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분류하는 리셉션을 지나 수액실을 가로질러 치료보호실을 지나면 응급처치실이었고 그 옆에 휴식실이 있었다. 휴식실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일고여덟 명의 의사가 앉아 있었다. 의사들은 십여 명의 실습생이 방 안에 몰려 들어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 선생님, 또 사람 데리고 오셨습니까.”
“아, 신입이군요!”
“이 선생님, 도움이 필요한 일은 없나요?”
실습생들은 간호사를 도우려는 의사들의 열정을 보며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간호사는 하얀 가운 입은 존재들의 체면 따위 안중에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려 실습생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얌전히 있으면 되고, 누가 부르지 않으면 절대 함부로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환자를 접촉하거나 환자와 환자 가족의 질문에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말을 마친 간호사는 이제야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는 듯 “지금은 할 일 없네요.”라는 대답만 남기고 바로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사무실에는 비탄으로 가득 찼다.
“여러분도 실습생이신가요?”
첫 번째로 사무실에 들어온 실습생이 의아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우린 레지던트야. 여기서 일을 돕고 있지.”
대부분은 실습생의 질문 따위 무시했다. 그중 노안인 레지던트가 대충 대답해줬다.
“수술 경험 쌓으려고 온 것이군요.”
이 분야에 대해서 잘 아는 실습생이 한마디로 아픈 곳을 찔러버렸다. 방금 대답해 준 노안인 레지던트의 안색이 순간 변하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실습생들은 레지던트에 흥미를 잃었는지 한곳에 뭉쳐 작은 소리로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수술 경험 쌓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능연은 사무실을 감도는 냉기를 느끼지 못했는지, 빈자리를 찾아 앉고서는 아주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모여도 그는 표정 한 번 변하지 않았다.
“표준화 훈련(規培: 1년 실습이 끝난 후 받는 훈련. 병원 개업할 수 있는 자격증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짐. 이 훈련을 받는 의사를 훈련의라고 지칭할 예정)을 받으면 알게 될 거야. 수술 경험은 쌓기 정말 힘들거든.”
노안 레지던트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쓰레기 병원에 채용되면 수술 경험 따위는 필요 없겠지.”
가뜩이나 취직 부담에 짓눌려 살고 있는 실습생들은 모두 눈을 부릅떴다. 레지던트도 밀릴세라 똑같이 노려보았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레지던트도 모두 연차가 낮은 의사여서 한 번이라도 더 수술에 참여해보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어찌 보면 실습생들과 같은 목표를 갖고 있었다.
수술 경험이란 외과 의사가 ‘레벨 업’을 하기 위한 경험치였다. 스타터 단계의 의사들은 수술실에 가서 최종 보스와 붙을 자격이 없다 보니, 응급실이라도 와서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볼 수밖에 없었다.
레지던트끼리의 치열한 경쟁에 실습생이 더해지니, 불 난 집에 기름을 부은 셈이겠지. 하지만 중간에 앉아 있는 능연은 태연하게 휴대전화를 꺼내 게임을 켰다.
“적군 침입 5초 전. 준비, 돌격!”
게임 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무실의 팽팽한 긴장감은 삽시간에 풀렸다. 양쪽 모두 능연을 몇 초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소리의 제공자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하나둘씩 시선을 옮겼다.
이곳에 처음 온 실습생들은 방금 세운 날을 모두 조용히 거두었다. ‘수술 경험’ 이야기를 꺼낸 실습생도 풀이 죽어 있었다.
“큰일이야. 운화 병원이 우리를 따로 분류하지 않았어.”
“큰일일 것까지야.”
안 그래도 풀 죽은 실습생들은 그런 의기소침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만약 따로 분류됐다면 근무하는 의사를 따라 일을 배울 수 있어. 직접 뭘 할 수 없더라도 주워들을 건 있겠지.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면 레지던트가 더 도움이 되니 간호사가 우리를 선택할 이유가 없어져. 우리는 아마 계속 여기에 앉아 있다가 다른 과로 로테이션 되겠지.”
이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실습생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머지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으잉? 왜 간호사가 사람을 지명해?”
“그럼 누가 하겠냐? 담당 주임이 여기까지 와서 지명할 줄 알았어? 일손이 부족할 정도로 바쁜데 어떻게 오시냐.”
그는 기분이 나빴는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됐어. 그냥 이렇게 며칠 참지 뭐. 다 바쁘게 움직이면 힘쓰는 일이라도 시켜주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며칠 동안 계속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는 거네?”
“레지던트는 우리보다 아는 게 많잖니. 생초보인 우리보다는 수준이 무조건 높아. 이런 분들도 지금 수술에 들어갈 수 없는데, 우리 차례가 올 것 같냐?”
“내과로 배정받았으면 좋았을걸. 진단서 쓰는 방법이라도 배울 수 있을 텐데.”
의료 업계에 대해 잘 아는 실습생이 그 말을 듣더니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울분을 터트렸다.
“병원에서 가장 시간을 허비하는 게 실습생들이야. 운화 병원은 실습생에게 기회 주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그런 부류······.”
쾅!
사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간호사 한 명이 손에 약품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레지던트 몇 명이 다급하게 일어나더니 ‘왕 선생님’, ‘왕 미녀님’이라고 불러댔다. 그나마 자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레지던트도 자세를 가다듬고 미소 짓는 얼굴로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젊은 레지던트들은 실전 기회를 얻고 싶어 무릎까지 꿇을 기세였다. 왕 간호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을 지명하려던 순간 극도로 잘생긴 능연을 발견했다. 그녀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봉합할 줄 아세요?”
능연이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따라오시죠.”
왕 간호사는 대답도 듣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려 총총걸음으로 나갔다. 그녀가 사무실에 남긴 것은 실망뿐이었다. 그녀의 선택과 외모지상주의 사회에 대한 실망.
“어떤 환자입니까?”
능연은 빠르게 왕 간호사를 뒤따라가며 물었다. 긴장을 안 할 수는 없었다. 패키지에서 ‘마스터급 봉합술’을 얻었지만, 응급실 환자를 봉합만으로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연습과 퀘스트 완수를 원하는 능연이라도 환자의 몸을 갖고 장난칠 수는 없었다.
“넘어지면서 나뭇가지에 손이 뚫린 환자.”
나이를 따지면 능연보다도 어릴 왕 간호사가 습관처럼 쌀쌀맞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의 볼이 붉어지면서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키가 크시네요.”
능연은 어렸을 때부터 잘생겼다고 들어온 터라 습관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간호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려 자기소개를 했다.
“전 왕가예요. 가는 아름다울 가(佳)예요.”
“예쁜 이름이네요.”
능연은 적절한 답을 정확한 타이밍에 내놓았다.
어린 간호사는 정신없는 업무가 한결 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그저 그와 몇 마디 더 나누려고 가는 내내 종알종알 당부를 늘어놓았다.
처치실에 들어선 왕 간호사는 ‘3’이라고 표시된 커튼을 젖혔다. 사오십대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하늘색 침대 위에 누워 다친 손을 뻗고 있었다. 능연은 자신을 등지고 서 있는 의사가 고개를 숙여 핀셋으로 붕대를 푸는 모습을 보자, 안도와 아쉬움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주 선생님, 사람 데리고 왔습니다.”
왕가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고했어.”
주 선생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능연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잠시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운화 병원은 성에서 가장 큰 종합 병원이라 본원만 해도 천 명이 넘는 직원이 있었다. 게다가 해마다 연수, 표준화 훈련, 실습 등 각종 이유로 오는 사람도 많다 보니, 의사의 얼굴을 몰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흔했다.
“데브리망(debridement, 변연절제술)을 해줘. 0.9% 생리식염수를 요오드에 믹스. 마취제는 갖고 왔나?”
누굴 데려왔는지 환자 앞에서 물어볼 수 없으니, 그는 다시 처치에 집중했다.
“2% 리도카인 준비했습니다.”
왕가는 대답하며 조제한 국소마취 약품을 주사기로 빨아들인 후 주 선생에게 건넸다. 주 선생은 주사기를 확인한 뒤 환자의 상처 부근에 찔렀다. 능연은 이 모든 과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의 모습은 트랜스포머를 수리하는 장면을 구경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해 보였다.
의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 마취 절차를 우습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에 마취제를 주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남들과 같은 양의 마취제를 놓았는데 효과가 없다면 양을 조금 줄여 몰래 한 번 더 투입해도 되지만, 주입 위치를 잘못 찾아 주삿바늘이 신경을 건드리게 되면 작은 일도 큰일로 번질 수 있었다.
실전보다 이론 위주로 진행되는 대학 강의에서는 ‘국소마취’의 개념과 특별한 예를 드는 것으로 금방 끝났다. 하지만 다친 환자가 오는 실제 상황에서 교과서대로 움직이는 의사는 없었다. 그러니 의대생은 교실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실습에서 얻어가야 했다.
“세척.”
주 선생은 주사기를 치운 뒤 명령했고, 능연은 왕가가 조제한 용액을 곧바로 상처 부위에 부었다.
“더 세게 부어요.”
주 선생이 지시하며 포셉으로 상처를 헤집었다. 교수의 모든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는 적당한 힘으로 상처에 박힌 이물질을 제거했고, 메스를 집어 들어 상처 부근의 피부를 소량 도려냈다. 얕은 상처에서 피부를 도려내면 절반이 완성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주 선생은 조금 못생긴 편이어도 단정해 보였다. 세심하고 마음씨 좋은 아저씨 분위기를 풍기는 그가 환자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상처에 묻은 게 있어서 몇 번 더 깨끗하게 소독하고 봉합해드릴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천천히 하셔도 돼요. 천천히.”
국소마취의 효과 덕분에 환자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방금까지 한껏 찌푸린 인상도 풀린 상태였다.
“솔잎이 떨어진 흙바닥에 넘어졌는데, 괜찮겠죠?”
“그럼요. 몇 번 더 소독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 선생이 상냥한 목소리로 안심시켜 주었다. 의사가 괜찮다고 해주니 환자도 긴장을 조금 풀었다.
능연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주 선생님, 봉합은 제가 맡아도 될까요?”
휴게실에서 쉽게 탈출했을 뿐 아니라, 말도 잘 통할 것 같은 의사를 만나다니. 지금 물어보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시스템이 준 퀘스트를 끝내야 하니까. 완벽하게 처리하면 트랜스포머를 주지 않을까.
“음, 그럼 부탁해요.”
주 선생은 임무 완수에 방해는커녕 ‘왜?’라는 질문조차도 하지 않았다.
정말 큰 수술에서는 집도의가 어시스턴트에게 여러 요구를 하기 마련이다. 원한다고 해서 무언가를 할 기회 따위는 없다. 그러나 이곳은 응급실. 데브리망 정도는 잔말 없이 빨리 처리해야 한다.
응급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주 선생은 수술 경험을 쌓으려는 레지던트를 많이 봐왔기에, 기회가 있으면 그 기회를 레지던트나 실습생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되고 문제가 생기면 그 즉시 자신이 처리하면 되니, 귀찮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레지던트들이 응급실에 줄을 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지친 의사들이 많다는 소문이 난 부서라서 이런 작은 처치 정도는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능연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봉합 준비를 마친 뒤, 서서히 주 선생이 서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시스템이 없었다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기회를 만들 생각을 못 했겠지만, 그는 지금 ‘마스터급 봉합술’을 터득한 자였다. 자신감은 충분했다.
주 선생이 이미 상처 부위 청소를 끝낸 상태였다. 작은 상처 봉합일 뿐이니, 절차대로 차분하게 해내면 된다. 니들홀더를 들자, 능연을 괴롭히던 모든 근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 선생은 눈앞에 있던 어설픈 ‘레지던트’가 갑자기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며 손을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1초 전만 해도 이 신입에게 봉합을 맡겨도 되는지 고민했었지만, 이제는······.
능연은 니들을 표피하에 찌른 뒤 핀셋으로 매듭을 지으며 단순 단속 봉합법을 해냈다.
“어라, 벌써 끝낸 건가요?”
주 선생은 혀를 깨물 뻔했다. 응급실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손이 빠른 외과 의사는 많이 봐왔다. 전설에 따르면 급성 대동맥 파열 환자를 2분 안에 봉합한 ‘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외과 명수들은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주 선생은 정신을 차리고 능연을 응시했다. 이 ‘레지던트’의 어깨에서 밝은 빛이 퍼지고 있었다.
음, 아무래도 무영등이 너무 눈부신 것 같은데.
목표치의 1/10을 완수했어!
능연은 기분이 좋았다.
“주 선생님, 어떤가요?”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빠르고 잘하는지 알지 못해 확인이 필요했다. 실력은 패키지 덕분에 늘었다 해도, 의학적인 판단력은 여전히 실습생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무엇이든 오래 많이 보아야 정확한 기준이 선다. 홀로 반평생 산속에서 사냥을 위해 달린 사람도 타인과 경주를 해보아야 자신이 달리는 속도가 빠른지 느린지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주 선생은 당황해서 능연을 힐끗했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건가? 그래도 환자 앞에서 그러면 안 되지. 장난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설마······, 칭찬을 바라는 건가! 아니면 그냥 자랑질? 짧은 순간에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외과 의사는 종종 특이한 행동을 하곤 한다. 수술실에서 클래식이나 헤비메탈, 또는 힙합이나 만담을 틀어 놓는 의사는 정상적인 편에 속했다. 썰렁한 농담을 즐기는 것은 외과 의사의 필수 자질이었다.
욕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칭찬을 갈망하는 의사는 보통 의술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졌다. 기술이 좋으면 당연히 남을 욕할 수 있고, 수술실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칭찬해 달라고 마음껏 요구할 수 있는데······. 주 선생은 찜찜했다. 이 젊은 의사, 알고 보면 운화 병원에서 연수받았다는 간판을 따러 온 지방 병원의 고수 아니야?
훈련이라는 목적이 같더라도, 실습이냐 표준화 훈련이냐, 아니면 지방 병원 의사의 연수이냐에 따라 실력이 엄연히 달랐다.
이런 기술을 갖고 지방 병원에서 일했다면 지금까지 분명 많은 칭찬을 들었겠지. 거기서 온갖 특이한 행동을 다 받아줬으니 이러는 거 아닐까. 직접 봉합한다고 나선 건 분명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어서겠지. 근데 아무리 기술이 좋다 해도 내가 네 후배도 아니고, 비위 맞춰줄 필요는 없잖아?
주 선생은 마음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짜내며 고개를 들었다.
“너무 완벽한 봉합인데······.”
에휴, 사회인이 사회생활 하는 건 어쩔 수 없겠지. 다른 병원 고수의 미움을 최대한 사지 않는 게 상책이야.
그는 속으로 때 묻은 자신을 안타까워했다. 세속이라는 진흙 속에서 허덕이는 주 선생은 지조와 꿈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하며 태연한 척 질문을 던졌다.
“처음 뵙겠습니다만, 성함이······?”
그는 능연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어서 한 수 보여준 것으로 생각했다. <수호지>에서 호걸들이 바위를 깨트리거나 호랑이를 때려잡는 것도 모두 유명해지기 위해서니까. 기술이 좋으니까 비위 한 번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능연이라고 합니다. 어제 응급 의학과에 배정됐습니다.”
교수가 물으니 실습생인 능연은 반드시 대답해야 했다.
“능연 씨군요.”
주 선생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감았다.
“능 선생님, 손가락이 가늘고 긴 걸 보니까 역시 타고난 외과 의사셔요!”
평소 실습생들에게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 왕 간호사는 능연의 미모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 이제는 ‘의사’라는 칭호도 거리낌 없이 사용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습을 막 시작한 의대생은 환자가 ‘의사’라고 불러주면 구름 위를 걷는 듯 행복에 젖는 법이다. 능연도 어린 실습생이라 왕 간호사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자 젊은 간호사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주 선생님 시간 되세요? 3번 침대에 환자가 들어왔습니다.”
간호사 한 명이 뛰어와 다급하게 주 선생을 불렀다.
응급실에는 끊임없이 환자가 밀려들어 왔다. 가슴팍에 칼이 꽂혀 있는 환자도 급하겠지만, 입속에 전구가 낀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주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호사를 따라갔다. 능연도 망설임 없이 교수의 뒤를 따랐다. 뻔뻔하게 기회를 쫓는 것이 실습생의 기본이니까.
왕가는 다른 간호사가 불러 다른 침대로 뛰어갔다. 의사가 바쁜 것처럼 간호사도 숨돌릴 틈이 없었다.
주 선생은 다른 병원의 고수가 자신의 곁을 따라다니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간호사는 능연이 따라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능연을 한번 훑어보고는 환자 상황을 브리핑했다.
“3번 침대 환자의 말에 따르면 누가 자신의 머리를 둔기로 내려쳤대요. 한 시간 정도 출혈이 있었고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쇼크, 메스꺼움, 이비인후 쪽 출혈은 없었고, 팔다리 활동에도 지장이 없었습니다.”
팔에 꽃무늬 문신을 한 젊은이가 아빠 다리 자세로 앉아 있었다. 삼각형 모양의 작은 눈에 넓적한 코를 가진 근육질 남자는 붕대로 좌측 머리를 가리며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불량배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아이고! 의사 선생님 오셨네요! 선생님 어서 우리 형님 좀 봐주세요.”
곁을 지키던 남자는 다친 환자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였다. 그는 하얀 가운을 입은 존재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마자 목소리를 한 톤 더 높였다.
“수백 명이 우리 형님을 칼로 베려고 달려드는 거 아닙니까! 형님께서 싸움을 잘하시지 않으셨으면 이 고비 넘기기 힘드셨을 겁니다. 이거 잘 꿰매셔야 합······.”
“비키셔야 제가 보죠.”
주 선생은 답답했는지 일단 불만을 토로한 뒤 해야 할 말을 했다.
“환자 가족은 바깥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다시 부르겠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저희는 여기서 지켜봐야 합니다.”
두 불량배는 힘을 주고 고개를 저었다. 부릅뜬 눈은 방울처럼 동그랬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 두 분까지 서 있으시면 저희가 어떻게 응급 처치를 합니까.”
주 선생은 이런 일을 밥 먹듯이 겪어 본 듯 매우 평온하게 대꾸했다.
병원은 환자를 고를 수 없다. 응급실이면 더더욱. 의사와 환자의 복잡한 관계는 그 무엇보다 복잡해 닦달하거나 짜증 낼 수는 없었다.
두 불량배는 머리를 땡땡이처럼 흔들었다.
“형님 곁에 사람이 없으면 안 됩······.”
“수납할 사람만 남으면 됩니다. 다른 분은 밖에 계세요.”
주 선생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돈 냈거든요!”
불량배는 서서히 불안해졌다.
“이 정도로 심하게 다쳤으니 분명 추가 비용이 발생할 겁니다. 둘 중 한 명만 남아주세요.”
주 선생이 그렇게 말하며 나가라는 손짓을 하자 결국 두 불량배는 얌전히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사라졌다.
하지만 주 선생이 원했던 평화는 쉽게 오지 않았다. 문신한 사내는 국소마취 후 온몸의 고통이 사라지자 데브리망을 받으면서 자신의 전적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주 선생은 말을 하면 상처 부위가 떨린다고 경고했지만, 사내는 건망증이 있는지 금방 교수의 말을 잊고 떠들었다. 억지로 데브리망을 진행한 주 선생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핀셋을 내려놓은 그는 다시 사내에게 경고했다.
“이제 봉합할 겁니다. 또 한 번 입을 열면 엉뚱한 곳을 찌를 수 있어요.”
“잘못 찌르면 의료 사고니까 배상해줘야지.”
문신한 사내는 꿋꿋하게 말대꾸했다.
“치료가 제대로 안 된 건 당신들 잘못이니까 알아서 잘해야 하는 거 아냐? 그 누구였지, 그래! 관우! 관우랑 관운이었나. 하여튼 그 사람들은 뼈를 깎는 치료를 받고서도 술 마시며 기름진 음식을 먹었다며? 심지어 바둑까지 두었대! 그런 짓거리 해도 그 편작(扁鵲. 중국 전국시대 명의)이라는 의사 양반은 아무 말도 안 했다잖아?”
주 선생은 어이가 없었다.
“괄골(刮骨)을 진행한 의사는 화타(華佗)입니다.”
“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관우 형님의 일은 빠삭하지! 가방끈 긴 양반이 왜 이러셔? 화타가 뼈를 깎으며 치료했다고? 하이고, 배꼽 빠지겠네.”
“화타는······, 됐습니다.”
주 선생은 능연을 돌아보았다.
“봉합하실래요?”
실력 뽐내러 온 고수니까, 이번에는 어려운 환자를 맡겨보지.
주 선생은 성큼성큼 환자 곁에 다가가는 능연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여러 결말을 상상했다.
“몸을 옆으로 조금만 틀어주세요.”
능연은 편한 자세를 취하게 한 뒤 니들홀더를 들었다.
아까부터 젊은 능연이 신경 쓰였던 문신한 남자가 불평했다.
“뭐야, 사람 바꿔? 나 병원 좀 많이 가봤거든? 오늘 이 상처 제대로 못 꿰매면 너희 앞으로 편하게 살아갈······.”
자신이 말하는데도 주 선생이 집중하지 않자 그의 불만은 증폭됐다.
“어이, 너 표정이 왜 그래!”
주 선생은 떡 벌린 입을 다물고 경악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능연을 바라보았다. 문신한 남자에게 봉합이 끝났다고 말해 주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아무리 두부(頭部) 봉합이 외과에서 쉬운 기술에 속한다 해도 상대방이 말하는 와중에 신속하게 봉합을 끝내다니. 이토록 현란한 능력은 주 선생도 처음 보았다.
이런 기술은 큰 수술에서 사용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나. 심장외과 수술은 심장이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을 진행해야 해서, 혈관 내지 승모판막의 봉합은 몹시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런 수술에 가장 좋은 기술이 사용되어야 했다. 난이도 최상급의 봉합술이 번쩍거리는 대머리에 쓰이는 것은 너무나 아까웠다.
그러나 표피하에 니들을 찔러 넣고 니들홀더로 매듭을 짓는 단속 봉합을 막 마친 능연은 자신의 기술이 오히려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는 멋지게 도구를 제자리에 둔 뒤, 문신한 남자의 머리를 트랜스포머 피규어를 잡은 듯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음, 예쁘게 봉합됐네요!”
능연은 자신의 작품이 만족스러웠다.
문신한 남자는 거울로 머리를 비추어 보았다. 가느다란 봉합사가 상처를 완벽하게 이어주어,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상처의 정확한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상처 부근에 남은 혈흔만이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능연은 이렇게 깔끔하게 봉합해야 마음이 놓이는 성격이었다. 삐죽 튀어나오게 바나나를 봉합하는 동기들을 아름다움이란 찾아볼 수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
“맞을 때보다 더 빠른데? 음, 잘 잘 꿰맸네. 깔끔하고 말이야.”
병원을 자주 들락날락하다 보니 남자도 나름 보는 눈이 생겼다. 그는 연신 감탄하더니 능연에게 명함을 건넸다.
“의사 선생, 이거 내 명함이야. 다음에 일 생기면 연락하게 명함 하나 줘.”
“명함이 없어서요. 하지만 여기서 근무합니다.”
능연은 살짝 마음이 동했지만, 그래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문신한 남자는 자신의 허벅지를 ‘탁!’ 소리를 내며 쳤다.
“좋아! 곧 사람 몇 명 베러 갈 테니까, 우리 형제가 다치면 다 너한테 보내도록 하지.”
그는 기분이 좋아져 얼룩덜룩해진 양팔을 흔들며 아우들을 큰 소리로 불렀다.
“어이! 그놈들 다시 베러 가자!”
“복수다! 복수다!”
응급실 밖에 문신한 불량배가 어느새 떼거리로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한 가족인 듯 한마음 한소리로 외쳤다.
능연은 퀘스트 진행도가 ‘2/10’으로 변화한 것을 보며 마음속으로 작은 기대를 품었다. 불량배 같은 날개 꺾인 천사는 병원 실습생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왕 선생님, 오늘 응급실에 환자가 별로 없군요.”
젊은 레지던트가 종종걸음으로 간호사에게 다가가 홍차 음료 한 병을 건넸다.
“저 달달한 음료 싫어해요.”
왕가는 음료를 받지 않았다.
“내 기억 좀 봐.”
레지던트는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다들 피곤하시죠. 이제 저희가 맡을까요?”
사실 따져 보면 레지던트는 아무도 아껴주지 않는 실습생과 달리 간호사와 동료 관계였다. 온종일 기다리게 만들고 일을 넘겨주지 않는 것도 실례다 보니, 왕가도 틱틱거리는 태도를 조금 누그러트렸다.
“지금은 일이 없어요.”
“응급실에 환자가 없다고요?”
레지던트는 약간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응급실은 환자를 ‘선별’하는 곳이기도 하다. 큰 병원의 응급실은 매일 대량의 환자를 여러 진료과에 배분한다. 특히 위독한 응급 환자가 왔을 때는 우선 간단한 치료로 상태를 안정시킨 뒤 수술실로 긴급 이송된다.
한마디로 응급 의학과는 일하고 싶으면 원 없이 일할 수 있는 곳이다. 레지던트들도 이런 이유로 응급실에 찾아와 수술 경험을 쌓는 것이다.
“오늘 들어온 환자들이 조금 특이하다 보니······.”
왕가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처치실에 있던 일을 알려주진 않았다.
“특이해도 괜찮아요! 저희 뭐든 다 할 수 있거든요! 그렇지, 오 선생?”
어느새 또 한 명의 레지던트가 나와 왕가에게 질문했던 사람의 어깨를 감쌌다.
“탁구공이 걸린 곳이 목구멍이든 똥꼬든 다 잘 뺄 수 있습니다.”
오 선생이 결연에 찬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병원 응급실 채용 기준은 골프공 빼기입니다.”
왕가의 간호사 인생은 절대 짧지 않았다. 두 레지던트의 시시한 개그에 질세라 그녀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골프공이 어떻게······.”
“됐고요, 오 선생님과 이 선생님 모두 절 따라오세요.”
막 썰렁한 개그에 눈을 뜨기 시작한 젊은이들의 시도는 시작되자마자 꺾이고 말았다.
오래 일한 간호사는 말만 매몰찰 뿐, 속은 여전히 순두부였다. 왕가는 쌀쌀맞게 굴어도 레지던트를 위해 일을 남겨 놓는 타입이었다. 이들이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 결정하는 것은 주치의와 진료과 주임의 몫이었다.
몇 미터 밖에 실습생들이 앉아 있는 사무실이 있었다. 그들은 안에서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면서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오 선생과 이 선생은 흥분하며 왕가의 뒤를 따라 처치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