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62화 (163/176)

162화

“하… 씨발… 거지 같네.”

전반 종료 후 하프타임.

평소 욕을 거의 쓰지 않는 차도리 선배의 입에서 튀어나온 거친 말이 현재 상황을 대변해 주었다.

미드필더 압델무멘 자부에게 한 골을 더 허용하며 0-3까지 벌어진 스코어.

충격과 공포의 전반전이었다.

덜컥-

과르디올라 감독이 라커룸에 들어오자 모든 선수들이 머리를 푹 숙였다.

조선시대 대역죄인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다들 코개 드러. 그런다고 머가 다라지지 아나.”

한 골이나 두 골 차였으면 아마 불같이 화를 냈을 터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암울한 상황이다 보니 오히려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과르디올라 감독이었다.

일단 선수들의 주의를 환기한 후 통역을 통해 본격적인 전술 지시.

“휘태는 후반전에 쉬도록 하자. 대신 정후가 준비하고.”

느린 발을 제대로 공략당하며 최악의 퍼포먼스를 보였던 곽휘태 선배가 홍정후와 교체되었다.

분데스리가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뛰고 있는 정후는 원래 선발 출전이 유력했으나, 러시아전을 앞두고 경미한 부상을 입는 바람에 휘태 선배에게 주전 자리를 내줬었다.

전반전 수비가 워낙 처참했기에, 변화는 확실히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복귀전을 치르게 된 정후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국연이랑 성영이는 자리를 바꾼다.”

알제리의 미친 압박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기성영이지만, 성영이만큼 볼 배급을 해줄 수 있는 선수는 우리 스쿼드에 없었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내놓은 해법은, 성영이를 압박이 상대적으로 덜한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로 내려서 딥라잉 플레이 메이커로 쓰는 것.

밀란으로 치면 성영이가 안드레아 피를로, 한국연이 젠나로 가투소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셈이었다.

“도리와 주호는 무조건 끝까지 올라가. 그러면 후방은 3백으로 바로 전환하고. 역습은 신경쓰지 말고 밀어붙여라.”

세 골을 따라잡으려면 이판사판 공사판이었다.

양쪽 풀백인 도리 선배와 방주호에게 극단적인 오버래핑을 주문하는 과르디올라 감독.

두 사람이 올라가고 나면, 성영이가 센터백 자리까지 내려가는 ‘변형 3백’으로 수비진을 꾸린다는 계획이었다.

물론 성영이가 전문 수비수가 아닌 만큼 방어벽이 허술해지는 건 사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남은 45분 동안 가진 모든 걸 쏟아붓자. 이대로 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절대로.”

꽉 움켜쥔 과르디올라 감독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 * *

“일단 나한테 공을 몰아줘.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자자, 다들 파이팅하자. 아직 시간 많아.”

내가 원래 이렇게 많이 떠드는 스타일이 아닌데, 왼팔에 차고 있는 완장이 사람을 많이 바꿔 놓았다.

독보적인 에이스이자 주장으로서, 결과에 대한 책임감을 그 누구보다도 크게 느끼는 중이었다.

알제리 녀석들은 이미 승부가 끝난 것처럼 세상 밝은 얼굴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랍어라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대- 한민국! 짝짝! 짝짝짝!

대- 한민국! 짝짝! 짝짝짝!

우리 선수단이 필드 위로 들어서자, 붉은 악마의 열띤 응원전이 다시 시작됐다.

전반전의 폭풍 실점 이후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는데, 하프타임 동안 어느 정도 회복한 모양이었다.

팬들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삑—

휘슬과 함께 알제리의 선축으로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일단은 수비부터야!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입으로 해결하는 리더십은 한계가 명확한 법.

목청껏 외침과 동시에 나도 기어를 올려 적극적으로 수비에 참여했다.

일대일 대결에서는 줄곧 밀리는 양상이라 수비할 때 수적 우위가 필요했고, 그러려면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는 수밖에 없었다.

전반전에 압도적인 개인기로 우리 왼쪽 측면을 박살내며 주호의 멘탈을 안드로메다로 보냈던 페굴리가 공을 잡았다.

바로 붙어주며 이중 수비 블록을 형성하는 성영이.

일단 뒤쪽으로 볼을 돌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페굴리는 ‘노빠꾸’였다.

아무래도 우리 수비진을 호구로 보는 모양이었다.

뭐, 전반전 모습만 보면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터억-

성영이가 중앙쪽 진로를 막고, 나름 챔피언스리그도 뛰었던 레프트백 주호가 측면쪽을 커버하며 연합 수비로 공 탈취에 성공.

이번 경기에서 페굴리의 첫 돌파 실패가 나왔다.

“백강 선배!”

주호에게서 공을 건네받은 성영이가 지체없이 최전방으로 롱패스를 뻥 때렸다.

포지션 변경의 효과가 확실히 보이는 장면.

킥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성영이의 오른발 정확도는 상당한 수준.

내가 받기에 딱 좋은 위치와 강도로 공중볼이 날아왔다.

“백강아!”

여기저기 나를 찾는 사람이 많기도 하다.

터어엉-

이것도 수백 번은 연습했던 패턴.

오른쪽 측면을 따라 침투하는 이건호 선배를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헤더 스루패스를 전달했다.

딱 두 번의 패스로 만들어낸 기회.

알제리 녀석들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효율만큼은 훨씬 높았다.

“올려요!”

나는 건호 선배가 오른발을 휘두르는 동시에,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쇄도했다.

이거 놓치면 혀 깨물 각오였다.

투콰앙-

제발 들어가라.

철썩-

그렇지, 이거지!

우와아아아아아아!!!!!

후반 7분, 정말 너무나도 간절하던 만회골.

관중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나도 기뻤지만 세리머니 따위는 할 시간이 없었다.

1초라도 더 시간을 끌어 보려는 라이스 므볼리 골키퍼의 손에서 공을 빼앗아 든 후 센터 서클까지 전력 질주했다.

세리머니 같은 건 이기고 나서 해도 충분하니까.

* * *

‘0-3’과 ‘1-3’이 선수들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

특히나 득점자가 나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정백강은 일단 넣기 시작하면 한 번으로 만족하는 사나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Habillez vous droit!”

할릴호지치 감독이 박수를 치며 뭐라뭐라 이야기를 했다.

이기고 있는 감독치고는 표정이 준엄했다.

아마 방심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조아써! 게속 그러케 가자!”

과르디올라 감독도 질세라 선수들을 독려했다.

일방적이던 경기가 새로운 국면에 돌입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벌써 6번째 킥오프.

한 방 세게 얻어맞은 알제리가 템포를 좀 늦췄다.

불확실한 전진 패스나 드리블을 자제하면서 볼 점유율을 높이는 방식의 운영을 채택.

경기 전에는 ‘닥공’을 천명했던 할릴호지치 감독이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간사하지 않던가.

막상 두 골이나 앞서는 상황을 생각하니 추워지는 모양이었다.

저쪽에서 안 다가오면 우리가 올라가 주는 게 인지상정.

라인을 조금씩 끌어올리며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한국— 오오오오오-

한국— 오오오오오-

완전히 기운을 차린 붉은 악마의 응원 덕분일까.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활력이 돌았다.

삐빅-

때로는 너무 의욕이 넘치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무리한 슬라이딩 태클로 자부의 발목을 직격한 구재철이 옐로카드를 받아 들었다.

“됐어, 그만해 임마. 네 맘 다 알아. 잘했어, 잘했어.”

누가 봐도 경고감이었지만, 본인은 억울했던 모양.

윌마르 롤단 주심에게 따지려던 재철이를 뜯어 말렸다.

한참 추격하는 분위기인데, 지금 심판한테 밉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평소 유쾌한 성격의 재철이지만, 가끔씩 ‘삔또’가 한 번 나갈 때가 있어서 컨트롤을 잘 해줘야 했다.

물론 내 앞에서는 순한 양이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쑥스럽지만, 대표팀 후배들에게 정백강이란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즐라탄에게 호나우두가 그랬듯, 손형민 같은 경우는 침실 벽면을 온통 내 포스터로 도배해놨을 정도.

쓸데없는 자랑은 여기까지.

경기에 집중할 때다.

파아앙-

무리한 플레이로 실점의 씨앗을 뿌렸던 페굴리가 명예 회복에 나섰다.

카드를 받더니 다소 소심해진 재철이를 가볍게 제친 후 선제골의 주인공인 슬리마니에게 날카로운 로빙 스루패스를 배송했다.

트래핑하기 쉬운 볼은 아니었는데, 슬리마니가 점프하면서 왼발 안쪽으로 깔끔하게 잡아 놓았다.

일촉즉발의 위기.

“나이스 태클!”

이게 분데스리가 센터백의 위엄인가.

침착하게 기다리던 정후가, 슈팅 직전에 정교한 슬라이딩 태클로 저지에 성공했다.

“크악!”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슬리마니.

삐빅- 삑삑-

어어? 안 되는데?

롤단 주심이 격하게 휘슬을 불어대며, 잔디 위를 뒹구는 슬리마니를 향해 달려갔다.

* * *

이예에에에에—

우우우우우우—

양 팀 응원단의 함성과 야유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롤단 주심은 품에서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고, 그 대상은 슬리마니였다.

페널티킥을 유도하려고 시뮬레이션 액션을 했다는 판정이었다.

휴우… 죽다 살았네.

PK인 줄 알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슬리마니가 뭐라 항변을 해 보았지만 롤단 주심의 태도는 단호했다.

가증스러운 녀석 같으니라구.

나는 스트라이커로 전향한 이후에 단 한 번도 시뮬레이션 액션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센터백 시절의 경험을 통해 그걸 당하면 얼마나 더러운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뭐, 굳이 치사한 수를 안 써도 골을 워낙 잘 넣어서 그런 것도 있었고.

정후의 파인 플레이 덕분에 큰 고비를 넘긴 성룡 선배가 천천히 프리킥을 준비했다.

형님, 작품 하나 만들어 봅시다.

뻐어엉-

전반전에도 이렇게 했으면 좀 좋을까.

성룡 선배의 호쾌한 프리킥이 유도탄처럼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나의 도약과 동시에, 약속된 패턴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동료들.

건호 선배는 터치 라인을 따라 와이드하게, 형민이는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재철이는 세컨드 찬스를 노리며 2선 침투.

경기 전 과르디올라 감독이 “공격력으로는 우리가 질 이유가 없다”고 말한 건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정확한 롱패스 한 번이면 ‘정백강 기지국’을 통해 이처럼 다양한 선택지를 가져갈 수 있는 팀이었으니.

어디, 이번엔 우리 막내 실력 좀 볼까?

“형민아!”

알제리의 3백을 바보로 만드는 절묘한 헤더 패스가 쇄도하는 형민이의 발 앞에 톡 떨어졌다.

2경기 연속골을 넣을 절호의 찬스.

형민이가 먼 포스트 쪽을 보고 오른발 슈팅을 시도했다.

므볼리 골키퍼가 반응조차 못할 정도로 강렬한 일격이었다.

콰아앙- 까앙-

날카로운 슈팅이었지만 종착지는 크로스바.

형민이가 아쉬움에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러나 아직 상황 종료는 아니었다.

“마이 볼!”

알제리 수비진이 잠깐 얼이 빠진 사이, 재철이가 루즈볼을 향해 달려들며 재차 슈팅.

퍼엉-

그러나 너무 급했다.

이번엔 골키퍼 정면.

가만히 서 있던 므볼리가 얼떨결에 펀칭으로 공을 쳐냈다.

우리 형민이랑 재철이.

아직은 더 연마해야겠네.

그래도 시도는 좋았어, 얘들아.

휘융- 콰과과광-

역시 한국인은 삼세번이 국룰.

유니폼이 늘어날 정도로 부여잡는 손길들을 뿌리치며 몸을 날린 내 이마에 제대로 맞은 공이,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의 므볼리를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며 골망을 흔들었다.

앞으로 한 골… 아니, 두 골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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