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71화 (172/176)

171화

이런 전개를 누가 예상했으랴.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 앞서고 있는 이 상황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브라질 녀석들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런 제기랄!!!”

특히 실점의 직접적인 빌미를 제공한 루이스는 자신의 뺨을 스스로 때리며 심하게 자책했다.

콜롬비아와의 8강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온갖 찬사를 다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드라마틱한 추락이었다.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미네이랑에서 오늘 경기 두 번째 킥오프.

“온다! 집중해!”

산전수전 다 겪은 차도리 선배를 바짝 긴장시키는 선수.

대한민국에 정백강이 있고 아르헨티나에 메시가 있다면 브라질엔 이 친구가 있었다.

세계 최고의 유망주로 꼽히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신성(新星) 네이마르가 왼쪽 측면에서 볼을 잡았다.

일대일로 막는다는 건 어불성설.

도리 선배가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한 하태성 선배에게 SOS를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망설임 없이 돌파를 시도하는 네이마르.

샤샤샥- 툭-

현란한 스텝오버로 간을 보더니, 태성 선배의 다리 사이로 공을 뺀 후 수비 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이 모든 동작이 2초 안쪽을 이루어졌다.

놀랍도록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일단 뚫리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네이마르.

도리 선배가 별수 없이 진로를 방해하며 파울로 끊었다.

순전히 개인능력으로 만들어낸 프리킥이었다.

우리를 상대하는 슈퍼스타들이 늘 그렇듯, 오늘 몸이 아주 가벼워 보였다.

네이마르가 내친김에 프리킥까지 본인이 처리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각도로 보나 거리로 보나 직접 슈팅은 어려워 보이는 자리.

일단 붙여주고 머리를 노릴 확률이 높았다.

“루이스는 제가 막을게요!”

189cm 장신에 좋은 점프력까지 겸비한 루이스는, 전반적인 높이가 낮은 편인 브라질에서 가장 위력적인 세트피스 옵션이었다.

그러나 정백강 앞에선 어림도 없지.

독일전에서 마츠 훔멜스의 멘탈을 터뜨렸듯이, 공수 양면에서 루이스를 좀 괴롭혀 줄 생각이었다.

“떨어지세요! 자꾸 그러면 카드 나갑니다!”

페널티박스 안쪽에서 몸싸움이 하도 거칠어서, 마르코 주심이 선수들을 붙잡고 구두 경고를 했다.

겨우 분위기를 정돈한 후 전개되는 브라질의 세트피스.

뻐어어엉-

앞서 벌어졌던 치열한 몸싸움이 무색하게, 네이마르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골문을 직접 노렸다.

까아앙-

골대 왼쪽 상단 모서리를 강타하는 프리킥.

슈팅 각도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네이마르의 오른발 감아차기는 역시 무지막지하게 날카로웠다.

깜짝 놀란 도리 선배가 재빨리 루즈볼에 몸을 날린 후 최대한 멀리 걷어냈다.

아아아아-

짝짝짝짝짝-

관중석에서 장탄식이 터진 이후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어처구니없는 실점 때문에 침울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네이마르가 에이스의 품격을 과시하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우리의 8강 상대였던 독일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냉정’이라면, 브라질은 ‘열정’으로 대변되는 팀.

삼바 리듬을 제대로 타서 미친 듯이 우리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특히 네이마르-마르셀루로 이어지는 왼쪽 라인의 공격력은 가히 사기적인 수준.

도리 선배와 태성 선배만으로는 영 부족해서, 과르디올라 감독은 수비할 때 기형적인 ‘ㄴ’자 포메이션을 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네이마르나 마르셀루가 시야가 부족한 선수들이 아니라는 것.

개인기로 어그로를 끈 뒤 우측면과 중앙에 뻥 뚫린 공간으로 좋은 찬스를 계속 공급하면서 손쉽게 플레이 메이킹을 했다.

1-0이란 스코어와 상관없이 경기는 완연한 브라질의 페이스였다.

우오오오오오-

가뜩이나 수비하기도 빡센데 일방적인 응원까지 겹치니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네이마르에 이어 프레드와 오스카까지 연이어 크로스바를 강타.

전반 15분인데 골대샷만 벌써 세 번이었다.

벨기에전부터 독일전에 이르기까지 털리는 건 익숙했지만, 이렇게까지 결정적인 위기가 연쇄적으로 쏟아진 적은 없었다.

“백강! 내려가!”

결국 과르디올라 감독이 GG를 선언.

역습이고 나발이고 일단은 이 폭풍우가 지나갈 때까지 버티기를 선택했다.

단 한 명의 열외도 없이 모든 선수가 하프라인 아래쪽에 진을 치고 완전 수비 태세를 갖췄다.

나의 미션은 브라질 볼 순환의 핵심인 중앙 미드필더 페르난지뉴를 철저히 맨마킹하는 것.

기술 좋고 부지런한 친구라 수비가 쉽진 않았지만, 나는 피지컬의 우위를 앞세워 힘으로 밀어붙이며 페르난지뉴의 진을 뺐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

후방과 전방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끊기면서, 활화산 같던 브라질의 기세가 겨우 조금은 누그러졌다.

과르디올라 감독의 발 빠른 대처와, 안정을 찾은 선수들의 육탄 수비에 힘입어 한 골 차 리드를 지킨 채 전반 종료.

고전은 했으되 실속은 챙긴 45분이었다.

* * *

하프타임.

동료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기되어 있었다.

‘결승’이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나도 물론 기분이 좋긴 했으나, 어째 기분이 묘했다.

정백강이라는 선수를 규정하는 첫 번째 능력은 물론 뚝배기.

두 번째는 무리뉴나 과르디올라 같은 명감독들도 인정한 축구 지능.

거기에 하나 더, 잘 알려지지 않은 제3의 권능(?)이 있었으니 바로 ‘촉’이었다.

한 골 앞서고 있는 거? 팩트.

브라질의 공세도 점점 꺾여가는 거? 팩트.

하지만 원인 모를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다.

“형민! 수고해써!”

과르디올라 감독이 손형민을 빼고 홍찬 투입을 결정하면서, 내 머릿속 비상벨은 더욱 큰 소리로 울렸다.

찬이가 윙어 역할도 어느 정도는 소화할 수 있지만 본업은 어디까지나 레프트백이었다.

전반전 내용을 보고는 잠그기가 가능할 거라고 판단한 것 같은데 과연 그럴까나?

부디 내가 틀리고 과르디올라 감독이 옳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브라질은 선수 교체 없이 그대로 출격.

삑-

휘슬과 함께 브라질의 선축으로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경기 양상 자체는 전반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신념 아래 움직이는 브라질과, ‘백날 두드려 봐라, 열리나’라는 자세로 잔뜩 웅크린 대한민국.

우-- 우--

우리가 공을 멀리멀리 걷어낼 때마다 관중석에서 거센 야유가 터졌다.

붉은 악마 역시 열띤 응원전을 펼쳤으나 쪽수에서 너무 밀렸다.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목소리는 브라질의 시끄러운 전통 악기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까앙-

그 와중에 또 한 번 골대를 맞히는 프레드의 땅볼 슈팅.

“빌어먹을!”

프레드가 욕지거리를 하며 잔디 위에 침을 내뱉었다.

오늘 브라질 공격진들은 대체로 움직임도 괜찮고 발끝 감각 역시 날이 서 있었으나, 계속 한 끗이 모자랐다.

어물쩍하는 사이에 후반 30분대 돌파.

노란색 물결로 가득 찬 이곳 미네이랑에서, 우리의 편을 들어주는 건 오직 시간뿐이었다.

한껏 초조해진 브라질 녀석들은 드디어 중거리포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 무너진 팀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됐다, 잡았다. 결승이다!

철썩-

어?

어어?

* * *

하... 씨발...

그렇게 빗나가길 기도했건만.

내 망할 촉은 기어이 적중하고 말았다.

“크아아아아아!!!”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질주하던 헐크가 잔디 위를 멋들어지게 미끄러졌다.

침울해 있던 스콜라리 감독은 만세를 부르며 코치진들과 격한 포옹을 나눴다.

우리 수문장 김성규는 얼굴을 감싼 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후반 37분이었다.

나에게 막혀 고전 중인 페르난지뉴를 위해 라이트윙으로 출전한 헐크가 많이 내려와서 공을 잡았다.

그러나 수비 숫자가 워낙 많아 패스 줄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경기는 안 풀리고.

답답한 마음으로 때렸을 35m짜리 중거리포.

오늘 선방률 100%를 자랑하던 성규가 완벽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여서, 들어갈 가능성은 없는 슈팅이었다.

그런데 홍정후가 너무 의욕이 넘친 나머지 슈팅을 몸으로 막으려 했던 게 화근.

헐크의 슈팅이 정후의 엉덩이를 맞고 굴절되었고, 역동작이 걸린 성규가 필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팔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허무하다’는 표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실점이었다.

8부 능선까지 넘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후... 백강아, 정신 차리자.

너 주장이야.

네가 무너지면 그걸로 끝이야.

“괜찮아, 임마. 형이 골 넣을게. 나만 믿어.”

나라 잃은 표정을 하고 있는 정후에게 다가가 애써 웃으면서 어깨를 토닥였다.

1000번 잘해도 1번만 실수하면 역적이 되는 게 수비수의 숙명.

센터백 출신인 나는 지금 정후가 느낄 절망감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삑- 삑- 삑--

야속한 휘슬이 길게 울렸다.

아르헨티나-네덜란드전에 이어 이틀 연속 연장 승부 확정.

딱 10분만 더 버텼으면 됐는데...

역시 세상사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건 사고였다. 너무 자책하지 말도록.”

쉬는 시간 동안 과르디올라 감독이 가장 먼저 한 일 역시 정후의 멘탈을 잡아주는 것이었다.

수비 라인 컨트롤을 맡고 있는 커맨더 정후가 냉정을 잃으면 대참사는 시간문제였다.

의미 없는 결과론이지만, 결국 형민이를 뺀 건 성급한 결정이 되어 버렸다.

내가 이번 대회에서 경기당 2골이 넘는 폭발적인 득점력을 과시하는 데는, 형민이의 공로가 상당히 컸다.

내게 직접 연결한 어시스트 개수도 적지 않았으며, 활발한 오프더볼 무브로 수비를 분산시키면서 내가 편하게 공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던 것.

“건호, 태성과 교체다.”

마냥 수비만 할 수 없게 된 지금, 과르디올라 감독이 가장 합리적인 교체 카드를 꺼내 들었다.

대표팀 스쿼드에서 형민이와 비슷한 롤을 잘 수행할 만한 선수는 많지 않았고, 그 중 하나가 이건호 선배였다.

물론 형민이와 비교하면 2% 부족한 게 사실.

잠그기 모드로 너무 빨리 전환한 판단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스콜라리 감독은 오늘 많이 뛴 오스카를 윌리앙과 바꿔 주면서 공격진의 에너지를 한층 끌어 올렸다.

정말 부러운 선수층이었다.

벼랑 끝 승부, 연장 전반 스타트.

기성영이 내 머리를 겨냥한 장거리 패스를 시도했으나, 체력 문제 때문인지 정확도가 크게 떨어졌다.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 공을 끊어낸 루이스가 직접 공을 몰고 전진.

우리 선수들이 대부분 후방 지역에 처져 있다 보니 압박할 인원이 없었다.

터엉-

하프라인 부근까지 거침없이 진격한 루이스가 네이마르 쪽으로 땅볼 패스를 연결.

90분 넘게 죽어라고 뛴 우리 선수들은 아까만큼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네이마르.

네이마르가 왼발 뒤꿈치로 차올린 공이 도리 선배의 키를 훌쩍 넘기며 잔디 위에 떨어졌다.

우와아아악!!!

뒤집어지는 관중석.

월드컵 4강, 그것도 연장전에서 ‘사포’라니.

당황한 도리 선배를 휭 지나치며 공을 잡은 네이마르가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짓쳐들어갔다.

“내가 막을게!”

역적에서 다시 영웅이 될 기회.

촤아아악-

정후의 과감한 슬라이딩 태클과,

“크아아악!”

나동그라진 네이마르의 비명이 슬로모션처럼 교차되었다.

삐비빅-

그리고 휘슬.

마르코 주심이 ‘찍었다’.

페널티킥 선언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