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그렇다니까요. 왜 이렇게 아들을 못 믿으실까.”
- 너는 항상 괜찮다고만 하니까 그러지.
오, 이 지적은 상당히 날카로웠다.
포츠머스로 이적하면서 한국을 떠난 이후 엄마와 수많은 통화를 했지만 ‘괜찮아요’, ‘좋아요’ 외에는 한 말이 없었다.
힘들다고 말해도 바뀌는 것도 없는데, 괜히 우리 김영순 여사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거예요.”
- 속상해서 정말… 생전 안 다치던 애가 신발에 찍혀서 피를 철철 흘리니 얼마나 놀랐는 줄 아니?
“생각보다 그리 아프지 않아요.”
사실은 무지하게 아팠다.
- 나연이 바꿔줄게.
“넵.”
잠시 부스럭하는 소리가 나더니, 수화기를 통해 나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시 한 번 물어볼게. 괜찮은 거 맞아?
“믿어주세요, 제발. 내 신뢰도가 이렇게 낮았나?”
- 팀닥터 선생님한테 전화해 본다?
“우리 선생님도 알아?”
- 내가 <하이, 풋볼> 진행 몇 년 차인데. 당연히 알지.
이런 무섭고 어여쁜 사람 같으니라고.
앞으로도 축구 관련해서 거짓말은 꿈도 못 꾸겠다.
“하늘에 맹세코 괜찮습니다. 8강전도 뛸 거고, 선생님한테 전화해도 돼. 처음엔 몇 바늘 꿰매야 되는 줄 알았는데 괜찮다고 하시더라고.”
- 그나마 다행이네. 컨디션은 좀 어때?
“언제나 그렇듯 최상이지.”
- 푸훗.
“응? 왜 웃어?”
- 어머님 심정을 알 것 같아서. 내가 컨디션 물어보면 언제나 최고다, 최상이다, 끝내준다, 그 소리밖에 안 하잖아.
“그거야 자기 목소리 들으면 내 몸이 저절로 좋아지…”
- 그런 거 하지 말랬지.
“넵. 죄송합니다.”
- 사랑해.
쩝, 이러면 말문이 막히잖아.
“나도 사랑해.”
* * *
8강전 격돌을 앞두고 진행된 기자회견.
독일 대표팀을 이끄는 요하임 뢰브 감독에게, 예상대로 남아공 월드컵 3-4위전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물론 잊지 않고 있다. 정백강에게 두 골을 내주면서 1-2로 패했었다. 기분 나쁜 패배였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4년 간 더욱 강해졌다. 순위 결정전이었던 지난번보다는, 4강 진출을 가리는 이번 대결이 훨씬 큰 승부다. 진짜배기 승부에서 이김으로써 복수에 성공하도록 하겠다.”
“벨기에, 프랑스에 이어 독일을 만나게 되었다. 때로는 고전하기도 했고, 위험한 순간도 많았지만 중요한 건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이다. 팀 전력에 대해 운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우리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주 치열하고도 재밌는 경기가 될 것이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이제 대진운에 대해서는 초연한 것 같았다.
남아공에 이어 2개 대회 연속으로 주장 완장을 찬 필립 람은 나에 대한 경계심을 숨기지 않았다.
“소속팀(바이에른 뮌헨)에서나 국가대표에서나 정백강에게 참 많이 당했다. 물론 최선을 다하겠지만, 솔직히 그를 상대로 무실점은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다득점 양상의 난타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 인터뷰이로 내가 단상에 오르자 기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미 태산처럼 쌓아 놓은 실적에, 붕대 투혼이라는 드라마까지 추가했으니.
요즘의 나는 정말 숨만 쉬어도 기삿거리가 되는 수준이었다.
- 부상으로 인해 플레이에 불편한 점은 없나?
“붕대 때문에 시야가 약간 가리긴 하지만 적응 중이다. 가능하면 8강전에는 붕대를 풀고 임하고 싶은데, 회복 속도를 봐야 할 것 같다.”
- 대회 전 두 자릿수 득점이 목표라고 했는데 현재 8골을 넣고 있다. 독일전에서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도 충분해 보이는데?
“독일 수비진이 워낙 만만찮아서 장담은 힘들겠지만, 람 선수 말대로 난타전 양상이 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 같아서는 독일전에 한 골만 넣고 4강전에서 두 자릿수를 넘기면 훨씬 더 기쁘겠다. 결국은 이기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 독일에서 특별히 신경 쓰이는 선수가 있나?
“한 명만 꼽긴 어려울 것 같다. 일단은 토마스 뮐러. 현 시점에서 뮐러보다 축구 지능이 높은 선수는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없는 공간도 만들어서 골을 넣는 그의 능력은 우리 수비진에 대단한 위협이 될 것이다. 다른 한 명은 토니 크로스다. 그는 지공과 속공을 가리지 않으며 데드볼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해서, 주의하지 않으면 크게 당할 가능성이 높다.”
- 마지막으로 경기에 임하는 각오를 부탁드린다.
“감독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에는 겸손 같은 건 놓아버리는 게 맞다. 무조건 이긴다, 그 생각밖에는 없다.”
* * *
2014년 7월 4일,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
대한민국과 독일의 8강전 장소는 ‘마라카낭의 비극’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바로 그 경기장이었다.
때는 1950년.
제4회 월드컵을 개최하게 된 브라질은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의 부푼 꿈을 안고 무려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경기장을 건설했다.
그 경기장이 바로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이었다.
국민들의 뜨거운 염원 덕분인지 브라질은 실제로 월드컵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승승장구했고, 결선리그 마지막 경기인 우루과이전에서 무승부만 거두면 줄리메컵을 들어올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식 통계로 199,954명이 운집한 마라카낭에서, 브라질은 우루과이에게 1-2로 무릎을 꿇으며 우승 트로피를 넘겨주고 말았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패배에, 현장에서 관중 2명이 심장마비로 숨졌고, 또 다른 관중 2명은 스스로 머리에 권총을 쏘아 목숨을 끊었다.
이후 전국적으로 폭동과 자살이 속출하며 나라가 혼란에 빠질 지경이었으니, 상상을 초월하는 여파였다.
“선배님, 뭔가 운명적인 힘이 느껴지지 않아요? 왠지 이 경기장이라면 언더독이 이길 것 같아요.”
프랑스전에서 골 넣은 이후 약간의 조증 증세를 보이고 있는 손형민이 설레발을 떨었다.
“우리가 언더독이라는 거야?”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언론에서 그렇게들 떠드니까요. 선배님이 떡하니 계신데 어떻게 저희가 언더독일 수 있겠어요?”
형민이 녀석, 발만 빠른 줄 알았더니 태세전환 속도도 장난이 아니었다.
오늘 독일의 포메이션은 4-2-3-1.
조별리그에서 한 골을 넣으며 호나우두와 함께 월드컵 통산 득점 공동 2위에 오른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원톱 자리를 차지했고, 2선에는 내가 찜한 위험 인물인 뮐러-크로스와 아스널에서 에이스 놀이 중인 메수트 외질이 버티고 있었다.
람이 나 때문에 무실점은 힘들 것 같다고 했었는데, 독일 공격진의 화려한 면면을 보고 있자면 암담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강팀 상대 전용 포메이션인 3-5-2로 출격 준비 완료.
다행히 회복 속도가 빨라서, 오늘은 붕대 대신 반창고만 두른 채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삑—
리우데자네이루의 청명한 하늘 아래서, 이번 대회 첫 4강 진출팀을 가릴 맞대결이 시작되었다.
* * *
독일 녀석들과 10여분 정도 부딪혀 본 후 든 생각은 딱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강하다!’
러시아를 제외하고 본선에서 붙은 팀들은 다 인상적이었지만 독일은 확실히 독일이었다.
남아공 때는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던 외질, 크로스, 뮐러, 제롬 보아텡, 마누엘 노이어 등의 핵심 선수들이 모두 전성기에 접어든 데다가, 람이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같은 경험이 풍부한 선수들도 여전히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신구의 조화가 완벽하단 이야기였다.
게다가 감독도 그대로에 선수단 구성도 크게 바뀌지 않아서, 클럽팀에서나 가능할 법한 수준의 팀워크를 뽐냈다.
전반전이나마 좋은 모습을 보였던 나이지리아가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우리도 3백 수비 전술에 대한 적응도가 더 높아졌기 때문에 버틴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벌써 몇 골 먹었을 터였다.
터억-
오늘 미친 활동량으로 혼자서 중원을 씹어먹다시피 하고 있는 사미 케디라가 또 한 번 기성영의 전진 패스를 끊어냈다.
볼 배급을 지나치게 성영이에게 의존한다는 게 우리 대표팀의 큰 약점 중 하나였는데, 뢰브 감독은 그걸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죽어라 측면만 팠던 나이지리아에게서 영감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터엉- 툭-
케디라가 지체없이 왼쪽 측면의 외질에게 공을 뿌렸고, 외질은 중앙의 크로스에게 원터치 패스를 전달한 후 빈 공간을 찾아 달렸다.
어지간히 호흡이 맞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고급 패싱 플레이로, 의사결정이 순식간에 탁탁 이루어졌다.
“외질 잡아!”
수비라인 지휘를 맡고 있는 홍정후의 콜은 일견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였다.
크로스가 돌연 방향을 바꿔 페널티박스 안쪽을 보기 전에는 말이다.
파아앙-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공이 귀신 같이 침투해 있던 뮐러의 품에 정확히 안겼다.
애초부터 외질의 움직임은 미끼에 불과했던 것이다.
뻐엉- 철썩-
소속팀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크로스-뮐러로 이어지는 패턴의 득점력은 무시무시했는데, 월드컵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반 19분.
뮐러의 이번 대회 5호골이 작렬하며 독일이 1-0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쩝, 그래도 프랑스한텐 10분을 못 버티더니 이번엔 20분 가까이 선방했네…
* * *
11명 중에서 딱 두 명 찍었는데, 걔네 둘이서 득점을 만들어내다니.
역시 나의 축구 보는 눈은 장난 아니…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그런데 희한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째 골을 먹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 몸 속에 나도 모르는 ‘M’의 기질이 있었던 걸까?
우리 선수들 역시 실점에 대한 데미지는 생각보다 적어 보였다.
조별리그와 16강을 통해 맷집을 기른 덕일 것이다.
묘한 기분을 느끼며 킥오프.
내가 만약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면 지금쯤 이렇게 외쳤을 터다.
- 천천히 가자! 시간 많아!
하지만 그것은 강자의 방식이었다.
‘자이언트 킬링(Giant Killing)’을 위해 필요한 건 여유가 아닌 속도였다.
나의 마크맨은 마츠 훔멜스.
소속팀 도르트문트와 전차 군단에서 대체 불가능한 센터백으로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는 훔멜스는, 약점이 거의 없는 선수로 평가받고 있었다.
굳이 흠을 잡자면 190cm이 넘는 장신에 체중도 적잖게 나가다 보니 스피드나 민첩성이 좀 부족하다는 것 정도?
하지만 벨기에의 반 부이텐만큼 둔하지는 않아서, 순진하게 내 발로 공략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이 녀석을 어떻게 뚫고 득점을 할 것인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분석의 황제 과르디올라 감독과, 지난 7년 간 정상급 센터백들을 탈탈 털고 다닌 나의 의견이 정확히 일치했다.
‘지저분하게’ 하는 게 베스트라는 결론이었다.
훔멜스는 잘생긴 외모만큼이나 플레이도 지능적이면서 깔끔한 친구.
수비 마인드 자체가 파이터형보다는 커맨더형에 가까웠다.
“일단 나한테 붙여!”
나는 노골적으로 공을 요구하면서 일부러 훔멜스에게 거친 몸싸움을 걸어갔다.
피지컬이 좋은 훔멜스라 쉽사리 밀리진 않았지만, 녀석의 신경을 긁어 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한 번, 또 한 번…
우리가 공을 잡을 때마다 지독하게 몸을 부벼대자 훔멜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그리고 곧 성과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