페널티박스 안에 침투해 있던 라이트윙 소피앙 페굴리의 발 앞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곽휘태 선배의 스탠딩 태클을 살짝 피한 후 그대로 왼발 슈팅을 때리는 페굴리.
오우우우—
알제리 응원단이 아쉬움에 탄식을 내질렀다.
다행히도 크게 벗어난 슈팅.
벤치에서 과르디올라 감독이 세차게 고개를 내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연권아.
살아남고 싶으면 잘 좀 하자꾸나.
전성룡 선배의 골킥으로 경기 재개.
언제나처럼 내 머리를 겨냥하고 내지른 킥이었는데, 힘 조절이 전혀 안 됐다.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높이로 날아간 공이 센터백 마지르 부게라의 품에 안기며 허무한 턴오버.
아니, 대체 선배까지 왜 그래요.
두 번의 실수가 연달아 나오자 있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쥐어 뜯는 과르디올라 감독.
아직 초반이지만 분위기가 매우 쌔했다.
* * *
전반 26분.
드디어 기다리던 첫 골이 터졌다.
선제골의 주인공은 세계 최고의 공격수 정백강이 아닌 알제리의 원톱 이슬람 슬리마니.
센터백 카를 메자니가 한 번에 최전방까지 날려보낸 패스에 우리의 오프사이드 트랩이 박살나 버렸고, 속도 대결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슬리마니가 성룡 선배를 앞에 두고 침착하게 마무리했다.
이 득점은 알제리의 8번째 슈팅.
같은 시간 동안 우리가 기록한 슈팅은 ‘0’개였다.
에이스 정백강의 볼터치 횟수 역시 깔끔하게 제로.
그렇다.
알제리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압도적인 반코트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쉽지 않은 경기가 될 줄은 알았지만, 이런 일방적인 내용 역시 예상 범위를 벗어난 전개였다.
알제리 응원단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악기를 불어댔고, 할릴호지치 감독은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코칭 스태프와 부둥켜안으며 기쁨을 나눴다.
정 주장이 나설 타이밍인가.
“괜찮아요! 자, 천천히 하나 갑시다! 파이팅!”
애석하게도 크게 효과는 없어 보였다.
너무 심하게 얻어맞다 보니 멘탈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동료들이 몇 있었다.
대체 어떤 새끼가 알제리를 ‘1승 제물’이라고 한 거야?
삑-
킥오프를 하면서 경기 시작 후 처음으로 공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무슨 웃픈 상황인가.
오늘 우리 대표팀이 처한 위기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중원에서의 볼 점유 실패.
3백을 쓰면서 6명의 미드필더를 배치한 알제리는 수적 우위를 앞세워서 높은 수위의 압박을 가져갔는데, 여기에 대한 대처가 전혀 되지 않았다.
그나마 탈압박을 가장 잘하는 편인 기성영도 두세 명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걸 이겨낼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둘째, 불안하기 짝이 없는 수비.
생각보다 훨씬 강한 상대 전력에 당황을 했는지 곽휘태-김연권 콤비가 쌍으로 정신을 놔 버렸고, 양쪽 풀백인 차도리-방주호 역시 수비력이 뛰어난 타입은 아니었으니…
아프리카 팀답게 피지컬과 기술을 모두 갖춘 알제리의 공격진은 일대일 경합이 벌어질 때마다 대부분 승리하며 우리 수비진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아! 씨발 진짜!”
난리가 났네 아주.
상대 압박에 갇혀 공을 또 빼앗긴 성영이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 나왔다.
“빽(Back)! 빽! 다 들어와!”
휘태 선배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알제리의 공격 전개가 훨씬 빨랐다.
오늘 최상의 컨디션을 보여주고 있는 벤탈렙 쪽으로 연결되는 다이렉트 로빙 패스.
도리 선배가 이를 악물고 쫓아가 겨우 크로스를 막아냈다.
알제리의 코너킥.
“다들 집중! 사람 확실히 잡아!”
나는 목이 아플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크게 이기고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심하게 당하고 있을 때도 집중력에 문제가 생기기 쉬웠다.
경기 흐름상 여기서 한 골 더 주면 정말 힘들…
철썩-
아, 못해먹겠네 정말.
물오른 알제리가 추가골을 넣는 데는 딱 2분이 필요했다.
페널티박스 바깥에서부터 쇄도하던 센터백 라피크 할리시를 우리 수비진 중 그 누구도 체크하지 않았고, 성룡 선배는 최악의 타이밍에 골문을 비운 채 공중볼을 차단하러 나왔다.
안 좋은 요소는 모조리 들어간 실점이었다.
붉은 악마들이 포진하고 있는 응원석은 완전 초상집 분위기.
쉴 새 없이 펄럭이던 태극기의 움직임이 잠잠해졌다.
대체 어디서부터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야 할지 답이 안 나왔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이제 화를 낼 힘도 상실한 듯, 벤치에 앉아 깡생수를 들이켜고 있었다.
축구에 타임아웃이 없다는 게 너무 잔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