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74화 (175/176)

174화

메시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건 기분 나쁜 출발임에 틀림없었으나,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우리 선수들의 멘탈만큼은 굳건하다는 사실이었다.

16강전부터 이미 너무나도 어려운 경기들을 치르고 올라왔기 때문에,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많이 맞은 만큼 맺집이 좋아졌다고나 할까?

“자! 천천히 하나 가자!”

공을 잡은 기성영이 배에 힘 빡 주고 소리친 후, 내 쪽으로 공을 높게 띄웠다.

늘 그렇듯 공중에 떠서 상대 수비 상황을 체크.

볼 배급 1순위인 손형민은 마스체라노가 단단하게 밀착 마크를 하는 중이었고, 구재철도 디마리아에게 붙잡혀 있었다.

중앙이 안 되면 측면이지.

투웅-

때맞춰 올라온 차도리 선배에게 헤더 패스를 연결.

착지와 동시에 침투하려는 나의 앞을 에세키엘 가라이가 턱하니 막아섰다.

내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2010-2011 시즌에 1년 간 한솥밥을 먹었던 가라이.

라모스-페페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포르투갈의 벤피카로 떠났었는데, 거기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월드컵 대표팀에 승선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측면 전개와 동시에 쇄도해서 득점을 노리는 패턴은 너무 많이 사용해서 읽힌 모양이었다.

우리 대표팀의 패턴이란 게 대부분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서, 경기가 거듭될수록 파훼법이 등장하는 중.

전형적인 원맨팀의 한계였다.

그러나 이런 견제를 어떻게든 이겨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선배!”

나는 도리 선배에게 대놓고 공을 요구했다.

침투가 안 된다면 힘으로 찍어 눌러주지.

투콰아앙-

밑에서 가라이가 수비를 하거나 말거나 냅다 헤더 슈팅을 때려 버렸다.

네덜란드전 승부차기의 영웅이었던 세르히오 로메로 골키퍼가 화들짝 놀라며 공을 겨우 쳐냈다.

아까비.

코스도 좋았고, 임팩트 순간 회전까지 넣어서 막기 까다로운 볼이었는데 역시 로메로의 선방 능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허…”

가라이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르긴 몰라도 사베야 감독은 가라이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을 터였다.

- 정백강이 페널티박스 안으로만 못 들어가게 해!

시키는 대로 잘했건만 결과는 유효슈팅이었으니 황당할 수밖에.

그리고 아르헨티나에게 안 좋은 소식 하나.

오늘 내 이마의 감이 상당히 괜찮았다.

브라질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어시스트했던 성영이가 그때와 같은 자리에서 코너킥을 준비했다.

내게는 볼 것도 없이 더블팀이 붙었다.

또 유니폼이 찢어지는 기적이 일어나진 않겠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키가 큰 가라이(189cm)와 마르코스 로호(187cm)가 내게 붙었기 때문에, 곽휘태 선배나 김연권처럼 높이가 있는 동료들이 한 번 노려볼 수 있었다.

퍼엉-

신중하게 쏘아 올린 성영이의 코너킥.

예상대로 휘태 선배 쪽에서 찬스가 났다.

마르틴 데미첼리스와의 경합에서 승리하며 공중불을 따내는 휘태 선배.

완전 정통은 아니고 약간 빗맞은 것이 오히려 호재가 되었다.

공에 속도는 안 붙은 대신,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로메로의 역동작을 유도해낸 것.

위대한 관성의 법칙 덕분에 움직이지 못하고 딱 굳어버린 로메로.

놔두면 아리랑볼이 골문 안쪽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그 순간,

“내가 막을게!”

“간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꼬였다.

나를 자유롭게 버려둔 채 공을 걷어내기 위해 달려가는 가라이와 로호.

스타트가 빨랐던 가라이가 시저스킥으로 1차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공이 멀리 뻗지 못하고 공중에 높이 떴다.

마라카낭의 햇살을 받으며 불쑥 솟아오른 머리 하나.

얘들아, 더블팀을 붙으려면 제대로 붙어야지.

이렇게 놓아두면 고마워서 어떡해.

콰아앙-

아르헨티나의 리드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딱 한 번의 미스커뮤니케이션이 빚은 참사.

우오오오오!!!

열광하는 붉은 악마들이 일제히 오른손 검지를 들어 이마를 두드렸다.

브라질 팬들도 서로를 얼싸안고 이 순간을 만끽했다.

전반 21분 터진 천금 같은 동점골.

이번 대회 14호 골로, 남아공에서 세웠던 단일 대회 최다 득점 기록과 타이를 이루는 득점이기도 했다.

* * *

전반 20분대에 벌써 두 골이 터졌다.

심상찮은 페이스.

결승이 화력전 양상을 띠자 경기장 분위기가 한층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번엔 아르헨티나가 뭔가 보여줘야 할 차례.

가라이와 마찬가지로 레알에서 쫓겨난 덕분에(?) 국가대표에 승선할 수 있었던 페르난도 가고가 중원에서 공을 잡고 공격 방향을 결정했다.

터엉-

가고의 선택은 ‘믿을맨’ 메시.

방주호, 한국연, 그리고 재철이까지 무려 세 명의 선수가 메시 쪽으로 모여들어 수비 블록을 형성했다.

메시에 대한 수식어 중 대표적인 게 바로 ‘세계 최고의 드리블러’ 아니겠는가.

하나로는 어림도 없고 둘로도 장담할 수 없으니 셋이 붙은 것이었다.

문제는 메시의 재능이 드리블에 국한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점.

파앙-

이런 미친!

대체 무슨 틈을 본 거야?

앞에 장사진을 친 수비수들을 몽땅 바보로 만드는 킬러 패스가 오프사이드 트랩을 완벽하게 무너뜨리며 이과인에게 전달되었다.

타이밍이 1초, 아니 0.1초만 늦었더라도 막혔을 패스 길.

역시 천재는 천재였다.

“성규야! 나와!”

홍정후가 외치기도 전에 이미 스타트를 끊은 김성규가 잔디 위를 미끄러지며 이과인을 덮치려 했으나, 슈팅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이렇게 허무하게 실점인가 싶었는데…

아아아아-

관중석에서 터져나온 건 환호가 아닌 탄식이었다.

텅 빈 골대 옆을 무심히 지나가는 공.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선수든 팬이든 관계없이, 아르한테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죄다 머리를 양손으로 감쌌다.

직업란에 ‘축구선수’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고, 그게 2013-2014 시즌 세리에 득점 랭킹 4위에 오른 스트라이커라면 더욱 그랬다.

정신적 타격이 컸던 것일까.

바로 이 시점부터 이과인이 보여준 플레이는 글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

메시나 디마리아 같은 찬스 메이커들이 꿀패스를 떠먹여 줄 때마다 트래핑 미스로 턴오버.

분위기 좀 탈라 치면 무리한 중거리포로 맥 끊기.

아게로의 돌파 경로에 멀뚱 서 있다가 부딪치기 등.

상상할 수 있는 트롤링은 죄다 이과인의 몫이었다.

내 동점골 이후 20분 가량은 아르헨티나가 경기를 주도하는 흐름이었는데, 원톱이란 놈이 이러고 있으니 헛물만 잔뜩 켠 꼴이 되었다.

* * *

촤아악-

전반 39분, 휘태 선배가 과감한 슬라이딩 태클로 이과인을 응징했다.

이과인이 쓰러지면서 리촐리 주심에게 어필을 해 봤지만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부리나케 달려가 루즈볼을 따내는 성영이.

오랜만에 역습 기회가 찾아왔다.

성영이가 빙글 돌며 전방을 주시하는 순간, 아르헨티나 수비진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나에게 쏠렸다.

그러나 성영이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지옥 같은 마스체라노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왼쪽 측면에 와이드하게 벌리고 서 있던 형민이 쪽을 발견.

퍼어엉-

존재 자체가 악성 어그로(?)인 나 덕분에 무사히 공을 전달받은 형민이가 파블로 사발레타를 상대했다.

맨체스터 시티 부동의 주전 라이트백으로, 해당 포지션에서는 EPL 톱클래스로 인정받는 사발레타.

잉글랜드 진출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형민이에게는, 스카우터들에게 자신을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마스체라노가 도움 수비를 오기 전에 과감하게 일대일을 걸어 가는 형민이.

어설픈 잔재주 없이 주력으로 밀어붙였다.

즉흥적 플레이 같았지만 사실은 ‘분석에 미친 남자’ 과르디올라 감독의 지시사항.

약점이 거의 없는 사발레타에게 그나마 비벼볼 수 있는 대목이, 발이 아주 빠르진 않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형민이의 가장 큰 장점은 스피드였으니.

노련한 사발레타는 자신보다 빠른 상대를 제압하는 법을 잘 알았다.

공을 쫓는 대신 형민이에게 몸을 밀착시키면서 속도 싸움이 아닌 피지컬 싸움으로 전환 시도.

자신이 유리한 판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였다.

최근 근육을 좀 붙이고는 있지만 아직 몸이 완성되진 않은 형민이라 밀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과는 의외였다.

“으아아아아!!!”

고함까지 질러대며 기어이 버텨낸 형민이가 사발레타를 따돌리며 측면 돌파에 성공!

브라질전에서 후반을 통째로 쉰 효과가 이렇게 나오나?

“선배님!”

집념으로 만들어낸 왼발 러닝 크로스가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날아왔다.

형민이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보답해주는 게 인지상정.

가라이가 나를 어떻게든 붙잡아보려 했으나, 파울을 하기엔 주심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정백강의 도약을 못 막았다?

결과는 뻔하지.

철썩-

전반 42분, 월드컵의 역사가 또 한 번 바뀌었다.

4년 전 내가 세운 기록을 스스로 경신하는 15번째 득점.

그리고 역전.

두 골을 넣는 데는 딱 두 번의 슈팅이면 충분했다.

과인아, 축구는 나처럼 하는 거야.

* * *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에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려 퍼졌다.

벤치로 향하는 메시의 표정은 말 그대로 썩어 있었다.

수비수를 서너 명씩 몰고 다니면서 골도 넣고 볼 운반도 하고 킬러패스까지.

할 거 다했는데 스코어는 1-2.

우리 원톱은 어디 불법 토토라도 걸었는지 최악의 경기력을 선보이는데, 항상 앞길 막던 태산(泰山) 정백강은 벌써 멀티골.

제아무리 멘탈이 강한 사람이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하하하하!”

얼굴에 ‘행복’이라고 써있는 형민이와는 완벽하게 대비되는 모습.

다른 경기도 아니고 월드컵 결승전에서 공격포인트를 기록했으니 얼마나 기쁠까.

물론 아직 방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축구에선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걸 불과 며칠 전에 경험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선수 교체를 하지 않았고, 사베야 감독은 모두의 예상대로 이과인을 불러들였다.

대신 한때 아르헨티나의 에이스로 군림했던 33세의 노장 막시 로드리게스를 투입.

메시와 아게로가 투톱을 서고 디마리아와 로드리게스가 측면을 공략하는 4-4-2 포메이션으로 전환했다.

후반전은 아르헨티나의 선축.

“선배님, 쟤 눈빛이 살아났는데요?”

형민이가 킥오프를 준비하는 메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조심해야겠다.”

하프타임 동안 어떻게 마음을 다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보였던 절망감은 온데 간데 없었다.

무서울 정도로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독기가 서린 눈이었다.

삑-

트로피의 주인이 결정될 최후의 45분.

메시가 디마리아에게 백패스를 한 뒤 하프라인을 넘자마자 손을 들었다.

지체없이 공을 전달하는 디마리아.

공을 받은 메시가 앞을 쓱 보더니, 별안간 드리블을 치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몰고 올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수비진이 채 정돈되기 전이었다.

재철이는 숄더 페이크 한 방에 나가떨어졌고, 성영이가 어깨를 집어넣으려고 했으나 민첩한 메시의 움직임을 잡지 못했다.

“어어? 뭐해? 막아!”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도리 선배가 고함을 쳤고, 국연이가 파울로 끊기 위해 메시의 유니폼을 부여잡았으나 치고 나가는 메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놓쳐 버렸다.

가속도 붙은 메시의 돌파는 막는 입장에서 공포 그 자체.

정후마저 무력하게 무너지자 도리 선배, 휘태 선배, 연권이가 동시에 메시를 덮쳤다.

토옹-

우리 수비진을 비웃듯 날아가는 메시의 로빙 패스.

너무나도 편하게 때린 아게로의 강렬한 오른발 발리슛이 골망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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