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세계 축구의 정점을 가릴 월드컵 4강 대진이 완성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을 연달아 물리친 이변의 주인공 대한민국.
월드컵 최다 우승 기록을 자랑하는 개최국 브라질.
‘2인자’ 리오넬 메시를 앞세워 8강에서 난적 벨기에를 꺾은 아르헨티나.
마지막으로 지난 대회 준우승의 설움을 씻으려는 네덜란드까지.
“개막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를 우승 후보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써내고 말았다. 16강과 8강을 거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강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브라질전은 정확히 50 대 50의 승부라고 생각한다.”
역대급 대진운 속에서도 4강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달성한 과르디올라 감독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솔직히 독일과의 만남을 예상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토너먼트에서는 기본 전력도 전력이지만 기세가 가장 중요한데, 최근 한국의 기세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지금까지 치른 경기 중 가장 어려운 승부가 될 것 같다.”
개최국 버프 때문에 4강 중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는 브라질의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은 신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나에 대한 팬들의 불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국가대항전에서 결과보다 중요한 건 없다. 사랑하는 조국에게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선사하는 것,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극단적 수비전술 때문에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알레한드로 사베야 감독의 임전 소감이었다.
“남아공 결승에서의 패배는 정말 뼈아팠다. 한동안 꿈에서까지 나와 잠도 이루지 못했을 정도였다. 두 번째로 찾아온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
오렌지 군단을 이끄는 루이 판 할 감독의 결기 역시 대단했다.
‘축구에 미친 나라’ 브라질에서 펼쳐지는 성대한 축제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 * *
2014년 7월 8일, 상파울루에 위치한 아레나 코린치앙스에서 4강전 첫 번째 경기가 열렸다.
남미와 유럽의 대표적인 강호인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의 통산 9번째 맞대결.
앞선 8번의 승부에서는 네덜란드가 4승 3무 1패로 꽤 큰 격차를 벌리며 앞서 있었다.
월드컵 본선 전적으로만 따져도 역시 2승 1무 1패로 네덜란드의 우위였다.
물론 역대 전적이라는 게 큰 의미가 있는 기록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르헨티나는 4-3-1-2, 네덜란드는 3-4-1-2 포메이션을 들고나왔다.
형태는 좀 다르지만 일단은 수비를 탄탄하게 유지하면서, ‘1’ 자리에 위치한 플레이 메이커의 창의성과 투톱의 결정력에 기대를 건다는 콘셉트는 비슷했다.
그 ‘1’로 낙점된 메시와 스네이더의 자존심 대결도 관전 포인트였다.
양 팀 응원단의 어마어마한 환호 속에 킥오프.
아르헨티나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하드캐리했던 1986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월드컵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고, 네덜란드는 아예 준우승만 3번이었다.
이번 대회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능했다.
선수들도 사람인데, 당연히 막대한 부담감을 안고 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심리적 여파는 경기 내용에 그대로 반영되어서, 전반전은 양쪽 모두 탐색전 모드.
서로 가드를 바짝 올린 채 상대가 먼저 때려 주기를(?) 기다렸다.
골키퍼에게 막힌 메시의 23m 짜리 프리킥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장면이 거의 없었다.
하품을 너무 많이 해서 턱 관절이 아파올 때쯤 전반 종료.
이제는 더 물러날 곳도 없어진 후반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팬들이 기다리던 화끈한 공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초반 분위기를 잡은 건 네덜란드.
중원에서 공을 잡은 아르연 로벤이 전방의 스네이더에게 땅볼 패스를 깔아주었고, 스네이더는 그 공을 감각적인 힐패스로 다시 쇄도하는 로벤에게 전달했다.
‘작품’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환상적인 2대 1 패스였다.
놀라운 스피드를 과시하며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침투한 로벤의 마무리 왼발 슈팅을, 필사적으로 몸을 날린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슬라이딩 태클로 걷어냈다.
이번 대회 아르헨티나의 공격을 이끄는 게 메시라면, 수비에서 가장 빛나는 선수는 마스체라노였다.
결정적 찬스를 놓친 로벤은 이어지는 공격에서 다시 중거리포로 골문을 노려 봤으나 골키퍼 선방에 막혔다.
10여분 가량 지속된 네덜란드의 턴은 결국 소득 없이 마무리, 이제는 아르헨티나가 뭔가 보여줄 차례였다.
선봉장은 역시 메시.
전반전 동안 볼 뿌려주기에 집중하던 모습에서 탈피, 저돌적인 돌파를 통해 돌격대장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메시가 드리블로 어그로를 다 끌어 놓은 후 스루패스를 찔러주면 투톱이 마무리하는 게 아르헨티나의 득점 공식.
네덜란드와 비교하면 ‘로벤+스네이더’의 파괴력을 혼자서 발휘하는 괴물이 바로 메시였다.
앞선 경기에서 완성도 높은 3백을 선보였던 네덜란드였지만, 확실히 메시에게만큼은 심하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결정을 지어줘야 할 에세키엘 라베찌-곤살로 이과인 투톱.
메시가 수비수 3명을 기본으로 달고 다니며 식도 패스를 연이어 제공했지만, 마무리 슈팅은 계속 홈런 아니면 골키퍼 정면이었다.
소속팀에서는 에이스 소리 듣는 뛰어난 선수들인데, 왜 국대 유니폼만 입으면 삼룡이가 되어 버리는지.
답답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는 메시의 모습이 자주 카메라에 잡혔다.
결국 90분의 정규시간 동안 결판을 내지 못한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고, 30분의 연장전 역시 0-0으로 종료되었다.
월드컵 역사를 통틀어, 4강전에서 무득점 무승부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약간은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새로 새긴 채 승부차기에 돌입.
이 피말리는 PK 대결에서 새로운 영웅이 탄생했다.
아르헨티나의 수문장 세르히오 로메로가 그 주인공.
로메로는 네덜란드의 1번 키커인 론 플라르와 세 번째로 나선 스네이더의 슈팅을 막아내며 포효했다.
로메로가 날아다니는 사이, 메시-에세키엘 가라이-세르히오 아게로로 이어지는 아르헨티나의 키커들은 단 한 번의 실축도 없이 모조리 성공.
4번 타자 막시 로드리게스가 통렬한 캐논 슈팅을 골문 한가운데로 꽂아 넣으면서 우여곡절 많았던 승부가 끝났다.
* * *
아르헨티나의 결승 진출 소식은, 우리 대표팀에게 썩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브라질-아르헨티나의 라이벌리는 한일전의 그것과 비견될 정도였으니…
브라질 선수단에 엄청난 동기부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팬들도 마찬가지여서, 안 그래도 뜨겁던 응원 열기는 최고조를 찍었다.
격전지는 해발고도 800m의 고원도시 벨루오리존치에 위치한 이스타지우 미네이랑.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브라질이 독일에게 1-7로 참패를 당하며 ‘미네이랑의 비극’을 경험하게 되는 바로 그 경기장이었다.
하지만 이미 역사는 완전히 새로 쓰였다.
정백강의 영웅적인 해트트릭에 당해 독일은 탈락했고, 비극의 전초가 되었던 네이마르의 부상과 티아구 실바의 경고 누적 결장도 없었다.
4강전에 나서는 브라질의 선발 11명은 말 그대로 ‘베스트 일레븐’.
전문가들로부터 현재 가동할 수 있는 최상의 전력이라고 평가를 받았다.
“과열될 가능성이 높은 경기입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게 주장으로서 역할을 잘 해주시길 바랍니다.”
주심을 맡은 멕시코 출신의 마르코 로드리게스 심판이 나와 티아구 실바를 불러다 놓고 신신당부를 했다.
“알겠습니다. 오늘 부디 공정한 판정 부탁드립니다.”
나는 심판과 악수를 나누며 오른손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마르코 심판의 담력이 얼마나 큰 지는 모르겠지만, 미네이랑을 가득 메운 관중들 중 절대 다수는 노란색 유니폼을 갖춰 입은 브라질 응원단이었다.
혹시라도 분위기에 휩쓸려, 혹은 부담감 때문에 홈콜을 하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아주 거칠게 따질 작정이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미네이랑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우리 선수들.
악이라도 쓰지 않으면 상대의 기에 눌릴 것 같아, 억지로 토해내는 소리였다.
이어서 브라질의 국가가 연주되었는데, 고막이 웅웅댈 정도로 어마어마한 떼창이 경기장을 뒤덮었다.
“휘유!”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손형민이 노래가 끝나자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브라질의 선발 명단에는 나의 ‘전현직 동료’가 세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은 좀 살살 하자, 알았지?”
레알 마드리드에서 나와 함께 트로피를 싹쓸이하며, 현 시점 세계 최고의 레프트백으로 평가받고 있는 마르셀루.
“내가 제일 만나기 싫은 공격수를 만나버렸네. 하하하. 좋은 경기 하자구.”
벌써 본인의 세 번째 월드컵을 치르고 있는 리빙 레전드 세자르 형님.
“왼쪽 측면에서 너한테 가는 크로스는 없을 거야.”
이번 대회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인 다니 알베스를 밀어내고 주전 자리를 꿰찬 왕년의 ‘오른쪽’ 마이콘까지.
다들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회포를 풀기에 적당한 때는 아니었다.
“성영아.”
경기 시작 직전, 자기 포지션으로 이동하던 기성영을 불렀다.
“네, 형.”
“시작하자마자 나 보고 그냥 뻥 때려. 기선제압하고 시작하자.”
“알겠어요.”
지금까지 치른 경기들도 장난 아니게 힘들었지만, 확실히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우리에 대한 적의(敵意)로 가득 찬 경기장에서 펼치는 원정 경기.
일단 한 방 알림으로써 굳어 있는 동료들의 몸을 좀 풀어줄 심산이었다.
삑—
우우와와아아아아아!!!
킥오프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함성.
나는 성영이에게 백패스를 하는 동시에 곧바로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뻐어엉-
미리 약속한 대로 공을 받자마자 지체없이 초장거리 패스를 때려 넣는 성영이.
“내가 끊을게!”
8강전에서 환상적인 무회전 프리킥 골을 터뜨리며 영웅에 등극한 다비드 루이스가 콜하며 뛰쳐 나왔다.
평소 공격적인 수비 성향으로 유명한 루이스다운 판단.
그런데 이번엔 그 적극성이 독이 되었다.
있는 힘껏 점프를 했지만 공이 머리에 닿지 않았고, 원바운드된 볼을 내가 낚아채며 졸지에 위기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런 젠장할!”
루이스가 욕설을 내뱉는 사이, 브라질 수비진의 리더인 실바가 빠르게 커버를 하러 왔다.
파리 생제르망 이적 후 실바가 보여주고 있는 폼은 그야말로 사기적인 수준.
수상 실적에 있어서야 레알 마드리드의 라모스-바란-페페 라인에 댈 게 아니지만, 순수한 실력만으로 따지면 실바를 센터백 원톱으로 꼽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실바가 아니라 실바 할아버지가 오더라도 나는 계획을 밀어붙일 작정이었다.
일단 무조건 슈팅 때리고 시작한다!
투웅-
달려가던 속도를 죽이지 않으면서 실바의 머리 위로 공을 높게 띄웠다.
내 의도를 간파한 실바는 달려가던 내게 어깨를 밀어 넣었다.
“으아아아아!”
나는 기합성을 내지르며 힘으로 밀어붙였다.
땀냄새 물씬 나는 남자 대 남자의 몸싸움.
그 승자는…
“나와야 돼요!”
실바의 비명에서 알 수 있듯, 바로 나였다.
힘에서 밀려 잔디 위에 나동그라지는 실바.
세자르 형님이 뒤늦게 공중볼을 따내기 위해 달려나왔지만 내 머리가 더 빨랐다.
콰아아아앙-
침묵에 빠진 미네이랑.
경기 시작 1분도 채 안된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선제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