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72화 (173/176)

172화

“이게 어떻게 페널티킥이에요?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홍정후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실제로 네이마르의 넘어지는 모션은 상당히 부자연스러웠다.

라리가에서도 ‘다이버’를 꼽을 때 꼭 들어가는 녀석이기도 했고.

정황상 시뮬레이션 액션일 확률이 99.999%였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피파는 VAR을 도입하게 되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

한참을 항의하던 정후는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옐로카드만 받아들었다.

직접 키커로 나서는 네이마르.

PK 선방에 일가견이 있는 김성규에게 기대를 걸어 보았지만, 네이마르의 오른발에는 자비가 없었다.

이예에에에에!!!

미네이랑을 뒤덮는 함성 소리.

브라질이 연장전에 기어이 승부를 뒤집었다.

골을 넣은 네이마르는 동료들과 춤을 추며 기쁨을 만끽했다.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하나는 굴절, 다른 하나는 시뮬레이션.

상대에게 허용한 두 골 모두 뒷맛이 씁쓸했다.

1-2로 뒤진 가운데 연장 전반 종료.

이제 우리에게는 딱 15분이 남아 있었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오늘 10년치 마음고생을 한 정후를 불러들이고 다재다능한 공격수 지동운을 투입했다.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게 축구다. 부디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다오.”

과르디올라 감독의 당부에서 뭐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배어 나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비가 있었던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 *

킥오프와 함께 연장 후반 시작.

이제 게임은 아주 단순해졌다.

뚫어야 하는 대한민국과, 어떻게든 막아내야 하는 브라질.

스콜라리 감독은 나에 대한 더블팀을 지시했다.

실바와 루이스가 앞뒤로 붙어서 숨도 못 쉬게 압박해 왔다.

나로부터 파생되는 공격만 막아내면 실점할 일은 없다는 판단이었다.

내 쪽으로 볼 투입이 여의치 않자, 공격 방향 선택을 맡은 기성영이 오른쪽 측면의 이건호 선배에게 전진 패스를 깔아주었다.

나는 발이 묶였고, 건호 선배가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상황.

하지만 매치업 상대가 마르셀루라는 게 비극이었다.

기습적인 ‘치달’로 균열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의도를 완벽히 읽은 마르셀루가 한 발 먼저 움직이며 가볍게 공을 걷어냈다.

건호 선배는 좋은 선수긴 하지만 개인 능력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메시나 로벤 같은 월드클래스 크랙을 수비하던 마르셀루에게 건호 선배의 돌파 시도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뒤지고 있는 우리는 단 1초도 허투루 낭비할 수 없었다.

건호 선배가 황급히 스로인을 던져 넣었고, 그 공을 이어받은 차도리 선배가 곧바로 동운이의 머리를 겨냥한 얼리크로스를 시도했다.

그러나 몸싸움에서 완벽히 승리한 단테가 헤더 클리어.

일대일 경합이 벌어질 때마다 패배를 맛보고 있었다.

“연권! 휘태!”

이판사판 공사판.

과르디올라 감독이 김연권과 곽휘태 선배에게 최전방으로 올라갈 것을 지시했다.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갈 시간도 없었고, 그럴 능력도 부족하니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공중볼 싸움 뿐이었다.

브라질도 즉시 마크맨을 붙이면서 페널티박스 안쪽은 포화 상태.

크로스가 하나씩 실패할 때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1분! 1분 남았어!”

벤치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뭐라고? 언제 시간이 이렇게…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이대로 끝나는 걸까?

터엉-

마이콘이 왼쪽 측면에서 방주호의 크로스를 차단했다.

공이 골라인을 벗어나며 코너킥.

“성규야! 올라와!”

마지막으로 잡은 기회.

성규까지 합류하면서, 키커 성영이를 제외한 10명 전원이 공격에 가담했다.

종교가 없는 나도 지금만큼은 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옥황상제님.

착하게 살겠습니다.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성영이가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천천히 스텝을 밟은 후 오른발을 휘둘렀다.

파아앙-

염원을 가득 담은 공이 멋진 호를 그리며 박스 안쪽으로 휘어져 들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에 힘을 빡 주면서 더블팀 탈출을 시도했다.

동시에 내 유니폼을 꽉 움켜잡는 실바와 루이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찌이익-

쫘아악-

거짓말처럼 잡힌 부위의 유니폼이 찢어진 것이었다.

잡아당기던 힘이 갑자기 사라지자 관성의 법칙에 의해 거의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면서 낙하 지점으로 달려갔다.

제 기도에 응답해 주셨군요.

어떤 신인지 모르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안돼!!!”

내가 도약하는 순간, 루이스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녀석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백강은 결정적인 순간에 기회를 놓치는 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투콰아앙-

내 머리에 맞은 공이 살벌한 파열음을 내며 골문 왼쪽 상단으로 날아갔다.

야신 사각지대를 정확히 노린 슈팅.

공이 워낙 빨라서, 천하의 세자르 형님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철썩-

연장 후반 15분.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경기에서 터진 믿을 수 없는 버저비터.

숨 죽이며 바라보던 벤치 멤버들이 몽땅 튀어나와서 나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침묵에 빠진 브라질 팬들 사이에서 현란하게 펄럭거리는 태극기.

죽어가던 붉은 악마가 완벽히 부활해서 광포한 함성으로 위대한 영웅에게 찬사를 보냈다.

* * *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오고 말았다.

월드컵 역사에서 수많은 팀들을 웃고 울렸던 승부차기.

마르코 주심이 나와 실바를 불렀다.

“동전던지기로 선축을 결정하겠습니다.”

“앞입니다.”

“앞으로 하죠.”

공교롭게도 선택이 겹쳤다.

별 것 아닌 일이지만 양보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이럴 때의 해결 방법은 만국 공통.

세계 최고의 축구스타와 월클 센터백이 숙명의 가위바위보 승부를 펼쳤다.

네 번의 무승부 끝에 내가 가위, 실바가 보를 내면서 선택권을 가져왔다.

“앞이요.”

고개를 끄덕인 마르코 주심이 동전을 튕겼다.

“예쓰으!”

정말로 앞이 떡하니 나와 버렸다.

승부차기에서 선축하는 팀이 유리하다는 건 상식.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순번 선택이 끝난 후, 우리 선수들이 하프라인에 나란히 서서 어깨동무를 했다.

중요한 1번 타자는 믿음직한 성영이.

별 망설임 없이 골문 오른쪽 구석으로 묵직하게 꽂아 넣었다.

세자르 형님이 방향은 잘 잡았지만 슈팅이 워낙 강력했다.

쾌조의 스타트를 끊은 성영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브라질은 동점골의 주인공 헐크를 선봉장으로 내세웠다.

그날 활약한 선수는 승부차기에서 실축한다는 징크스가 있는데 말이지.

혹시? 에잉...

징크스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 과감하게 한가운데를 노려서 성공시킨 헐크가 우락부락한 근육을 뽐내며 세리머니를 했다.

키커들의 집중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골키퍼들 컨디션이 안 좋은 건지.

이후로도 차는 족족 죄다 골망을 가르는 PK.

3-3 상황에서 우리 팀의 네 번째 키커로 건호 선배가 나섰다.

“휘유…”

깊은 한숨을 내쉬는 걸 보니 많이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연습 때 하던 대로만 차면 돼요, 선배.

까앙-

골문 오른쪽 하단을 노린 슈팅이 골포스트를 강타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순간.

철썩-

다행히 안쪽에 맞은 공이 그물에 포근히 안겼다.

“야, 임마!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오는 건호 선배에게 도리 선배가 소리쳤다.

“저 실축하면 어디 무인도로 도피하려 그랬어요.”

그 마음 이해합니다, 건호 선배.

이어서 등장하는 브라질의 4번 타자.

네이마르였다.

어어? 이거 왠지…

“느낌 왔다. 저 새끼 저거 분명 놓친다.”

연권이도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듯 중얼거렸다.

실축할 거라는 근거는 전혀 없었고, 오늘 페널티킥을 깔끔하게 성공시켰던 네이마르지만 이상하게도 절대 못 넣을 것 같다는 촉이 강하게 왔다.

휘슬이 울리고 천천히 도움닫기를 하던 네이마르가 임팩트 직전 살짝 머뭇거렸다.

골키퍼의 타이밍을 뺏을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성규는 흔들리지 않았다.

뻐엉-

오히려 흔들린 것은 네이마르 본인의 밸런스.

슈팅이 가운데로 쏠렸다.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한 성규가 이를 악물면서 양손으로 공을 쳐냈다.

“그라췌! 성규 나이스!”

성영이가 너무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PK로 흥한 자 PK로 망할지니.

다이빙에 대한 정의구현을 제대로 당한 네이마르가 혼이 빠져나간 얼굴을 한 채 무릎을 꿇었다.

쌤통이다, 이 녀석아.

이제 스코어는 4-3, 넣으면 끝이었다.

정백강!!! 정백강!!! 정백강!!!

붉은 악마가 다섯 번째 키커의 이름을 목놓아 연호했다.

“형, 믿어요!”

“백강아, 편하게 차.”

“선배님! 파이팅입니다!”

동료들의 열화와 같은 응원을 등 뒤로 받으며 공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4년 전, 네덜란드에게 막혀 실패했던 월드컵 결승 진출의 꿈이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냉정하자, 백강아.

몸에 힘을 빼고 최대한 편안하게.

창백해 보이는 세자르 형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형님이 79년생이었지?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월드컵이겠네.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세요.

삐익-

휘슬이 울렸고, 내 오른발을 떠난 공이 골문을 향해 날아갔다.

* * *

[대한민국, 브라질 꺾고 사상 첫 월드컵 결승 진출!]

[어게인 2014… 또 등장한 정백강의 ‘파넨카 킥’]

세자르 형님을 무너뜨린 파넨카 킥은 남아공 월드컵의 추억을 소환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가나와의 8강전 승부차기.

그때도 내가 5번 키커였고, 파넨카 킥을 성공시키며 4강 진출이라는 대업을 달성했었다.

4년 만에 다시 한번 반복된 역사가 이번에는 한국을 결승으로 데려갔다.

나중에 리플레이를 확인한 결과, 네이마르에게 선언된 페널티킥은 역시 오심이었다.

네이마르의 배우 빰치는 연기에 마르코 주심이 제대로 속아 넘어갔다.

승부욕 때문에 스포츠맨십을 저버린 네이마르는, 전 세계 팬들로부터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이기기라도 했으면 그나마 위로가 됐을 텐데,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은 셈이었다.

그로부터 3일 뒤 이스타지우 마네 가힌샤에서 열린 3위 결정전.

“더 이상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는 없다.”

스콜라리 감독은 필승의 각오를 밝혔지만, 뚜껑을 열자 선수들의 멘탈 회복이 아직 덜 되었음이 드러났다.

경기 시작 3분 만에 실바가 로벤에게 파울을 범하며 페널티킥을 헌납한 것.

키커로 나선 반 페르시가 시원하게 마무리하며 네덜란드가 1-0 리드를 잡았다.

안방에서 2연패는 생각도 하기 싫은 결과.

조급해진 브라질 녀석들은 라인을 바짝 끌어 올렸는데, 이게 독이 되었다.

디르크 카윗이 네이마르의 무리한 드리블 시도를 응징하며 볼을 끊어낸 후 로벤에게 연결.

역습 기회를 포착한 로벤은 혼자서 30m 가량을 폭풍질주한 후 오른쪽 측면의 요나탄 데 구즈만에게 스루패스를 찔러 주었다.

데 구즈만이 반 페르시 쪽을 노리고 크로스를 시도하자 루이스가 급하게 머리로 걷어냈는데, 이 공이 오버래핑한 윙백 데일리 블린트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마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편하게 시도한 슈팅이 골망을 가르며 전반 17분 만에 2-0.

이 시점에서 브라질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고, 후반전에 조르지뉴 베이날둠에게 추가골을 허용하며 0-3으로 완패했다.

여섯 번째 우승컵을 호언장담하던 브라질의 처절한 몰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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