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그레이트 닥터-2화 (2/877)

기숙사에 돌아가니 저녁을 먹고 돌아온 룸메이트들이 보였다. 모두 스마트폰을 들고 셀카를 찍거나 서로를 찍어대고 있었다.

방에 들어오는 능연을 가장 먼저 발견한 진만호가 말을 걸었다.

“능연아, 빨리 가운 받으러 가. 새로 들어온 거라서 좀 쭈글쭈글하더라. 306호에 가서 다리면 돼.”

그러고는 그는 다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너희 지금 뭐 하냐?”

능연은 어이없는 얼굴로 새하얀 가운을 입은 룸메이트를 보았다.

“내일부터 실습 인생이 시작되잖니. 너 지금 옷 다리지 않고 그렇게 꾸물거리면 내일 가운 못 입고 간다?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데! 학교에서 준 가운은 전부 구겨져 있어.”

진만호는 말하면서 휴대폰을 45도 방향으로 들어 올려 자신을 찍었다.

“청진기는 어디서 난 거야?”

능연이 진만호의 목에 걸려 있는 빨간색 청진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헤헤, 이거 내 돈 주고 샀다. 3M 건데 진짜 잘 들려! 한 번 들어볼래?”

“병원 청진기로는 만족할 수 없는 거냐?”

“실습생한테는 가운만 주지 청진기는 안 준다고!”

“넌 실습생에게 청진기를 왜 안 주는지 생각 한 번도 안 해 봤지?”

능연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진만호를 바라보았다.

“한두 푼 하지 않았을 텐데?”

진만호는 뜨끔했는지 서글픈 표정으로 청진기를 목에서 떼어냈다.

“발 마사지 다섯 번 갈 수 있는 가격이었어. 빨간색은 여섯 번 가격이었고.”

왕장용이 하얀 라텍스 장갑을 낀 두 손을 얄밉게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말해줬잖아, 청진기는 우리에게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실습생의 필수품은 장갑이야.”

능연은 이 어리석은 룸메이트들과 말 섞는 자신이 싫었다. 그는 서랍에서 바나나 하나를 꺼냈다.

“쯧쯧. 네 것은 커서 좋겠다.”

왕장용이 말했다.

능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왕장용이 지켜보는 가운데 메스로 바나나 껍질을 찢었다.

“능연야, 너 봉합은 충분히 잘하니까 갑작스럽게 연습할 필요는 없지 않니?”

왕장용이 시선을 불쌍한 바나나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오늘 내 컨디션이 좋아서 말이지.”

능연은 책상 등을 켜고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Johnson & Johnson Ethicon에서 나온 70cm 길이의 봉합사가 들어 있었다.

이 봉합사 모델은 마찰력이 있어 사용 시 피부가 봉합사에 딸려갈 수 있다. 워낙 제어하기 어려운 종류이다 보니, 해외 의대에서는 봉합 연습용으로 추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봉합사를 국내에서 구하려면 가격이 비싸지기에, 매일 봉합 연습에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동네 진료소를 운영하는 능연네 집은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의대생의 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가족들은 그가 필요한 만큼 돈을 대주려 노력했다.

능연은 왼손에 포셉(forceps), 오른손에 니들홀더(needle holder)를 들었다. 바나나 껍질에 봉합침이 닿는 그 순간, 뇌리에 무수한 정보가 쏟아졌다. 손목은 모든 방법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서슴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봉합침은 그의 손짓에 따라 막힘없이 껍질 사이를 들락날락했다.

꽂고, 빼고, 매듭짓고······. 능연은 평상시에도 홀로 봉합 연습을 꾸준히 해온지라 동기 중에서 봉합을 잘하는 편에 속했다. ‘마스터급 병렬 봉합법’을 받았을 때 대단하게 여기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어리숙했는지 깨달았다. 예전에는 집중해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세세한 부분을 지금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서도 전부 커버할 수 있었다.

봉합 과정 내내 바나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봉합침이 들어가든 나오든, 바나나 껍질은 그 어느 움직임에도 훼손되지 않고 원상태 그대로 봉합되었다. 스티치 사이의 간격은 자로 잰 듯 균일했고, 매듭은 공장에서 찍어낸 패턴처럼 단정했다.

정확한 방향, 정교한 힘, 노련한 판단, 적절한 깊이와 각도, 안정된 움직임. 아무리 쉬워 보여도 직접 도전해보면 그 어느 동작도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말도 안 돼. 이렇게 빨리 끝내다니!”

왕장용이 갑자기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거대한 바나나가 무슨 예술품이라도 되는 마냥 코앞에 들고 열심히 관찰했다.

그 복잡한 과정에서 네 이목을 끈 것은 속도뿐이었구나.

능연이 ‘고수는 항상 고독한 법이다.’라는 말의 참뜻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운화 병원.

유리 외벽의 외래진료동에 두리번거리는 실습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운화대학’, ‘운화의대’, ‘운화중의대’라고 적혀 있는 하얀 가운을 입은 교수 몇 명이 병원 행정실 직원과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실습이란 곧 의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대학생 시절이 황무지 개간이었다면, 실습은 과실이 맺기를 기다리는 시기였다.

“운화 병원에 한 번 와본 적 있는데! 오늘은 정말 색다른 기분인걸!”

왕장용이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를 살짝 정리한 뒤 벽에 걸려 있는 엠블럼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당연히 감회가 새롭겠지, 그때는 포경수술 하러 온 거잖아.”

진만호는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 가운을 입고 앞주머니에 펜 몇 자루를 꽂았다. 목에 시뻘건 청진기가 걸려 있어 가만히 보고 있으면 병원 실습생보다는 의사 놀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목소리를 낮게 깔아 차분하면서도 엄숙해 보이려 애를 썼다.

친구들의 태클이 이미 습관화된 왕장용은 화를 내지 않고 반격했다.

“큰 것은 큰 병원에서 손을 봐야 해.”

왕장용은 말이 끝나자마자 안타깝다는 듯 진만호의 그곳을 째려보았다.

“그 눈빛은 또 무슨 뜻이냐?!”

기분이 나빠진 진만호는 바로 되물었다.

“만호야, 흥분하지 마라. 우리 모두 공용 샤워실에서 샤워한 사이잖니? 서로의 상황은 다 잘 알고 있단다.”

옆에 서 있던 학생이 불쑥 끼어들었다.

진만호는 화를 열심히 억눌렀다.

“그 누구도 날 막을 생각하지······.”

“자자, 조용합시다!”

실습생 견학을 책임지는 교수가 확성기를 들었다.

“일단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면서 실습생 주의 사항을 알려드릴 겁니다. 오리엔테이션 뒤에 병원을 견학하고, 그다음 조를 나누어 로테이션의 첫 시작이 될 진료과에 배정해드릴 예정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이 자신의 실습 평점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항상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몇몇 학생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진만호를 바라보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흥분해 있던 그는 어느새 마취한 토끼처럼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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