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삑- 삑- 삑—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으아… 너무너무너무 아깝다.
세 골 차로 앞서던 경기가 2-3이 된 이후 알제리 녀석들의 멘탈은 완전히 박살났다.
후반전은 완연한 우리의 페이스.
딱 하나 모자란 게 있다면 시간이었다.
5분만, 아니 3분만 더 주어졌더라면 경기 결과가 바뀔 수도 있었다.
최종 스코어 3-3.
후반 41분, 방주호의 크로스가 나의 세 번째 골로 연결되며 무승부를 거두는 데 만족해야 했다.
- 결국엔 정백갓이 살렸네 ㅋㅋㅋ
-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원맨팀인 건 마찬가지임
- 전반만 보고 껐는데 개아쉽 ㅠㅠ
- 알제리한테도 헤매면 벨기에는 어떻게 하누?
- 레알 ㅋㅋㅋ 정백강이 해트트릭 해줘도 못 이기는 팀 수준 ㅋㅋㅋ
- 우리가 벨기에한테 개발리고 알제리가 러시아 이겨서 16강 탈락할 듯
- 백갓 너무 불쌍… 하필이면 한국에서 태어나서…
- 진짜 피파 랭킹 10위권 나라 아무 곳이든 정백강 들어가면 바로 월컵 우승이지 ㅋㅋㅋ
비록 나의 해트트릭 덕분에 패배는 면했지만, 알제리전에 대한 팬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2승의 벨기에와 2패의 러시아가 탈락을 확정지은 가운데, 한 장 남은 16강 티켓을 두고 우리와 알제리가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우리는 3차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진출하는 상황이니 객관적으로 보면 알제리보다 유리했다.
그러나 벨기에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이 워낙 압도적이었던지라, 무승부도 힘겨워 보이는 미션.
거기에 추가적인 악재도 있었다.
“조 1위를 놓치면 매우 험난한 토너먼트 대진이 예상된다. 한국전에서 핵심 선수의 결장은 절대 없다.”
벨기에의 마르츠 빌모츠 감독이 100% 전력으로 우리를 상대하겠다고 공언한 것.
조금은 방심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물 건너 간 모양새였다.
벨기에전까지 남은 기간은 딱 3일.
알제리를 상대로 보여준 실망스러운 모습에 경악한 과르디올라 감독은 훈련 시간을 크게 늘렸다.
물론 몸을 혹사시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때문에, ‘머리로 하는’ 훈련이 주를 이뤘다.
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종일 비디오를 분석하고 토의하면서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찾았다.
최종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선수들도 고생했지만 과르디올라 감독의 노력은 정말 경이적일 정도였다.
오며 가며 코칭스태프들에게 듣는 내용에 따르면, 하루에 2시간을 잘까 말까 했다고.
그럼에도 훈련장에서 보여주는 열정과 에너지는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강렬했다.
가끔은 좀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눈빛만 보면 정말 축구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다.
* * *
2014년 6월 26일.
어딜 가나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는 슈퍼스타 정백강이 이번에는 브라질 최대의 도시 상파울루에 떴다.
68,287석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아레나 코린치앙스였지만, 일찌감치 매진 사례.
쫄깃한 승부를 좋아하는 피파 덕분에, 우리와 알제리의 경기는 오후 5시에 동시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알제리가 러시아를 이기고 우리가 벨기에에게 진다면 골득실을 따져 봐야 하는 골치아픈 상황이 발생하는데, 조별리그에서 보여준 경기력만 보면 안타깝게도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백강 형!”
“반가워요!”
경기 전 몸을 풀고 있는데 아자르와 더브라위너가 인사를 하러 왔다.
불과 한 달 전에는 같이 빅 이어를 들고 기쁨을 나눴던 사이.
또 한 달 후에는 다음 시즌 준비를 위해 매일 볼 사이.
그러나 오늘만큼은 반드시 무찔러야 할 적이었다.
“너희 요새 좀 하더라?”
월드컵 무대에서 예상대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벨기에.
그 중심축은 누가 뭐래도 ‘레알 듀오’였다.
“그래봐야 형만 하겠어요? 알제리전 해트트릭은 대단했어요.”
더브라위너가 비행기를 태웠다.
“빌모츠 감독도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어차피 조별리그 통과했는데 선수들 좀 쉬게 해주지.”
나의 농담 섞인 투정에 아자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도 프랑스는 좀 부담스러워서요.”
그렇다.
우리 조 2위가 맞붙을 상대는 D조 1위 프랑스.
반면 1위로 올라가면 G조 2위인 미국을 상대하게 되는 대진이었다.
미국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팀이었지만 그래도 프랑스에 비하면 양반.
“카림 형 메시지 봤어요?”
“그래, 케빈.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더라.”
먼저 기다리고 있는 프랑스의 에이스 벤제마는 ‘레알 단톡방’에 벨기에 저지를 입고 찍은 사진을 올렸다.
너무나도 노골적인 응원전.
벨기에 듀오나 벤제마나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내 따까리(?)들인데.
이렇게 나오신다면 억울해서라도 1위를 해야 쓰겄다.
* * *
“본인 역할에 대해 더 설명이 필요한가?”
“아닙니다, 감독님!”
“좋아.”
빅매치라는 말이 모자라게 느껴질 정도로 중요한 이번 경기에서 과르디올라 감독이 꺼내든 필살기는 3-5-2 포메이션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한 3백.
한국의 월드컵 역사를 돌이켜 보면, 3백은 2006년 독일 월드컵 첫 경기였던 토고전에서 마지막으로 쓰인 바 있었다.
8년 만에 3백이 부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배경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불안’이었다.
알제리에게도 휘둘리는 4백으로는 벨기에의 막강 공격진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게 과르디올라 감독의 판단.
양쪽 윙백이 경우에 따라서는 5백을 형성하며 적의 예봉을 꺾겠다는 이야기였다.
골을 책임질 투톱은 나와 손형민.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빅 & 스몰’ 조합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점유율은 신경쓰지 마라. 공을 잡으면 일단 백강 쪽을 봐줘.”
과르디올라 감독이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지시.
한국에 오고 나서 이미 변하긴 했지만, 월드컵을 치르면서 더더욱 현실적인 지도자가 되어가는 과르디올라였다.
일평생 유지했던 신념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 말이지.
승부욕이 다른 요소를 모두 덮어 버린 모양이었다.
“알제리는 러시아를 무조건 이긴다. 그렇게 생각하고 경기에 임하도록. 알았나?”
“알겠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축구 더럽게 못하는 러시아에게 뭘 기대하겠어요.
우리 경기를 잘 치르면 그뿐이죠.
엄청난 함성과 함께 드디어 킥오프.
요즘 절정의 경기 운영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더브라위너가 중원에서 공을 잡고 사방을 살폈다.
원래부터 남달랐던 양발 킥력과 활동량에, 노련미가 쌓이면서 상대 압박 대처까지 능수능란해진 더브라위너는, 현 시점 최고의 미드필더를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너끈히 들어가는 녀석이었다.
우리 미드필더 중 수비력이 가장 좋은 한국연이 전담 마크로 나섰지만 클래스 차이가 워낙 심했다.
킥 페이크 한 번으로 국연이를 날려버린 더브라위너가, 최전방의 로멜로 루카쿠 쪽으로 날카로운 스루패스를 시도했다.
벨기에 부동의 원톱 루카쿠는 190cm이 넘는 근육질의 거구이지만, 몸싸움보다는 스피드로 승부를 보는 타입의 스트라이커.
이를 잘 알고 있는 과르디올라 감독은 우리 센터백 중 그나마 발이 빠른 빠른 김연권-홍정후-황성호로 3백을 구성했다.
스타트를 먼저 끊은 성호가 패스를 멀리 걷어내며 벨기에의 첫 공격은 일단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루즈볼을 후방에 있던 악셀 비첼이 따내면서, 금세 소유권을 되찾는 벨기에.
오늘 경기 내내 지겹도록 반복될 장면이었다.
앞서 더브라위너도 그랬지만, 비첼 역시 공을 잡자마자 습관적으로 왼쪽 측면 상황부터 확인했다.
최강의 크랙인 아자르가 버티고 있는 자리였다.
축구판의 유일신 정백강과 인간계 최강으로 꼽히는 ‘메날두’를 제외하면 아자르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 선수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만큼 우리 수비진 역시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차도리 선배 대신 오른쪽 윙백으로 나선 김찬수 선배가 기본적으로 그림자 마크를 하고, 이건호 선배와 기성영 등이 패스 길목에 서서 공 투입 자체를 못하도록 막는 중.
일단 볼을 잡으면 어떤 끔찍한 짓(?)을 벌일지 모르는 녀석이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조아! 잘하고 이써!”
과르디올라 감독이 계속해서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3백의 효과인지 동기부여의 차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처참했던 알제리전과 비교했을 때 초반 분위기는 꽤 훌륭했다.
볼 점유율은 벨기에 쪽이 압도적이었으나, 생각만큼 쉽게 찬스를 만들지는 못했다.
앞쪽으로의 패스길이 막힌 더브라위너가 몇 차례 위협적인 중거리포를 날렸지만 수문장 김성규의 손에 번번이 걸렸다.
골키퍼의 발밑 기술과 킥력을 유독 중시하는 과르디올라 감독은 부임 이후 항상 전성룡 선배를 ‘원픽’으로 써 왔지만, 오늘의 선택은 성규였다.
성룡 선배가 ‘선방 빼고 다 잘하는’ 골키퍼라면 성규는 ‘다른 건 별로지만 선방만큼은 끝내주는’ 스타일.
성규의 기용은, 벅찬 상대를 만난 과르디올라 감독이 정말 모든 걸 내려놨다는 증거였다.
“타이밍 계속 늦어! 패스 좀 한 박자 빨리 줘!”
공 한 번 제대로 못 잡아 본 아자르의 입에서 짜증 섞인 요구가 나왔다.
우리 에덴이가 화가 많이 났구나.
무리뉴가 지도하는 팀에서 오래 뛴 내게는 상당히 익숙한 장면이었다.
뭔가 열심히 두드리는 느낌은 드는데, 정작 따지고 보면 실속은 하나도 없는 상황.
이게 지속적으로 반복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게 된다.
첫 번째 반응이 방금처럼 짜증을 내는 것이고, 두 번째 반응은…
“나한테 패스해!”
바로 무리한 플레이였다.
패스 공급이 안 되자 답답해서 하프라인 아래까지 내려가 공을 건네받은 아자르가 직접 드리블로 전진을 시작.
심리적 요인 때문에 시야가 좁아진 아자르는, 찬수 선배와 성영이의 커버까지는 확인했지만 뒤쪽에서 덮치는 건호 선배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촤아아악-
옐로카드와 파인 플레이의 경계는 한 끗 차이.
건호 선배의 과감한 백태클은 그 선을 정확하게 지켰다.
일단 공을 빼앗았으니 다음 스텝은 뻔했다.
찬수 선배가 성영이에게 볼을 건넸고 성영이는 나를 부르며 오른발을 휘둘렀다.
“선배!”
뻐어엉-
내 마크맨은 다니엘 반 부이텐.
괴물 같은 피지컬의 소유자로 한때 나를 가장 심하게 괴롭혔던 바로 그 반 부이텐이었다.
그러나 그도 어느덧 서른여섯.
당장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원래부터 약점이던 민첩성과 순간 속도의 저하가 극심하게 두드러졌고, 그의 출전을 예상했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이미 지시를 내려 놓은 상태였다.
- 아마 저쪽에선 백강을 잡기 위해 반 부이텐을 선발로 내세울 거다. 그렇다면 백강에게 ‘속도 경쟁’을 시켜라. 충분히 승산이 있다.
최전방을 겨냥한 성영이의 롱패스가 평소보다 길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세상 어느 감독이 정백강에게 뒷공간을 노리라고 하겠는가.
구할 수 있는 데이터는 죄다 구해서 잠도 안 자고 분석 또 분석했던 과르디올라 감독의 헌신적인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티보! 나와야 돼!”
이미 따라잡긴 글렀음을 직감한 반 부이텐이 티보 쿠르투아 골키퍼에게 호통을 쳤다.
긴 팔을 이리저리 휘드르며 각도를 좁히고 나오는 쿠르투아.
그러나 내 눈은 이미 절대 막을 수 없는 코스를 발견해 놓았다.
투콰앙-
원바운드 된 공에 몸을 날려 작렬시킨 다이빙 헤더가 쿠르투아의 다리 사이를 통과하며 날아가 골망을 갈랐다.
전반 23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대한민국의 선취골이 터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