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터 패키지를 수령하십시오.
낮 12시. 능연의 눈앞에 또 한 번 저런 문구가 튀어나왔다. 시야의 오른쪽 상단에는 고장 난 사이렌 램프처럼 선물 아이콘이 깜빡깜빡했다.
능연은 당황하지 않고 수첩을 꺼내 기록했다. 의대생인 능연은 눈앞 현상에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충분한 자제력을 발휘하며 조심스럽게 이 낯선 상황을 파악해갔다. 그는 이 시스템을 엉겁결에 얻은 뒤로 스스로를 대상으로 갖가지 테스트를 진행하며 끊임없이 기록을 해왔다.
우선 이 현상이 정신질환의 일환인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물론, 대학을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싶다면 무조건 혼자서 비밀리에 검사를 진행해야만 했다. 졸업증서를 받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능연이 제일 먼저 한 검사는 망상 증세가 심한 정신분열증 환자의 인지력 편차를 평가할 때 유용한 DACOBS였다. 운 좋게도 이 검사는 자가보고형이라 홀로 검사를 진행해야 하는 능연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이 검사는 총 42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언가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을 드러내는 1인칭 서술문을 읽은 뒤, ‘매우 동의하지 않는다(1점)’부터 ‘매우 동의한다(7점)’ 사이에서 자신에게 해당하는 답변을 고르면 됐다.
전부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문제들이었고,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항목이 많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01. 나는 항상 경계상태를 유지한다.
09. 나는 타인의 의도를 항상 의심한다.
20. 나는 창문과 문을 제대로 잠갔는지 항상 확인한다.
25. 나의 즉각적 반응은 항상 정확하다.
27. 날이 어두워지면 집 문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다만, 응답하기는 쉬워도 여러 복잡한 공식을 이용해야 해서 총점 계산 과정은 복잡했다.
능연은 DACOBS를 제외하고도 여러 검사를 스스로 진행했다. 정신분열증 인지능력 테스트부터 시작해, PDI, Haddock의 PSYRATS, 조현병 양성음성 증후군 평가지표 PANSS 등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DACOBS로 모은 데이터로 자신의 정신상태를 평가하려면 관련 프로그램이 설치된 컴퓨터가 필요했다. 능연은 실험동 2층에 있는 실험실 문을 노크했다. 다급한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추었으나 예상과 달리 바로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잠시 후, 한 여자가 안쪽에서 문을 세차게 열었다.
“능연이 왔구나.”
선배는 립스틱을 옅게 바른 상태였는데 블러셔까지 한 듯했다. 어둑한 조명 아래서 그녀의 모습은 할머니로 위장해 빨간 모자를 기다리는 늑대라고나 할까.
“선배님, 또 귀찮은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능연이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선배는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능연을 바라봤다. 마치 ‘잘생겼다! 웃는 모습도 잘생겼다!’라고 외치는 듯했다. 능연은 미소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길 잠시, 선배는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황급히 길을 비켜주며 미소를 머금었다.
“어서 들어와. 내, 내가 따뜻한 차를 준비해줄게. 참, 너 요즘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네? 아, 그럼요. 왜 물어보시는 거죠?”
“최근에 CT랑 MRI 찍었다며. 우연히 들은 이야기지만.”
선배는 티백을 꺼내며 대답했다.
뇌에 병변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려면 CT와 MRI를 모두 찍어야 했다. 하지만 CT 한 번에 몇 백 위안, MRI 한 번에 2,000위안이 드니, 친분을 이용해 며칠 전 3층 실험실을 지키던 선배에게 부탁해야 했다.
능연은 미리 준비한 변명을 차분한 목소리로 선배에게 들려주었다.
“졸업 논문 준비 때문에 영상의학과 선배님께 부탁했습니다. 혹시 선배님께서도 제 검사 결과를 보셨나요? 어땠나요?”
“예쁘던데. 앗! 아니, 괜찮다고. 그 어떤 문제도 발견할 수 없는 젊고 활력 있는 뇌였어.”
“다행이네요. 음, 선배님, 이 컴퓨터를 사용하면 됩니까?”
능연은 실험실에 있는 컴퓨터를 쳐다보며 선배의 말실수를 모르는 척 넘어갔다.
“응! 그 컴퓨터에 SPSS 20.0을 깔아 놓았어. 데이터만 충분하면 우리가 자체 개발한 플러그인으로 DSM-4에서 제시한 진단기준을 따라 정신분열증을 확진할 수 있지. 네가 제공한 CQB, BDI, PDI, PSYRATS 데이터는 전부 문제없었고······.”
선배의 전공 분야라서 그런지 정말 청산유수였다. 그녀는 컴퓨터 앞에 앉아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가르쳐 주었다. 논문 준비를 위해 설비나 소프트웨어를 빌리러 오는 예비 졸업생은 해마다 많았지만, 선배의 세심한 지도를 받을 수 있는 학생은 오직 능연뿐이었다. 잘생긴 후배에게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전수할 수 있다니. 선배는 행복해 미치려 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선배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능연에게 말했다.
“이제 혼자서 할 수 있겠지? 난 이만 나가 볼게.”
“네, 그럼 잠시 신세 좀 지겠습니다.”
환자 개인 정보를 입력해야 하니 선배는 눈치껏 자리를 비워주었다. 능연은 자리를 넘겨받은 뒤 시선을 컴퓨터 모니터에 고정했다.
선배는 나가면서도 계속 능연을 뒤돌아보았다. 능연은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기다린 후,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안에서 잠갔다.
그는 그제야 배낭에서 최근 스스로 진행한 모든 검사 데이터가 들어 있는 두꺼운 문서를 꺼냈다. 망상증이나 정신분열증은 어느 틈에라도 발병할 수 있기에, 그는 문제 푸는 모습을 스스로 녹화해 친구에게 확인까지 받았다.
의대생이 자신을 상대로 실험하는 것은 워낙 자연스러운 일이다 보니, 친구는 이를 아무 의심 없이 확인해 주었다. 게다가 이런 정신 분석 관련 검사는 메스나 주사기가 동원되지 않아 흔히들 자기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으니, 이러한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능연은 선배가 가르쳐준 것처럼 모든 숫자와 알파벳을 알맞은 곳에 입력한 뒤 입력 오류가 있는지 두 번이나 검사하고 ‘확인’을 눌렀다. 컴퓨터가 나지막한 지직 소리를 내며 계산을 시작했다. 한 자릿수만 입력했더라도, 공식과 계수에 대입되면 계산할 양이 어마어마해진다.
한참이 지나서야 프린터에서 달칵달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능연은 프린터에서 나온 종이를 꺼내 맨 끝에 적힌 결과부터 보았다.
“음, DACOBS의 표준치는 128.05±26.5였지. 나는······, 154네. 휴우, 다행이다. 0.55만 더 붙었으면 정신질환이었을 텐데.”
능연은 기쁜 마음을 주체 못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바로 눈앞에 떠있는 ‘스타터 패키지’를 클릭하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은 조용하고 안전한 곳에서 해야겠지? 패키지 안에 들어 있는 게 진짜 트랜스포머면 국가적 피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저녁을 먹은 뒤, 능연은 홀로 학교 시체공시소 뒤에 있는 낡은 방공터널에 들어섰다. 예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방공터널은 한동안 임시 병원으로 쓰이다가 나중에는 시체공시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새로운 의대 건물이 완공되자, 이 터널은 완벽한 무용지물로 전락하며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서서히 사라졌다.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탓에, 떠돌이 개도 이 방공터널보다 지독한 곳은 없겠다며 피할 정도였다. 하지만 능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름지기 신입 의대생이 처음 시체 해부 수업에 들어간다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무조건 속을 게워내기 마련이었다. 그러다가 시체공시소에 2년만 들락날락하면 시체의 손가락뼈로 펜 돌리는 법을 연습할 정도로 담담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산책하러 시체공시소에 오는 의대생은 없었다. 저녁 시간이라면 더더욱.
능연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방공터널 안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프라임급의 트랜스포머면 최소 7~8m, 최대 몇십 미터니까, 이 정도 공간이면 충분하겠지. 하지만 시스템이 주는 트랜스포머가 영화보다 더 크면 어떡하지.
능연은 걱정을 뒤로하고, 시야 오른쪽 상단에 있는 ‘스타터 패키지’를 ‘클릭’했다.
- 마스터급 병렬 봉합법(appositional suture patterns) 스킬 획득!
고요했던 머릿속에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능연이 병렬 봉합법을 떠올리자, 봉합할 때의 무수한 디테일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랐다. 스티치 사이의 거리, 피부를 관통하는 힘, 봉합사를 선택하는 법, 매듭을 짓는 방법······.
“달랑 하나? 그것도 그냥 병렬 봉합법? 그 많은 봉합법 중에 딱 한 가지만 알려주는 건 너무 짠 거 아닌가.”
능연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 병렬 봉합법 패키지에는 총 6가지 봉합법, 즉 단순 단속 봉합법(simple interrupted suture), 단순 연속 봉합법(simple continuous suture), 표피하 봉합법(subcuticular suture), 감비아 봉합법(Gambia suture) 십자 봉합법(cruciate suture), 제륜 봉합(lock-stitch suture)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스템은 매우 기계적인 느낌으로 설명했다.
“종류가 아무리 많아도 그저 봉합법일 뿐이고, 내번 봉합법(inverting suture patterns)이나 장력 봉합법(tension sutures)은 따로 배워야 하잖아. 그냥 트랜스포머 주면 안 돼?”
능연이 여전히 볼멘소리를 내자, 시스템은 저번보다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 불가능합니다.
“왜?”
- 의료 시스템은 의술만을 전달합니다. 고로 트랜스포머는 제공 불가합니다.
능연은 입을 삐죽거렸다. 아무래도 이 시스템은 인간이 조종하는 건 아닌 듯했다. 만약 인간이 조종하고 있었다면, 트랜스포머를 내놓으라는 말에 ‘그걸 가져서 뭐 하게?’ 따위의 반문을 던졌겠지.
“마스터급이라는 건 무슨 뜻이야?”
- 기술 등급은 하급에서 고급 순으로 입문급, 전문가급, 마스터급, 그랜드마스터급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마스터급은 3급에 해당합니다.
“······하여튼 스타터 패키지는 이 하찮은 봉합법이라는 거지?”
- 네.
“트랜스포머는 없고?”
- 네.
능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방금 던진 질문은 모두 전형적인 튜링 테스트 문제였다. 이 둔해 빠진 시스템이 인간의 조종을 받고 있지 않다면, 튜링 테스트를 당연히 통과 못 할 것이었다. 똑같은 질문을 누누이 받았을 때 인간은 ‘방금 말했잖아!’ 같은 반응을 보이는 반면, 알고리즘을 따라가는 기계는 절차에 따라 ‘네.’라고만 대답한다.
그럼 이 ‘시스템’이 정말 기계란 말이야?
능연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시스템 배후에 인간이 있는지 없는지를 밝힐 수 없었다. 또한, 설사 튜링 테스트를 완벽하게 진행하더라도 헷갈리는 것은 여전할 것이었다.
“알았어. 이 좋은 방공터널을 낭비한 거로 칠게.”
능연은 고개를 들었다. 이 텅 빈 방공터널을 트랜스포머 저장 공간으로 이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