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69화 (170/176)

169화

스코어는 당연히 동점이었지만, 연장전을 맞이하는 양 팀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승리의 9부 능선까지 넘었다가 굴러떨어진 우리는 정신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독일 녀석들은 아주 기세가 등등했다.

이런 차이는 경기 내용에도 반영되었다.

연장 전반이 시작되자마자 ‘영웅’ 슈바인슈타이거의 중거리포로 포문을 연 독일은, 우리를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우리는 정규 시간 동안의 단단한 모습을 잃어버렸다.

까앙-

쉬를레의 슈팅이 골포스트를 맞히고,

“노우(No)!!!”

외질의 패스를 받은 뮐러가 골을 넣었지만 오프사이드가 선언되면서 구사일생을 하기도 했다.

독일을 수렁에서 건져냈던 신의 가호가 이번엔 우리에게 자리한 것 같았다.

이런 흐름에서 승부차기로 가는 건 아쉽다고 생각했는지, 뢰브 감독이 선수들을 과감하게 전진 배치했다.

역습 위험은 감수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상대의 수를 본 과르디올라 감독은 역으로 필살기를 준비했다.

“형민! 올라가!”

손형민의 수비 부담을 줄여주는 선택이었다.

‘너희 잘못하면 역습 한 방에 훅 간다’는 위협.

감독 간의 자존심 대결이 살벌했다.

숙제를 받아 든 뢰브 감독은 ‘못 먹어도 고’를 외쳤다.

역습이고 나발이고 간에 무조건 골을 넣겠다는 자세였다.

터엉-

연장전 들어 삽질을 거듭하던 곽휘태 선배가 오랜만에 좋은 위치선정을 보여주며 외질의 크로스를 끊어냈다.

루즈볼을 잡은 기성영에게 케디라가 흉포하게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결국 탈압박에 실패하며 공을 내준 성영이.

신이 난 케디라가 내친김에 직접 슈팅을 시도했다.

퍼억-

슈팅 경로에 서 있던 홍정후가 배로 볼을 막아냈다.

“크어어억!”

정후 부모님이 경기를 보고 계셨다면 눈을 질끈 감았을 만한 장면이었다.

끔찍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정신줄을 부여잡은 정후가 다이렉트로 공을 걷어냈다.

4강에 반드시 가겠다는 결의가 느껴지는 허슬 플레이였다.

“마이 볼!”

후배가 몸을 던져서 만들어준 기회.

대한민국의 주장으로서, 그리고 에이스로서.

내게는 이 볼을 살려야 할 책무가 있었다.

“형민아!”

공격 둘, 수비 셋.

할 만한 싸움이었다.

파앙-

체력을 비축하고 있던 형민이가, 순간적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그래, 바로 그거야.

“선배니임!”

형민이가 착지와 동시에 돌아 들어가는 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공을 높게 띄워 찼다.

상대 수비가 셋이든 넷이든 열이든, 내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직 정백강만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이.

후반 들어 살아난 모습을 보이던 훔멜스였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집중력이 떨어지며 내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녀석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이제 하나뿐.

삐빅- 삐비빅-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훔멜스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옐로카드.

퇴장이었다.

* * *

파울을 하는 순간 운명을 예감했던 듯, 훔멜스는 항의조차 하지 않고 조용히 들어갔다.

뢰브 감독이 풀 죽은 훔멜스를 끌어안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렇게 될 거였다면 역시 훔멜스를 교체했어야 하는 걸까?

물론 아무 의미 없는 결과론이었다.

직접 골문을 노렸던 성영이의 프리킥은 빗나갔으나, 이제 모멘텀은 우리 쪽으로 완전히 넘어왔다.

선수들이 정신적·육체적으로 완전히 지쳐 있는 연장전에서 수적 우위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메리트였다.

뢰브 감독은 수비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외질을 불러들이고 장신 수비수 메르테사커를 투입했다.

승부차기까지 버텨 보겠다는 의미였다.

“Ich muss bleiben!”

주장 람의 지휘 아래 밀집 수비 대형을 구축하는 전차 군단.

워낙 덩치들이 좋다 보니 10명임에도 불구하고 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단 돌려! 시간은 충분하다!”

우리는 과르디올라 감독의 지시에 따라 침착하게 점유율을 높였다.

공간을 메우느라 뛰어다니는 것만 해도 독일 녀석들에게는 체력적인 부담이었다.

5분가량 남아 있던 연장 전반은 그대로 마무리.

이제 남은 시간은 15분.

“건호, 준비해.”

과르디올라 감독은 수비형 미드필더 한국연을 이건호 선배로 대체했다.

“전술은 단순하다. 백강한테 붙이고, 나머지는 침투한다.”

형민, 건호 선배, 그리고 구재철에게 내려진 미션.

내가 떨궈주는 볼을 어떻게든 받아먹을 것.

물론 성영이의 중거리포도 옵션이었다.

최후의 결전을 치르러 가는 선수들에게 과르디올라 감독이 당부했다.

“승부차기까지 가면 진다고 생각하자. 무조건 끝낸다는 각오로 나서라.”

킥오프.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지금부턴 정말 정신력 싸움이었다.

“백강아!”

차도리 선배가 지시받은 대로 내게 공을 붙였다.

방금 교체되어 힘이 넘치는 건호 선배가 레프트백 베네딕트 회베데스를 따돌리며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쇄도.

이걸로 끝이다!

투웅-

초정밀 헤더 패스가 날아갔고, 건호 선배는 이를 깜짝 발리슛으로 연결했다.

“아이고!”

지켜보던 형민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골문 왼쪽 상단을 제대로 노린 슈팅 코스는 정말 기가 막혔는데, 노이어의 선방은 그보다도 더 환상적이었다.

한 마리 원숭이처럼 몸을 솟구치며 공을 쳐 내는 노이어.

세리머니를 준비하던 건호 선배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보아텡이 노이어를 일으킨 뒤 거칠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턴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코너킥을 차러 가는 성영이를 불러 세웠다.

“쟤네 120% 나한테 더블팀 붙일 거야. 휘태 선배 봐줘.”

“알겠어요, 형.”

예상대로 최장신인 메르테사커와 깍두기(?) 크로스가 내 마크맨으로 붙었다.

뢰브 감독도 내가 미끼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한 명만 배정한다는 건, 강철 심장을 가진 감독이 아닌 이상 하기 힘든 선택.

마인드 컨트롤을 위해 깊게 한숨을 내쉰 성영이가, 이윽고 오른발을 휘둘렀다.

회전이 잔뜩 걸린 아주 날카로운 킥이었다.

우리 대표팀의 ‘넘버투 뚝배기’인 휘태 선배가, 치열한 자리다툼 끝에 공에 머리를 갖다 대는 데 성공했다.

틱-

보아텡의 무릎에 맞으며 굴절되는 휘태 선배의 헤더 슈팅.

역동작에 제대로 걸린 노이어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번에야말로 골인가 싶은 순간,

우오오오-

관중석에서 탄식과 함성이 뒤섞였다.

바람처럼 몸을 날린 람이 시저스킥으로 공을 걷어낸 것이었다.

비록 적이지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플레이였다.

“으아아아!”

여전히 살아 있는 공.

페널티박스 바깥으로 떨어지는 루즈볼을 향해 형민이가 달려들었다.

가뜩이나 한 명이 적은데, 나에게 더블팀까지 붙인 상태.

형민이 앞의 공간이 확 트여 있었다.

사색이 되어 뛰쳐나가는 크로스.

드디어, 끝났다.

모두의 시선이 공에 쏠린 사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형민이가 다시 로빙 패스를 시도했다.

아까 훔멜스를 보냈던 것과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공.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독일 대표팀 전체를 귀향시킬 예정이라는 점이었다.

콰아아아앙-

형민이가 경기 전 그랬었지.

마라카낭에선 어쩐지 언더독이 이길 것 같다고.

정말 그렇게 됐네.

* * *

[대한민국, 연장 혈투 끝에 독일 3-2 격파하고 월드컵 4강 진출]

[정백강 해트트릭... ‘세계 최고’ 다시금 입증하다]

‘마라카낭의 비극’이 쓰였던 바로 그 장소에서 ‘마라카낭의 쾌거’가 만들어졌다.

세계 축구의 변방 취급을 받던 대한민국이, 2개 대회 연속으로 월드컵 준결승에 진출하는 대사건이 완성된 것이었다.

충격에 빠진 독일 선수들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앉을 힘도 없어서 누워 버린 친구도 여럿이었다.

그 와중에 패자의 품격을 보여준 건 주장 람.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가장 먼저 내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축하해, 백강. 이렇게 된 이상 우승해 버리라고. 그래야 우리도 체면이 설 거 아냐.”

람은 역시 멋진 사나이였다.

“그래, 꼭 그러도록 할게.”

대한민국 대 독일의 혈전이 끝나고 약 1시간 뒤.

이제 카메라는 브라질 북동부의 해안도시인 포르탈레자로 넘어갔다.

이스타지우 카르텔랑에서 펼쳐지는 8강전 두 번째 경기.

우리와 결승 진출을 다툴 팀이 결정되는 승부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남미의 두 팀이 만난 매치업.

브라질과 콜롬비아의 대결이었다.

브라질은 별다른 수식어가 불필요한 전통의 강호.

‘월드컵 최다 우승국’이라는 설명 하나면 게임 끝이었다.

게다가 이번 대회에서는 ‘개최국 버프’까지 있었으니...

이에 비하면 콜롬비아의 월드컵 기록은 초라한 편이었다.

빡세디 빡센 남미 예선 때문에, 2010년까지 본선 진출 횟수가 고작 4회.

토너먼트 경험도 16강 1회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번 대회의 콜롬비아는 뭔가 달랐다.

아르헨티나에 딱 2점 뒤진 전체 2위로 여유 있게 예선을 뚫더니, 그리스-코트디부아르-일본과 함께 한 조별리그에서도 3경기 9득점이라는 무시무시한 화력을 과시하며 쾌조의 3연승으로 조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일본을 상대로 거둔 4-1 승리는 한국 팬들에게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물해 주었다.

기세를 탄 콜롬비아는 16강 상대인 우루과이마저 2-0으로 완파하며 역사상 첫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일등공신은 하메스 로드리게스.

팀이 넣은 11골 중 무려 5골을 책임지며 전 세계에 본인의 이름을 알렸다.

통산 6번째 월드컵 우승을 노리는 브라질과 돌풍의 팀 콜롬비아의 맞대결.

선취골을 넣은 건 브라질이었다.

전반 7분 마르셀루가 특유의 오버래핑을 통해 코너킥을 유도해냈고, 네이마르의 코너킥을 티아구 실바가 헤더골로 연결하며 홈팬들을 광란의 도가니에 빠트렸다.

삼바 리듬을 타기 시작한 브라질은,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추가골을 위해 분주히 뛰었지만 콜롬비아의 수비력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전반전은 그대로 1-0 마무리.

콜롬비아의 호세 페케르만 감독은 후반 시작과 동시에 최전방 스트라이커를 카를로스 바카로 바꿔 주었는데, 이게 제대로 적중했다.

바카는 역습 상황에서 자신의 최대 장점인 라인 브레이킹 능력을 제대로 살려 브라질 수비진을 위협했고, 후반 24분에는 하메스의 날카로운 스루패스를 받아 세자르 형님의 파울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자신이 반쯤 만들어낸 페널티킥의 키커로 나선 하메스는, 세자르 형님을 완벽하게 속여 넘기며 대회 6호 골을 꽂아 넣었다.

이 뜨거운 승부에 마침표가 찍힌 건 모두가 연장을 생각하던 후반 40분.

네이마르가 화려한 발재간으로 콜롬비아 진영에서 프리킥을 얻어냈고, 키커로는 다비드 루이스가 나섰다.

골문과의 거리는 약 30m.

직접 슈팅하기엔 좀 멀지 않을까 싶었지만, 루이스의 오른발은 거침이 없었다.

굉음을 내며 발등에 얹힌 공은 골문을 넘어갈 기세로 날아가다가 돌연 뚝 떨어지며 오른쪽 상단에 꽂혔다.

세계 최고의 대회에서 작렬한 무회전 프리킥.

자신의 하이라이트 필름에 영원히 남을 인생골을 터뜨린 루이스는,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경기장 위를 질주했다.

센터백 두 명이 나란히 골을 터뜨리는 진풍경 속에, 결국 브라질이 2-1 승리.

정백강이 이끄는 대한민국의 다음 상대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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