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는 정백강에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내가 출전하는 모든 대회에 백강이 있다는 건 비극적인 일이었다. 리가에서, 코파에서,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 무슨 수를 써도 백강을 이길 수 없었다. 내게 있어 그는 거대한 산과도 같다. 그 산을 넘는 대회가 월드컵이라면, 게다가 결승이라면 그동안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메시의 경기 전 인터뷰에서는 승리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났다.
2009년, 그러니까 내가 피파 올해의 선수를 받고 메시가 발롱도르를 받았던(인종차별 논란은 있었지만) 그 해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 한국에서 온 크레이지 헤더 머신과 아르헨티나 출신의 꼬맹이가 세계 축구계를 양분하겠군. 둘은 앞으로 정말 좋은 라이벌이 될 거야.’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듬해인 2010년부터 2013년까지 발롱도르를 비롯한 모든 영예로운 상은 나의 몫이었고, 메시는 투표에서 항상 2위에 머물렀다.
팀 커리어는 더욱 처참했다.
내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가 4년 연속 트레블이라는 미친 업적을 세우는 동안, 바르셀로나의 성적은 리가 준우승 3번, 코파 준우승 2번, 챔스 준우승 1번이었다.
철천지원수인 두 구단의 관계가 나와 메시의 격차를 더욱 커 보이게 만들었다.
이제는 아무도 나와 메시를 라이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한 번 정점을 찍어 보았던 메시에게 지난 5년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이번 결승전은 메시에게 대단한 기회였다.
세계 최고 권위의 대회인 월드컵에서 정백강을 제치고 우승컵을 따낼 수만 있다면!
물론 당장 선수 평가가 뒤바뀌진 않겠지만, 몸에 진득히 배어 버린 패배 의식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또 까놓고 말해서 나 외에도 스타 플레이어들이 즐비한 레알 마드리드보다는 대한민국이 훨씬 만만한(?) 상대이기도 했고 말이다.
“메시는 특별하다. 내가 지도했던 선수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번뜩임을 지녔다.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다. 그러나 백강은 또 다른 차원에 있는 선수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이런 선수가 또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현역 중에서 ‘위대하다’는 평가가 어울리는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이번 대회를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내 말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옛 애제자 메시를 적으로 상대하게 된 과르디올라 감독은, 나와 메시를 비교해 달라는 기자들의 짓궂은 질문에 위와 같이 답했다.
100년에 한 번도 장담할 수 없는 재능이라니, 대단한 찬사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월드컵에서 내가 보여준 활약상은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우리가 조별리그부터 4강전까지 기록한 득점이 총 14골이었는데, 내 공격포인트가 정확히 13골 1어시스트였다.
거기에다가 팀이 필요로 할 때면 압도적인 높이를 살려서 철벽의 수비수로 변신하기까지 했으니.
공수 양면에서 말도 안 되는 영향력을 뽐내며 거의 혼자 힘으로 약체 대한민국을 결승 무대에 올려 놓았다.
1941년에 태어나 전설적인 선수들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봐 온 세계 축구계의 산증인 알렉스 퍼거슨 경은, 월드컵 결승 직전 진행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월드컵에 대해 생각하면 몇 가지 영웅적인 활약상이 떠올라. 1962년의 가린샤, 그의 드리블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지. 1970년의 펠레는 축구를 깨달은 사람의 모습이었고. 1974년의 크루이프는 완전히 새로운 축구를 선보였어. 아, 물론 1986년의 마라도나도 빼놓을 수 없지. 다들 정말 굉장했어.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정백강만큼의 퍼포먼스는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해. 내 감독 인생을 통틀어 가장 아쉬운 순간이 2008년이야. 그때 인테르와의 경쟁에서 밀리며 정백강을 놓쳤었거든.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를 영입했을 거야. 뭐, 이제 와서는 다 부질없는 일이지만. 허허허.”
* * *
2014년 7월 13일,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
한 달 동안 지구촌을 뜨겁게 달궜던 브라질 월드컵이 마무리되는 날이었다.
결승전에 앞서 진행된 폐막식.
세계적인 팝스타이자 제라르 피케의 연인이기도 한 샤키라가 열정적인 공연을 선보였다.
샤키라는 2006년 독일, 2010년 남아공에 이어 월드컵 폐막식 참여만 세 번째였다.
이쯤 되면 ‘월드컵의 여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20여분 동안 진행된 폐막식이 끝나고, 대망의 월드컵 트로피가 경기장에 들어왔다.
트로피 운반자는 개최국 브라질 출신의 슈퍼모델 지젤 번천과 남아공 월드컵 우승의 주역 카를레스 푸욜이었다.
2013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푸욜은 내심 후배들이 월드컵 2연패를 이뤄주길 바랐을 터.
그러나 스페인은 우승팀 징크스를 넘지 못하고 조별리그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축구판에 영원한 강자는 없는 법이었다.
“선배님은 하나도 안 떨리시죠?”
입장 대기 중에, 내 뒤에 서 있던 손형민이 물어 왔다.
“그럴 리가 있냐, 나도 당연히 떨리지.”
“그렇게 큰 경기를 많이 뛰셨는데도요?”
“형민아, 이건 월드컵이잖아. 특별하지. 다른 대회랑은 비교할 수 없어.”
회귀 이후 수없이 많은 우승을 경험해 온 나지만, 이번만큼 욕심이 났던 적은 단연코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빅이어 5개를 월드컵 트로피와 바꿀 수 있다면 1초도 고민 없이 ‘OK’를 외치리라.
국적을 바꾸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 같던 월드컵 우승의 꿈이 지금 아주 가까운 곳까지 와 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메시는 눈을 감은 채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아마도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이겠지.
이길 수만 있다면 신이 아니라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 입장하겠습니다!”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 찾아왔다.
“악! 아파요!”
나의 플레이어 에스코트로 나선 흑발의 곱슬머리 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긴장한 나머지 내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간 탓이었다.
이런 일은 난생 처음이었다.
짝짝짝짝짝-
관중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22명의 전사들을 환영했다.
치열한 예매 경쟁을 뚫었거나, 혹은 무지막지한 암표 가격을 지불하고 결승전 티켓을 구한 78,838명의 축구팬들이 좌석을 가득 메웠다.
그런데 관중석을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광경이 눈에 띄었다.
셀레상의 노란색 유니폼을 갖춰 입고 대형 태극기를 휘두르고 있는 브라질 팬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희한한 사태를 촉발한 장본인은 마라도나였다.
아르헨티나가 결승에 진출하고 브라질이 4강에서 탈락하자, 마라도나는 자신의 SNS에 브라질을 조롱하는 멘션을 게시했다.
아무리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앙숙 중의 앙숙이라지만, 축구계에서 본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었다.
기사화가 되고 논란이 거세지자 문제의 게시물을 삭제하긴 했지만 이미 브라질 국민들은 뚜껑이 제대로 열려 버렸고, ‘제발 브라질인이면 대한민국 응원합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오늘만큼은 브라질 관중들이 ‘세미 붉은 악마’가 된 셈이었다.
국가 연주와 악수가 끝나고 양 팀 선수들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여러 차례 기적을 만들어낸 전가의 보도 3-5-2 포메이션을 또 가동했다.
현 시점에서 가장 효율적인 전술임은 결승 진출이라는 결과가 말해주고 있는 사실.
반면 아르헨티나는 네덜란드와의 준결승전에서 4-3-1-2를 썼었는데, 경기력이 알레한드로 사베야 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번엔 4-3-3으로 진용을 꾸렸다.
최전방에 이과인, 왼쪽에 아게로, 오른쪽에 메시로 구성된 3톱.
이름값으로만 따지면 ‘세계 최강의 3톱’으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후덜덜한 라인업이었다.
이상하게도 실제 경기만 들어가면 그만큼의 파괴력이 안 나오는 게 함정이었지만.
삑—
휘슬이 길게 울리고, 2014 브라질 월드컵의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었다.
* * *
전반 초반 가장 빛난 선수는 앙헬 디마리아였다.
회귀 전에는 무리뉴 감독의 눈에 들어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었던 디마리아는, 내가 레알 이적 후 ‘벨기에 듀오’와 모드리치 영입을 추천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그래도 원체 뛰어난 재능이었기 때문에 금방 빅클럽들의 관심을 받았고, 지난 시즌부터는 파리 셍제르망에서 뛰고 있었다.
명실상부 아르헨티나 중원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디마리아의 최대 장점은 다재다능함.
윙, 중미, 공미 등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데다가 주력, 테크닉, 킥력이 모두 빼어났다.
거기에 활동량까지 풍부해서, 폼 좋은 날의 디마리아는 거의 완전체에 가까운 미드필더였다.
불행하게도 오늘이 바로 그 날.
우리 중원은 날뛰는 디마리아를 전혀 견제하지 못했다.
공을 잡을 때마다 두세 명씩은 우습게 제치며 아르헨티나의 전진을 혼자 책임지는 디마리아.
살벌한 3톱의 존재감 때문에 디마리아 쪽에 인원을 더 배치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툭- 탁-
전반 13분, 기성영의 태클을 가볍게 회피하며 또 한 번 쾌속 질주를 펼치던 디마리아가 아게로와 합을 맞추며 2대 1 패스.
리턴 패스를 내준 아게로가 영리하게 중앙으로 파고들면서 어그로를 끌었고, 덕분에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디마리아가 여유 있게 이과인을 겨냥한 크로스를 시도했다.
처억- 뻐어엉-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가슴에 공을 붙여 놓은 이과인이 유려하게 반 바퀴를 돌더니 이후 그대로 발리슛을 날렸다.
오늘 아르헨티나 녀석들이 단체로 약이라도 빨고 나왔는지, 환상적인 기술을 연이어 선보였다.
터엉-
다급하게 몸을 날리며 가까스로 공을 쳐내는 김성규.
여기까진 좋았는데, 디마리아-아게로-이과인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가장 위험한 인물을 놓치고 말았다.
놀라운 순간 스피드를 과시하며 어디선가 번쩍 나타난 메시가 루즈볼을 향해 과감히 슬라이딩.
토옥-
메시의 발바닥에 맞은 공이 골문 안쪽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뒤늦게 달려간 홍정후가 일단 공을 걷어내긴 했는데…
삐비빅-
필드 위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모했다.
“넘어갔어요!”
“아니, 선에 걸쳤어요!”
“골이라니까요?”
“아니라고요!”
니콜라 리촐리 주심이 흥분한 선수들을 저지시키며 골라인 판독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와아아아아악!!!
아르헨티나의 득점이 인정되었다.
선제골의 주인공이 된 메시가 조국 팬들에게 달려가 양팔을 하늘로 번쩍 들어올렸다.
메시가 이렇게 격한 세리머니를 펼치는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하긴, 애초에 골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메시답지’ 않았다.
감탄을 불러 일으키는 기술이나 우아한 장면 따위 없이, 순수한 집념으로 만들어낸 득점.
이 경기에 임하는 메시의 정신 무장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