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65화 (166/176)

165화

2014년 6월 30일.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 위치한 이스타지우 마네 가힌샤.

월드컵 2회 우승에 빛나는 전설적인 윙어 가린샤의 이름을 붙인 이 경기장에서, 대한민국과 프랑스의 통산 4번째 맞대결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역대 전적은 우리 기준으로 3전 1무 2패.

단 한 번도 ‘판맛’을 본 적이 없었다.

양 팀의 현실적인 전력 차를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 경기가 끝나면 브라질, 콜롬비아, 네덜란드, 코스타리카에 이은 다섯 번째 8강 진출국이 가려질 예정이었다.

“후아… 후아…”

월드컵에선 모든 게 난생 처음인 손형민은 첫 토너먼트 경기를 앞두고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짜식, 많이 떨리냐?”

“헤헤… 지면 바로 탈락이라는 게 좀 부담스럽네요.”

“걱정 마, 나만 믿어.”

“역시 우리 선배님! 알겠습니닷!”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라고 해서 자신감이 넘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나까지 흔들리면 절대 이길 수 없는 경기였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벨기에전에서 사용했던 3-5-2 포메이션을 다시 꺼냈다.

현 시점에서 그나마 이변의 가능성이 있는 전술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프랑스는 디디에 데샹 감독이 애용 중인 4-3-3으로 맞대응했다.

원톱에 벤제마, 양쪽 윙어에는 앙투안 그리즈만과 마티유 발부에나, 중앙 미드필더로 폴 포그바와 블레즈 마튀이디, 그 밑을 받치는 수비형 미드필더 요안 카바예.

파트리스 에브라-마마두 사코-바란-마티유 드뷔시로 이어지는 4백은 말할 것도 없고, 골키퍼는 위고 요리스였다.

하다못해 벤치에는 올리비에 지루나 바카리 사냐, 로랑 코시엘니 등이 출격 대기 중.

프랑스의 호화스런 라인업을 보다가 우리 쪽을 보면 살짝 한숨이 나왔다.

이 정도면 같은 국가대표라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의 차이.

프랑스 선수들이 단체로 정신줄을 놓지 않는 이상, 조직적인 수비로 죽어라 버티다가 정백강의 한 방을 노려야 겨우 승산이 있어 보이는 경기였다.

삑—

긴 휘슬과 함께 프랑스의 선축으로 전반전이 시작되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하프라인 아래 쪽으로 내려가 단단히 수비라인을 형성했다.

단판으로 결정되는 만큼, 프랑스도 딱히 승부를 서두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역삼각형 형태로 세운 중앙 3미들을 축으로 볼을 돌리며 기회를 엿보는 프랑스.

선수 시절 굵직한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컵을 들어 올렸던 데샹 감독은 토너먼트의 생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건 빠른 템포의 난타전인데, 프랑스 녀석들은 그렇게 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매우 공격적인 성향의 미드필더인 포그바조차 무리한 전진을 자제한 체 볼 순환에 집중.

활동량이 좋은 그리즈만과 ‘연계왕’ 벤제마까지 중원 싸움에 합세하면서, 초반부터 프랑스가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져갔다.

이미 예상했던 그림.

관건은 수비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강호들은 이렇게 볼을 돌리다가도 단 한 번의 페네트레이션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터엉-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1선과 2선을 부지런히 왕복하던 벤제마가 오른쪽 측면의 발부에나를 향해 날카로운 스루패스를 연결했다.

“마이!”

조별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던 방주호의 체력 고갈로 인해 처음 선발로 나선 레프트윙백 홍찬이 발부에나의 앞을 막아섰다.

월드컵 첫 선발 무대를 16강에서 치르게 됐으니 찬이의 몸도 많이 굳어 있을 터.

아니나 다를까 발부에나의 화려한 바디 페인팅에 속아 무게중심을 잃으며 순식간에 뻥 뚫려 버렸다.

스피디한 돌파로 측면을 붕괴시킨 발부에나가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쇄도하는 그리즈만을 발견하고 낮고 빠른 크로스를 올렸다.

까앙—

다이렉트로 시도한 그리즈만의 땅볼 슈팅이 왼쪽 골포스트 바깥쪽을 맞으며 골아웃.

자칫하면 10분을 채 못 버티고 실점할 뻔했다.

“미안미안! 내 잘못이다!”

돌아 들어가는 그리즈만을 완전히 놓친 차도리 선배가 오른손을 들어 동료들에게 사과를 건넸다.

오프더볼 무브가 워낙 좋고 발도 빠른 그리즈만이라, 전담 수비수인 도리 선배 앞에 고생길이 훤하게 열렸다.

한숨 돌린 김성규의 골킥으로 경기 재개.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공격권이었다.

뻐어엉-

성규의 킥은 전성룡 선배와 비교하면 확실히 멀리 뻗지 못했다.

공을 따내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가 점프.

“quoi!”

나를 직접 상대해보는 게 처음인 카바예가,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높이를 보고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처음에는 형민이랑 작품 하나 만들어 볼 생각이었는데, 너무 뻔한 패턴이라 그런지 사코가 형민이를 확실하게 마크하고 있었다.

별 수 없이 기성영 쪽으로 길게 헤더 백패스.

그러나 성영이가 트래핑 미스를 범했고, 마튀이디가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득달같이 달려들며 공을 탈취했다.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프랑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역습 모드로 전환하며 템포를 확 끌어올렸다.

마튀이디에게 공을 건네받은 포그바가 우월한 기럭지를 뽐내며 거침없이 치고 나갔다.

추풍낙엽처럼 무너지는 우리 수비진.

형민이의 태클은 빗나가고, 한국연이 몸싸움을 걸어갔으나 되려 튕겨져 나왔다.

흥이 난 포그바는 직접 골을 노렸다.

콰아앙-

오른발에 제대로 걸린 중거리포가 굉음을 내며 빨랫줄처럼 날아갔다.

터억-

성규가 몸을 날리며 가까스로 막아내나 싶었는데…

“안돼!”

모두가 포그바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유유히 박스 안에 들어선 벤제마가, 김연권의 절규를 비웃듯 리바운드된 볼을 오른발로 밀어 넣었다.

전반 8분만에 터진 선제골.

기어이 10분을 버티지 못했다.

아… 오늘도 쉽지 않겠구나.

썩을.

* * *

골을 먼저 넣어도 모자랄 판에 실점부터 하면서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이제부터 그냥 잠그기만 해서는 눈 뜨고 탈락하게 생겼으니.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공격적으로 나서야 했다.

“건호! 올라가!”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건호 선배의 위치를 조정하며 3-5-2에서 3-4-3으로 전환했다.

한 골을 지키는 축구를 할 용의가 없는 데샹 감독은, 우리가 뭘 하든 신경쓰지 않고 현재 전술을 유지.

그래도 조별리그를 통해 예방주사를 맞은 덕분인지, 실점 이후 급격히 수비가 망가지는 증상은 좀 줄어들었다.

3백의 가운데에서 커맨더 역할을 하는 홍정후의 지휘 아래, 양쪽 윙백과 미드필더들이 촘촘한 두줄 수비망을 형성한 후 상대의 전진 패스를 끊어냈다.

여전히 점유율은 프랑스가 압도했으나 그럴싸한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첫 골로부터 20분 정도는 일종의 소강상태.

답답함을 느꼈는지 포그바가 또 한 번의 중거리포를 시도했으나 골대를 크게 벗어났다.

성규야, 이번엔 잘 좀 차 보자.

이를 악물고 찬 성규의 골킥이 아까보단 좀 더 멀리 날아왔다.

흐음… 데샹 이 양반이…

형민이에게는 아까처럼 사코가, 건호 선배에게는 에브라가 찰싹 달라붙어 여차하면 인터셉트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료들의 발이 이렇게나 묶여 버리면, 내 머리가 경기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것 참, 다른 방법이 생각 안 나네.

앞서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곤 해도, 우리 중원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성영이었다.

녀석이 스스로 한 번이라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어차피 가망 없는 경기였다.

내 헤더 패스가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성영이에게 날아갔다.

기다렸다는 듯 들이닥치는 마튀이디.

투욱-

그렇지! 그거다, 성영아!

성영이가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마튀이디의 다리 사이로 공을 빼내자 관중석에서 짧은 탄성이 나왔다.

대한민국 대표 미드필더로서의 자존심을 세우는 멋진 기술이었다.

두어 번 정도 더 드리블을 치며 전진한 성영이가, 이번엔 왼발 정확도를 과시하며 오른쪽 측면으로 볼을 연결했다.

공을 잡은 선수는 공격에 가담한 도리 선배.

툭- 탁-

공격 전개의 리듬이 매우 좋았다.

도리 선배가 건호 선배와의 2대 1 패스를 통해 하프라인을 넘어섰다.

촤아악-

야,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아.

간만에 괜찮은 장면 나왔는데…

도리 선배의 뒤를 끝까지 따라온 그리즈만이 과감한 슬라이딩 백태클로 볼을 터치라인 밖으로 걷어냈다.

즉시 주심에게 항의를 해봤지만 노파울 선언.

포지션 대비 최상급의 수비 가담 능력을 자랑하는 그리즈만다운 파인 플레이였다.

넘어졌다가 오뚝이처럼 일어난 도리 선배가 재빨리 스로인을 던져 넣었다.

전력이 앞서는 상대로부터 실수를 이끌어내려면, 뭐든 빨리빨리 진행하는 쪽이 유리했다.

“그냥 뻥 차요! 선배!”

내가 소리를 빽 지르자 건호 선배가 떨어지는 볼을 무작정 높이 띄워 찼다.

차마 크로스나 패스라고 부르기도 민밍한 킥이었다.

그래도 일단 박스 쪽으로 붙여 놓으면 무슨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질 지도 몰랐다.

그 수신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정백강이라면 말이다.

“Que puis-je faire?”

“Je vais le faire!”

요리스 골키퍼와 바란이 치사하게(?) 프랑스어로 의견을 교환했다.

비록 알아듣진 못했지만 눈치 100단인 내가 봤을 때, 공중볼을 누가 처리하느냐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다.

요리스가 뛰쳐나오지 않는 걸 보니 아마 바란이 나를 막기로 합의를 본 듯싶었다.

낙하지점과 상대 수비 배치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런 똥볼을 골로 연결하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특급 배구 선수들이 안 좋은 토스를 가지고 터치아웃을 유도하듯이, 내게도 엉망으로 올라온 볼을 처리하는 나름의 기술이 있었다.

별 건 아니고, 그냥 골키퍼 정면을 향해 풀파워로 때려 버리는 것이었다.

세자르 형님이나 카시야스 주장 같은 월드클래스 골키퍼들도, 무자비하게 내려친 나의 헤더를 깔끔하게 잡아내는 건 어려워했다.

공을 쳐낼 수밖에 없다면,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박스 안에서의 혼전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투콰아아앙-

섬세한 컨트롤 따윈 개나 줘 버린 채, 오직 파워를 싣는 데만 집중해서 작렬시킨 헤더가 요리스를 향해 날아갔다.

월드컵 버프 덕인지 이마에 닿는 느낌부터 달랐다.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뻗어나가는 공.

순간 촉이 왔다.

이건 된다, 뭔가 된다!

착지와 동시에 본능이 이끄는 방향으로 다시 몸을 움직였다.

투우웅-

요리스의 움직임은 내 예상대로였다.

다급하게 양손을 모아 펀칭.

“마이 볼!”

“Mon ballon!”

주인 잃은 볼을 향해 나와 바란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가장 느린 사나이.

반면 바란은 수비수 주제에(?) 팀 내 스피드 테스트에서 항상 3위 안에 드는 대표적인 준족이었다.

속도 대결은 승산이 없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라파엘! 비켜!”

무섭게 고함을 치며 왼발로 땅을 박차면서 몸을 날렸다.

발바닥에서부터 승모근까지, 그야말로 온몸의 힘을 끌어모은 혼신의 다이빙.

콰앙-

간발의 차이로 바란의 오른발보다 내 머리가 먼저 공에 닿았고, 이어서 극심한 통증과 함께 얼굴에서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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