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完)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터진 동점골에 아르헨티나 관중들이 열광했다.
골을 기록한 건 아게로였지만, 밥상을 차린 건 메시.
잔뜩 분노한 ‘풀파워 메시’의 위력은 역시 무시무시했다.
이제 모든 것이 동등해졌다.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승부.
월드컵 결승전답게 팽팽한 전개였다.
지금부터의 실점은 정말 치명적일 수 있었다.
최고조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양 팀 선수들.
위험지역으로의 볼 투입은 어떻게든 막겠다는 일념 하에 파울도 불사하는 거친 수비가 난무했다.
덕분에 리촐리 주심의 휘슬은 쉴 틈이 없었다.
덩달아 옐로카드도 쏟아졌다.
우리는 한국연, 기성영, 방주호가, 아르헨티나에서는 가라이, 마스체라노, 사발레타가 노란 딱지를 받아들었다.
흔히들 ‘축구는 전쟁’이라고 표현하는데, 마라카낭의 분위기는 정말로 전쟁터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총칼 대신 축구공을 가지고 싸운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크아아악!”
차도리 선배가 발목을 노리고 들어간 로호의 깊은 슬라이딩 태클에 직격당하며 쓰러졌다.
나한테 두 골을 먹은 이후, ‘크로스=실점’이라는 공포감이 아르헨티나 녀석들에게 깊숙이 자리잡았다.
우리가 측면에서 공만 잡았다 하면 격한 충돌이 벌어지는 이유였다.
삐비비빅-
부리나케 달려온 리촐리 주심이 로호에게 옐로카드를 주었지만 도리 선배를 만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개새끼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리 선배가 새빨개진 얼굴로 로호에게 달려들었다.
평소 순한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섭다더니 정말이었다.
“아이고, 형님. 참으세요.”
필사적으로 뜯어말린 끝에 난투극은 겨우 피했다.
도리 선배 덕분에 괜찮은 위치에서 얻어낸 프리킥 찬스.
이미 세트피스 실점이 있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녀석들이 바짝 긴장했다.
가라이, 로호에 이어 가고까지 나에게 붙으며 트리플팀.
얘들아, 아무리 그래도 3명은 좀 심하지 않냐?
퍼엉-
전담 키커 성영이가 골문 쪽으로 공을 붙여 주었고, 완전 프리한 상황에서 김연권의 헤더 슈팅이 작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골키퍼 정면이었다.
로메로가 공을 안정적으로 잡아낸 후 곧장 앞으로 달렸다.
“역습 조심해!”
나의 우려는 적중해서, 로메로가 지체하지 않고 공을 멀리 내던졌다.
달려가던 디마리아가 왼발을 쭉 뻗으며 점프, 멋들어진 트래핑을 선보이며 공을 붙잡아 놓았다.
투웅- 투웅- 투웅-
거침없이 전진하는 디마리아와, 그 뒤를 부지런히 쫓아가는 우리 선수들.
진짜 더럽게도 빠르네.
순식간에 하프라인을 넘어선 디마리아가 페널티박스 인근까지 쾌속 진군, 겨우 따라잡은 구재철이 뒤에서 다리를 걸어 파울로 끊었다.
경고는 보너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4 대 4로 카드 개수를 맞추고 있는 양 팀이었다.
이번에는 아르헨티나의 프리킥.
골문과의 거리는 약 28m.
오른발 왼발 모두 가능한 각도였지만, 누가 키커로 나설지는 경기를 지켜보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늘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펄펄 날고 있는 메시가 결의에 찬 얼굴로 공 앞에 섰다.
그때 브라질의 7월에 어울리지 않는 찬 바람 한 줄기가 얼굴을 스쳤다.
이거 어째 징조가 좋지 않은데?
뻐어어엉-
내가 서 있는 쪽을 회피하며 수비벽을 넘긴 공이 골문 오른쪽 상단으로 빨려들어갔다.
김성규가 몸을 날렸지만…
철썩-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것인가.
후반 24분, 경기를 다시 한번 뒤집는 메시의 프리킥 골.
성규는 무릎을 꿇었고, 흥분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메시를 덮쳤다.
월드컵 최다 골 기록?
역사상 최고의 하드캐리?
대한민국의 첫 결승 진출이라는 업적?
앞서 나에게 쏟아진 그 수많은 찬사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만약 이 경기에서 패배한다면 말이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우리 중원에서 수비력이 가장 좋은 한국연을 빼고 이건호 선배를 투입했다.
자연스럽게 3-4-3 포메이션으로 전환.
이에 맞서는 사베야 감독은 아게로를 불러들이고 수비형 미드필더 루카스 빌리아를 기용하며 중원을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넣어 볼 테면 넣어 보라는 도발이었다.
이런 표현을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대한민국의 창과 아르헨티나의 방패가 맞부딪치는 대결이 시작되었다.
* * *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20여분.
우리는 일단 측면에서 활로를 찾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건호 선배는 로호에게, 도리 선배는 디마리아에게 철저히 마크당하며 공 잡기도 힘들어했다.
반대쪽 측면도 사정은 마찬가지.
로드리게스가 공격 따윈 포기한 자세로 주호만 줄창 따라다녔고, 아까 크게 한 방 먹은 사발레타는 형민이를 확실하게 디나이(Deny)했다.
그렇다고 중앙에서 뭔가를 해 볼라쳐도 아르헨티나의 막강 투볼란치가 버티고 있었으니.
특히 마스체라노는 거의 정신나간 수준의 활동량과 태클을 뽐내며 신출귀몰하는 중이었다.
간헐적으로 터지는 나의 헤더 중거리포를 제외하면 의미있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야속한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아르헨티나 팬들의 함성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이대로 끝난다면 1986년 이후 무려 28년 만의 월드컵 우승.
마라도나-메시로 이어지는 영웅들의 스토리 라인도 완벽한 데다가, 금상첨화로 개최지는 브라질.
최대 라이벌에게 또 한 번 ‘마라카낭의 비극’을 선사해주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흥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경기는 지고 있지만 응원전에서는 질 수 없다는 듯, 붉은 악마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는 사이에 후반 40분 돌파.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무조건 높이 띄워!”
성영이가 마스체라노에게 꽁꽁 묶여 있었기 때문에, 후방의 홍정후가 대신 나를 보고 로빙 패스를 때려 넣었다.
확실히 성영이와 비교하면 정확도는 부족했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내가 몇 발 더 뛰면 되지 뭐.
파악-
잔디를 박차면서 있는 힘껏 공중으로 도약했다.
패스길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불확실한 중거리포를 또 때리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순간 머릿속에 섬광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
내가 생각해도 미친 발상이었지만, 어차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가망이 없었다.
“간다!”
일부러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면서 헤더 자세를 취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가라이.
에라 모르겠다, 해 보는 거야!
임팩트 직전 방향을 바꾼 나의 헤더는, 골문이 아닌 가라이의 허리춤을 노렸다.
퍼억-
“뭐야 이거?”
가라이가 예상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한 사이, 착지하자마자 스타트를 끊은 내가 공을 향해 질주했다.
소싯적에 당구 좀 쳤던 게 빛을 발하는 순간.
딱 내가 의도했던 반사각으로 공이 튀며 원하는 위치에 마침맞게 떨어졌다.
꾸역꾸역 만들어낸 일대일 찬스.
곧바로 오른발 슈팅을 시도했으나 각을 좁히고 나온 로메로에게 막혔다.
그러나 거리가 워낙 가까웠기 때문에 로메로도 공을 잡아 놓지는 못했다.
들어갈 때까지 때린다!
나는 주인 잃은 볼에 무작정 몸을 날리며 다이빙 헤더를 시도했다.
머릿속엔 무조건 골을 넣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퍼어엉-
공을 사이에 두고 나의 머리와 로메로의 손바닥이 충돌했다.
회전이 잔뜩 걸린 채 바닥에 떨어진 공이 또르르 굴러서 그물에 안착했다.
우우와아아아악!!!
마라카낭은 벌써 여섯 번째 광란의 도가니.
트로피의 향방이 다시 오리무중에 빠졌다.
내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가라이는 애꿎은 잔디만 걷어찼고, 메시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사라졌다.
나는 세리머니를 하지 않고 곧바로 공을 주워 하프라인으로 달려갔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고, 상대는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내 승부사의 촉이 말하고 있었다.
연장은 없다.
지금 밀어붙여서 90분 내로 끝낸다.
삑-
오늘 정말로 파란만장한 경기를 주관하고 있는 리촐리 주심이 킥오프를 선언했다.
카드가 쏟아졌던 경기라 추가시간도 넉넉하게 5분이 주어졌다.
절망에 빠져 있다가 구원을 받은 우리 선수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압박! 압박해!”
나의 지시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상대를 몰아붙이기 시작.
선수 개개인의 클래스는 아르헨티나 쪽이 훨씬 높았지만, 이미 멘탈이 무너진 상황에서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건호 선배와 재철이가 연합 수비로 그 키핑 귀신 디마리아의 공을 탈취하며 공격권을 가져오는 데 성공.
내친김에 건호 선배가 오른쪽 터치 라인을 따라 공을 몰고 내달리며 역습을 시도했다.
아르헨티나의 대위기.
로호가 크로스를 차단하기 위해 건호 선배 쪽으로 몸을 날렸다.
투욱-
그러나 건호 선배의 선택은 바닥에 깔리는 스루패스.
그곳엔 대체 어디서부터 뛰어온 건지 감도 안 잡히는 도리 선배가 있었다.
“안돼!”
로호의 비명을 BGM으로, 대표팀 최고참 도리 선배의 러닝 크로스가 내 머리를 겨냥하고 날아왔다.
13년 동안의 국가대표 생활을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좋은 그림이 있을까.
콰아아앙-
2014 브라질 월드컵의 우승국을 가린 결승골은, 그렇게 가장 정백강스러운 방식으로 나왔다.
‘동료의 크로스를 머리로 받아 넣는다.’
단순하지만 그 누구도 막지 못했던 무적의 원패턴.
- 정백강은 어떤 선수였나요?
수십 수백 년이 지난 후 누군가 물어본다면 바로 꺼내서 보여줄 만한 그런 골 말이다.
삑- 삑- 삐익—
내 인생에서 이처럼 달콤한 휘슬 소리는 없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행복감이 온몸을 감쌌다.
하늘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장내 아나운서에 의해 내 이름이 호명되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 2014 브라질 월드컵 골든볼의 주인공은… 정! 백! 강!!!!!
이번 대회부터 결승 직후 시상으로 바뀐 골든볼.
이견의 여지는 존재할 수 없었다.
7경기 17골 1어시스트.
그리고 결승전에서는 4골로 팀 우승을 결정지은 선수가 있었으니.
“축하하네. 정말 해내고 말았군.”
제프 블라터 피파 회장이 골든볼 트로피와 함께 축하를 건넸다.
블라터 회장과 인사를 마친 나는 그 옆에 내빈 자격으로 서 있던 펠레와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하하하하. 이제 더 이상 우기지도 못 하겠어. 백강, 자네가 최고일세. 자네보다 위대한 선수는 지금까지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걸세. 악명 높은 내 ‘저주’도 아마 자네에겐 소용이 없겠지. 다시 한번 축하하네.”
나와 펠레의 만남은 전임 축구황제가 직접 참여한 대관식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전세계의 모든 이들이 ‘역대 최고의 선수’를 꼽을 때 정백강이라는 이름을 가장 위쪽에 써 놓으리라.
골든볼 시상이 끝난 후, 준우승팀 아르헨티나가 먼저 단상에 올랐다.
다들 너무 울어서 눈가가 부어 있었는데, 특히 메시의 얼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 참담한 심정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메시라는 존재가 나에게 항상 자극제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훈련장에 가장 먼저 출근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
오늘도 메시는 최고였다.
다만 내가 조금 더 뛰어났을 뿐.
준우승 메달을 수여받은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맥빠진 발걸음으로 단상을 내려갔다.
이제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였다.
정백강!!! 정백강!!! 정백강!!!
계단을 오르는 내내 나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우승 메달을 목에 건 동료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주장을 기다렸다.
개최국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6.175kg의 묵직한 월드컵 트로피를 내게 전달했다.
그 무게감을 손으로 느끼는 순간,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공을 처음 찼을 때의 감촉, 엄마가 무리해서 사준 축구화가 찢어졌을 때 흘렸던 눈물, 프로 데뷔 후 첫 골, 잉글랜드에 진출했을 때의 설렘, 적응 실패로 망가졌던 삶, 기적적으로 다시 얻은 기회, 첫 번째 발롱도르를 받던 날의 환희…
그리고 지금, 내 손에는 월드컵 트로피가 쥐어져 있었다.
“선배님! 빨리 오세요!”
내 속을 알 리 없는 형민이가 손짓하며 재촉했다.
“그래 임마. 간다, 가!”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겨우 속으로 삼킨 내가 대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우승 트로피를 내가 1순위로 드는 건 처음이었다.
주장이란 것도 나쁘지 않네.
‘하나, 둘, 지금!’
속으로 타이밍을 맞춘 후 할 수 있는 한 가장 높이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축포와 꽃가루가 밤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